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친화력을 가진 증권계의 마당발 오호수 증권업협회장
특유의 친화력을 가진 증권계의 마당발 오호수 증권업협회장
차 안에는 늘 ‘발레타인 17년산’이 이 전 장관이 재경부 장관 시절 국회에 들를 때면 거의 열에 아홉번은 오회장을 ‘콜’했다고 한다. 국회가 끝나거나 아니면 정회가 길어져 시간이 남을 때 이 전 장관과 오회장은 주로 여의도의 M카페에서 회동을 했다. 또 강남에서는 서초동 성모병원 근처의 ‘토박이’란 허름한 밥집이 그들이 ‘2차’ 내지 ‘3차’에서 합류하는 아지트였다. 그래서 오회장의 차 안에는 항상 ‘발렌타인 17년’이 준비돼 있다. 오호수 회장에게는 친구가 많다. 그만큼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마당발’ ‘보스’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오회장 스스로도 “솔직히 친구들과 지인들 덕분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지인이 많은 배경을 “웬만하면 양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가 실력도 많지 않고 머리의 한계도 있잖습니까. 전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저의 부족한 면을 메워주기 때문이죠. 친구는 ‘공기’와 같습니다. 없어졌을 때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자세를 낮추고 조금만 양보하니까 상대방이 저를 버리지 않더군요.” 그는 광주서중과 경복고를 나왔다. 광주서중이 없어지고 광주일고와 하나의 동문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그는 “광주일고·경복고 양쪽 모임을 다 나가게 되니 아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광주서중 당시 친하게 지냈던 이들은 박종렬 광주지검장과 신명호 ADB 부총재·최인기 전 행자부 장관 등이었다. 그리고 오회장은 중학교 졸업 후 전 서울로 상경, 경복고에 들어간다. “광주지법·고법원장에 나중에 대법관을 지낸 부친의 영향인지 그야말로 ‘엄부엄모(嚴父嚴母)’밑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저의 학창시절은 불량소년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자유롭게 지낸 편이었습니다. 부모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론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죠. 고등학교 때도 당시 경기고로 진학한 박검사장과 항상 어울려 다녔습니다. 박검사장이 바로 경복고 앞에서 하숙을 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가 어찌나 아침잠이 많은지, 제가 맨날 등교하면서 초인종 눌러 깨우곤 했지요(웃음). 그리고 의기투합하면 땡땡이도 종종 치곤 했지요(웃음).” 경복고를 졸업한 그는 연세대학교 법대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정작 연세대보다는 서울대에 친구들이 많다. 그래서 아직까지 오회장이 서울대를 나온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제가 아는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서울대 법대를 갔어요. 그래서 박검사장 등과 같은 과 친구였던 이헌재 전 장관을 그때 알게 된 거죠. 대학교 1학년 때입니다. 저희 집이 서울대 법대가 있었던 삼선교 근처였거든요. 그래서 맨날 서울 법대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맥주는 비싸 못 마시고 막걸리 마시며 신나게 돌아다녔지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상당수 사람들이 제가 경기고에 서울 법대 나온 줄 알고 있더군요(웃음).” 맏형 같은 인상에 강단 갖춘 외유내강형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맏형처럼 편안하고 친숙한 인상만큼 넉넉한 그지만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단이 있다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인 셈이다. 그를 아는 재경부 관계자는 “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고 한다. 그의 성격은 자신의 취미인 골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골프 파트너였던 증권업협회 B씨는 “내가 이기면 오회장은 ‘리턴매치’를 벌여 반드시 뒤집어야만 속이 풀리는 성미”라고 털어 놓는다. 실제 오회장은 웬만해선 오케이(홀컵에 어느 정도 가깝게 갖다 붙이면 추가 퍼팅을 않고 퍼팅 성공을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를 안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게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요즘은 이 전 장관과의 리턴매치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그의 집요함과 승부 근성은 25년 동안의 증권맨 경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친구인 박종렬 검사장과 절에 들어간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마지못해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저히 나하고는 안 맞는 일인데 자꾸만 안 될 일을 시키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절에서 내려와 제일은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28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해에 박검사장이 뒤늦게 사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박검사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하고 어울려 노느라 늦게 사시에 합격했지만 그 덕분에 오래까지 현직에 남아 있는 줄 알라고요(웃음).” 그는 첫 직장인 제일은행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당시만 해도 1위 점포였던 명동지점에서 수신 업무를 맡았던 그는 지점장이 ‘오차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은행에 뿌리박힌 ‘연공서열’분위기 때문에 그는 좌절을 맛본다. 5년차가 되니 지점에 내려가 있던 대학 동기들이 ‘대리’ 직함을 달고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상사가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입행한 데 따른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증권 쪽으로 뛰어들었다. 건설증권을 거쳐 77년 4월 과장 말석 직함을 달고 대우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탱크 같은 추진력을 바탕으로 각종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가 주로 맡은 일은 법인영업, 즉 기관투자가들로부터 돈을 끌어모으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끈질김으로 승승장구했다. 대우증권이 법인영업을 내세워 치고 나가자 다른 증권사들이 앞다퉈 법인영업부를 신설할 정도였다. 79년 8월 그가 처음으로 지점장을 나간 무교동 지점은 생긴 지 1년도 채 안 돼 전국에서 실적이 최하위였다. 그곳을 오회장은 지점장으로 나간 뒤 불과 3개월 만에 전국 1위로 만들어냈다. 대우증권 출신 한 관계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손님으로 만들어내는 오회장의 재주에 증권업계에서는 그를 두고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소리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대우증권 입사 11년 만인 88년에 이사대우에 오른다. 사령장이 붙은 날 사내가 웅성거렸을 정도의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 이사대우로 승진한 그는 회사측으로부터 특명을 받는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덩치였던 새한미디어의 주간사 자격을 따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리 한 명을 데리고 본사가 있는 인천으로 달려간 오회장은 그만 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새한미디어 이창희 회장은 이미 거절하기 힘든 여러 곳으로부터 기업공개와 관련된 부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의 친한 친구였던 김봉훈 한국투자금융(현 하나은행) 회장을 비롯, 이창희 회장의 ‘포커 친구’였던 김영일씨, 이창희 회장의 보성고 동기인 이건중 럭키증권(현 LG투자증권) 사장이 그가 상대해야 할 경쟁자였다. 그로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3개월 동안 거의 쉬는 날 없이 인천에 내려갔습니다. 경쟁자들이 막강하기는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창희 사장을 비롯 모든 임직원을 설득시켰습니다. 결국은 실적이 우수한 증권사가 당신네 회사를 훌륭하게 이끌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인적·물적 측면에서 어느 증권사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러자 결국 이회장이 감복하며 한마디 하더군요.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믿어보겠네’라고요.” ‘글라스 소주’ 사건 또 하나 아직도 대우증권 직원들 사이에 신화처럼 내려오는 일화는 ‘글라스 소주’ 사건이다. 그가 전무로 근무하던 94년의 일이다. 1년에 한 번씩 기관투자가들을 초청해 제주도에 내려가 설명회를 하고 다음날 골프를 치는 행사였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으로 만들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오회장은 행사 첫날밤 저녁 자리에서 42명의 잔을 다 받아냈다. 그것도 맥주잔에 소주를 절반 이상 채운 이른바 ‘글라스 소주’였다. 물론 ‘원샷’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대우증권 관계자들은 “대략 맥주잔 반 잔이 소주 4분의 1병이니까 오회장은 소주 10병을 넘게 마신 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도 또 잔이 더 돌아 그 자리에서 소주를 1백병 넘게 비웠다고 한다. 대우증권 관계자는 “그리고 또 맥주집에 2차를 갔습니다. 그래서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다들 필름이 끊겨 호텔 복도에 쓰러져 잠이 든 사람이 상당수일 정도였죠.” 또 다른 관계자의 이야기.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다음날 새벽 오회장님이 골프장에 일찌감치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객들을 일일히 접대했던 것입니다. 도무지 당일날 새벽까지 소주 10병을, 그것도 계속 원샷으로 마신 사람으로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오회장님도 속으로야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걸 다 아는 기관투자가들이 모두 혀를 내두르면서 오회장님의 팬이 됐습니다.” 그만큼 그를 둘러싼 각종 무용담과 승전기에는 땀과 노력이 배어 있다. 오회장과 대우증권에서 같이 근무했고 현재도 막역한 사이인 강창희 굿모닝투신운용 사장은 “오회장 하면 흔히 ‘마당발’에 술 잘 마시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만큼 ‘샤프’한 사람도 드물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금리가 상승할 것인지 떨어질 것인지 큰 줄기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그에 맞는 사업거리를 찾아내는 데 모두가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수완은 대우증권 부사장과 대우선물 사장을 거쳐 LG투자증권 사장으로 옮긴 98년 5월 이후에도 발휘가 됐다. 98년과 99년 증시가 활황을 보이며 다른 증권사들이 확장 정책을 피며 점포 확대 및 인력 확대에 나섰지만 그는 내실을 기하는 쪽을 택했다. 대신 HTS(홈트레이딩 시스템)를 여느 증권사보다 일찍 도입, 온라인 고객을 끌어모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적중했다. “옆집(당시 LG투자증권 사옥은 현대증권 사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의 이익치 회장이 자꾸 드라이브를 거는데 미치겠더라구.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했습니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는 다른 대형 증권사들이 수익률이 높은 대우채를 사들여 이익을 낼 때도 철저히 외면했다. “솔직히 대우 쪽이 친정이기는 하지만 내가 대우에 있으면서 결산 때마다 분식회계하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대우가 97·98년에 엄청난 회사채를 발행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대우채를 편입시킬 수 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대형 증권사 가운데 대우사태로 인한 손해를 가장 적게 본 LG투자증권은 99년 말 증권사 점유율에서 1위로 떠올랐다. 대우·현대·삼성·대신 등 다른 증권사들이 1백20∼1백30개 점포에서 거둔 실적보다 나은 실적을 1백개에 불과했던 점포에서 올린 것이다. 그리고 오회장은 당시 환매가 금지돼 있던 대우채에 대해 증권사 중 가장 먼저 환매를 허용한다. 물론 개인투자자 보호라는 명목이었지만 1등으로 올라 선 LG투자증권이 다른 증권사에 비해 사정이 가장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이기도 했다. 당시 LG투자증권 관계자의 증언. “임직원 모두가 오회장의 결단을 지켜보면서 ‘겉으로는 덤벙덤벙해 보여도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구나’하고 탄복을 했었죠.” 당시 일각에서는 이헌재 금감원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그런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본인은 극구 부인한다. “제가 당시 대우채를 환매하기로 하니까 바로 금감원의 김종창 상임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사정 어려운 증권사는 어떻게 하라고 그러시냐.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된다. 제발 방침을 바꿔달라’고 하소연합디다. 그러다 안 되니 나중에는 이헌재가 그러더군요.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고요(웃음).” 정부의 증시부양 요구 단호히 거부 증권업계에서는 좌장격인 증권업협회장을 맡고 난 이후 오회장은 줄곧 ‘솔선수범’을 외치고 다닌다. 증권업협회 임직원들이 스스로 도덕성을 갖춰야 증권업계 전반이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남이 하기 꺼려하는 것을 먼저 찾아서 하는 것. 이것은 오회장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몸소 체험하고 지켜온 용인술(用人術)이기도 하다. “앞으로 제 임기가 1년 9개월 남았습니다. 남은 기간 최우선 과제는 역시 증권업계의 윤리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더 이상 각종 게이트에 증권업계가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 증권맨으로 인생을 살아온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으로 여기겠습니다.” 지난해 9·11 테러사태 이후 정부가 인위적인 주식시장 부양을 하려고 했을 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던 그의 뚝심과 배짱에 많은 증권인들이 기대를 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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