- 前 美 대사워커 -한화의 30년 至交
“형님으로 부르라” 워커 전 대사는 원래 중국학을 전공했다. 42년 미국 드류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 학사를 취득한 그는 50년 미국 예일대에서 국제교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문 분야는 중국 지역이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50년부터 예일대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6. 25전쟁 발발 후 육군 통역 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그는 맥아더 장군의 통역관으로 한국과 최초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도 중국·한국 등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한국을 오가던 워커 전 대사가 김종희 선대 회장과 인연이 닿은 것은 60년대 말. 52년 조선화약공사(한화의 전신)를 설립, 군수산업에 몸담고 있던 김 전 회장과는 미군을 통해 서로 알게 됐다. 김 전 회장은 주한 미군 수뇌부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70년대 초 주한 미군 사령관이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과 특히 가까웠다. 73년 한국에 머물던 워커 전 대사의 집은 용산 미군 기지 내 스틸웰 장군 집 바로 건너편. 용산기지를 드나들던 김 전 회장은 스틸웰 장군 집에서 자주 워커 대사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됐고, 이들의 우정도 자연스레 깊어갔다. 워커 전 대사는 98년 출간한 그의 회고록 「한국의 추억」에서 '김 전 회장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독특한 맛과 향기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 소중한 친구'라고 썼다. 워커 전 대사는 1922년 생으로 김 전 회장과 동갑내기다. 만나서 친해질 듯싶으면 형·아우 서열부터 정리하는 한국식 친구 사귀기에 익숙해 있던 워커 전 대사는 자신보다 두세달 늦게 태어난 김 전 회장에게 “형님으로 부르라”고 했을 정도로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됐다. 워커 전 대사가 보는 김 전 회장의 모습은 이렇다. 한마디로 열정이 온 몸에서 펄펄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 워커 전 대사는 “김 전 회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자제력과 통솔력도 뛰어났고, 매사를 자신감 있게 추진하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가 김 전 회장에게 자주 건넸던 농담 중 한구절. “이봐요, 다이너마이트. 당신 몸에는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아. 우리가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더라도 당신이 들어오면 나는 직감적으로 당신임을 알아챌 정도라구”. ‘다이너마이트’는 김 전 회장의 미국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화약을 만드는 회사 사장이니 당연한 별명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김 전 회장은 ‘폭발적인’성격의 소유자란 뜻이렸다. 김승연 현 한화 회장도 아버지의 별명을 이어받았다. 김승연 회장은 미국 친구들 사이에서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통한다. 당신은 ‘다이너마이트 김’이야! 워커 전 대사는 자신의 회고록 곳곳에 ‘다이너마이트 김’에 대해 써놓았다. 특히 한국 산업화의 역군으로 한국의 미래를 짊어졌던 일꾼으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서울 시청 맞은편에 자리잡은 플라자 호텔에 들를 때마다 김 전 회장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그를 추억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설립한 이 호텔에 워커 대사는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 호텔에서 워커 전 대사는 아끼는 친구 ‘다이너마이트 김’을 만나 국가의 미래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이 호텔을 볼 때마다 근대화를 주도했던 한국 재계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고 한다. 워커 전 대사와 김 전 회장 간에는 가족간의 교류도 잦았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 세니 여사는 김 전 회장의 가족들과 한 식구처럼 지냈다. 김 전 회장의 부인 강태영씨는 ‘케이’란 미국식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행사에서 세니 여사와 시간을 보냈다. 김승연 회장도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김 전 회장과 워커 전 대사의 인연은 81년, 김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끊어지는 듯했다. 워커가 주한 미 대사로 서울에 부임하기 석달 전, 김 전 회장은 58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김 전 회장과 워커씨와의 인연은 대를 이어갔다. 김승연 회장이 워커 전 대사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관계를 이어간 것. 82년 7월23일, 김 전 회장의 1주기 추도식에서 워커 대사는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오늘의 미국을 만드는데 카네기와 멜론·벤더빌트·록펠러 등 재계 지도자들이 큰 일조를 했다. 2차 대전 이후 한국에도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고, 김 전 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국가 건설을 위해 비(非)정치 분야의 많은 뛰어난 ‘건축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그를 회고했다. 워커 전 대사는 김 전 회장을 “회사를 권위주의적으로 운영하는 면도 있었지만 능률적인 면에서는 더욱 돋보이는 경영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솔직담백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성실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워커 전 대사는 77년 이리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 당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의 모습을 특히 기억하고 있다. 사고로 회사가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지극 정성으로 피해가족을 보살피던 그의 모습이 바로 지도자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워커 전 대사는 현재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에서 워커 연구소를 운영하며 만년 현역 학자로서의 생을 살고 있다. 많은 국제 관계 저널에 한국 관련 저술을 기고하는 등 한국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다. 최근 그를 비롯한 주한 미국 대사 역임자들의 북한 방문을 추진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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