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각의 30년 流轉… 비밀요정에서 시민의 품으로
삼청각의 30년 流轉… 비밀요정에서 시민의 품으로
20년간 은밀한 사교장 역할 삼청각은 수려한 외양과 달리 아픈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화원’이다. 삼청각이 건립된 것은 지난 1972년. 당시 북한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 위해 물밑 협상 중이던 박정희 정권은 북한 대표와의 비밀협상 장소로 쓰기 위해 이 곳을 지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에는 북한 적십자 대표와의 만찬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당시 이 건물 건립을 총지휘한 곳은 중앙정보부. 라이온건축의 정재원씨(69)가 설계를 맡고,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아 설계에서 완공까지 3개월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초(超)스피드로 지어진 건물이다. 단기에 지어진 건물이라해도 ‘날림’은 아니다. 당시로는 가장 좋은 수입 목재들을 들여와 한국에서 최고 가는 목수들을 전부 끌어모아 만들었다. 본관격에 해당하는 일화당은 방탄까지 고려한 콘크리트 건물. 나머지 청천당·천추당 등 5개 건물은 목재 가옥이다. 건물 부지는 원래 교보가 소유하고 있던 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건물이 남북공동회담이 끝난 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민간인 이경자·이성자씨에게 넘어갔다. 자매인 이들 두 사람은 명문여대를 졸업하고,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던 가무의 명인이었다. 이들은 삼청각 운영을 맡으며 한국 고급 요정의 ‘대모’가 됐다. 땅의 원소유자인 교보에서 정부로, 다시 정부 안가(安家)인 이 곳이 민간인 손에 넘어가게 된 연유에 대해선 사실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삼청각 요정의 원주인 이성자씨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청각의 리노베이션 작업을 총괄한 김승업 삼청각 관장이 “언젠가 삼청각의 야사(野史)를 캐 책으로 한번 쓸 생각”이라고 할 정도로 숨겨진 흥미로운 얘기들은 많다. 삼청각은 인근에 있던 대원각·청운각과 함께 당시 서울의 3대 최고급 요정이었다. 대원각은 97년 원소유자인 김영한(여·99년 사망)씨가 절에 헌납, 현재 길상사란 사찰로 바뀌었다. 김영한씨 역시 70∼80년대를 풍미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70년대 말 군사독재 시절까지만 해도 국내 정치는 ‘밀실 야합 정치’일색이었다. 정부나 정당의 주요 의사 결정은 극소수 실권자들 간의 비밀 회합으로 이뤄졌다. 당시 정치인들이 밀실 대화 장소로 즐겨 찾던 곳은 요정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삼청각을 애용했고, 삼청각의 여러 건물 중 특히 청천당(廳泉堂)을 유독 아꼈다고 한다. 단골손님인 그를 위해 이 건물 주변에는 높은 담을 쌓고, 삼청각 내에서도 별도의 ‘아방궁’으로 꾸몄다는 것. 삼청각·대원각 등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던 호화 요정들은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만의 ‘비밀 아지트’였다. 밤늦은 시각 이곳에선 고급 술과 여자를 낀 질펀한 향연이 벌어졌고, 그 속에 국가 중대사가 좌지우지 됐다. 하지만 유명 정치인과 전국의 한량들이 드나들며 ‘밤의 역사’를 만들던 삼청각도 세월의 흐름 앞에는 어쩔 수 없이 무너져 갔다. 90년대 강남의 룸살롱이 성업하자 손님을 점차 빼앗기기 시작했고, ‘밀실정치’의 무대도 룸살롱으로 옮겨갔다. 영업이 안 되다 보니 삼청각은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의 이른바 ‘기생관광’을 유치했고, 이로써 삼청각의 명성은 더욱 주저앉게 됐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전경련과 각종 정당들의 굵직한 행사들이 열렸던 삼청각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요정 문화가 쇠퇴하면서 삼청각은 96년 중국 음식점 ‘예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결혼식장 겸 음식점으로 업종 전환을 시도해 보지만 계속되는 경영 악화로 결국 손이 바뀌게 된다. 99년 이성자씨에게서 삼청각을 인수한 곳은 주택건설업체인 ㈜화엄건설. 화엄건설의 김영태 회장은 이 곳을 고급 빌라촌으로 재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숲이 우거져 공기가 맑고 조용한 이곳은 최상의 주택지. 화엄건설은 이 곳 부지 5천8백94평에 한 채당 20억∼30억원 수준의 고급 단독주택 14동을 지으려고 성북구청에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성북구청 관계자가 “70년대 남북조절위원회, 한일회담 막후교섭이 열린 이곳의 역사성을 감안할 때 건축허가를 내 줄 수 없다”며 문화관광부에 의견을 물었다. 서울시는 이를 문화재로 보존하기로 결정, 시 문화제 위원회를 열었다. 그러나 문화재 위원들은 8대 7로 “삼청각은 지난 72년 지어진 현대 건축물인 점을 고려할 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에 대해 ‘북악산 소나무 숲과 전통 한옥을 살리기 위한 시민연대’는 “삼청각은 7·4 남북공동성명의 만찬장으로 사용되었고, 6채의 한옥과 수령 80∼120년인 3백50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만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맞섰다. 서울시는 결국 방법을 바꾸어 문화재는 아니지만 ‘도시계획상의 문화시설’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고, 이 안건은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통과됐다. 문화시설로 지정될 경우 기존 건물은 공연장·박물관·전시장 등의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다. “삼청각이 비록 문화재는 아니지만 보존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 서울시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땅을 소유한 김영태 화엄건설 회장에게는 서울시가 서울 가락동의 토지를 주고 대신 이곳을 서울시가 인수하는 형식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삼청각을 인수한 서울시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 테마 파크’로 재조성한다는 기본 컨셉트 아래, 리노베이션과 운영을 세종문화회관에게 맡겼다. 20여년간 정재계 인사들의 은밀한 사교 장소로 사랑받던 삼청각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1백80도 바뀌어 재탄생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박대통령 즐겨찾던 ‘청천당’ 삼청각 보존 작업에 들어간 서울시는 이름을 놓고 잠시 고심했다. 고급 요정으로의 이미지가 강한 삼청각이란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된 것. 하지만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대부분은 삼청(三淸)의 원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삼청은 원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집을 의미하는 태청(太淸)·옥청(玉淸)·상청(上淸)을 아우르는 말. 리모델링하면서 산과 사람과 물이 맑은 곳이란 산청(山淸)·인청(人淸)·수청(水淸)의 새로운 뜻으로 다시 새겼다. 숲으로 우거진 이곳에는 일화당·청천당·천추당·유하정·취한당·동백헌 등 6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일화당은 삼청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만찬이 열렸던 곳이다. 일화라는 뜻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니 남북 대화의 장소로는 더없이 좋은 이름인 셈. 지하 2층·지상 2층의 이 건물에는 한국의 전통극을 상시 공연하는 공연장과 한식당 아사달·전통 찻집 청다원, 그리고 사무실 등이 들어섰다. 총 2백6석 규모로 그리 크진 않지만 아담한 객석에는 무대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우리의 전통 가무악극이 공연되고 있다. 삼청각의 김승업 관장은 “일본의 가부끼, 중국의 경극에 비견되는 우리의 전통악극이 바로 가무악극”이라며 “‘가무악극을 보려면 삼청각으로 가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무악극의 본산으로 키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개관기념으로 공연된 창작악극 ‘삼청별곡’을 비롯, ‘애랑연가’등 공연은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월드컵 기간 중에는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청천당(廳泉堂)과 천추당(千秋堂)은 전통문화를 배우고 직접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으로 꾸몄다. 다례·규방 공예·도자기 공예 등 다양한 전통문화교실이 반나절 혹은 하루 코스의 체험 강좌, 4개월 코스의 정규 강좌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어린이 국악강좌도 운영 중이다. 유하정(幽霞亭)은 ‘그윽한 노을이 깃드는 정자’란 이름에 걸맞게 운치 있는 52평 규모의 팔각정. 팔면의 미닫이문을 모두 열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계곡 바람을 맞으며 전통 국악 강좌가 매일 열린다. 판소리·민요·대금·가야금 등 국악 및 전통악기 연주를 듣고 직접 따라해보는 체험의 장소다. 취한당(翠寒堂)과 동백헌(東白軒)은 삼청각의 또 다른 명물. 이곳은 안방·사랑방·마루 등 한국 전통가옥 양식을 그대로 살린 공간에서 묵어갈 수 있는 객관(客館)으로 꾸몄다. 전통 온돌과 툇마루 그리고 뒷뜰까지 아담한 한옥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취한당은 41평 규모로 집 전체를 통째로 빌릴 수 있고, 동백헌은 42평 규모로 작은 방과 큰 방을 나눠 각각 대실이 가능하다. 현재 이곳은 청다원·아사달 등 식음료 공간과 함께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다. 예약은 플라자호텔을 통해 가능하다. 특히 전통 한옥에서 초야(初夜)를 치르고 싶어하는 예비 신혼부부들에게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외국인의 사용이 우선이란다. 집을 통째 빌리는 취한당은 하룻밤에 60만원, 동백헌은 23만원∼35만원이다. 객관서 初夜 보내려 북적 삼청각에 대해 시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한 가지. 혹시 입장료가 있지 않나는 것이다. 전혀 없다. 원한다면 돈 한푼 내지 않고 삼청각 내부를 속속들이 구경하고 즐기다가 갈 수 있다. 봄·가을 이면 특히 삼청각의 잘 다듬어진 정원이 빛을 발하는 계절. 구석구석의 벤치엔 연인들이 밤늦게까지 자리를 뜰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삼청동 일대의 외국 대사관 직원 및 가족들도 단골 손님. 전통교실 강좌는 물론 산책을 즐기러 자주 들른다. 학생들도 방문객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최근 열린 재래악기 전시회, 줄타기 놀이마당, 꽃전시회 등에도 많은 학생들이 다녀갔다. 월드컵을 맞아 서울 탈춤축제도 6월8일부터 열리고 있다. 방학이면 전통 체험과 삼청각 투어, 전통 공연 관람을 한데 묶은 특강 코너도 운영할 예정이다. 지난해 10월말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연 인원 15만명이 삼청각을 다녀갔다. 그 중에는 로라 부시 미국 대통령 영부인,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 불가리아 부총리 부부 등 한국을 찾은 국빈(國賓)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다. 홍보 부족탓인지 삼청각은 여전히 서민들은 왠지 섣불리 갈 수 없는 ‘비싼 동네’로 인식되고 있는 것. 그리고 전통 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한식당 ‘아사달’등 비싼 식당이 있는 곳으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관장은 삼청각하면 공연장이 먼저 떠오를 수 있게 좀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공연을 많이 기획할 예정이다. 아직 운영 예산의 80%를 서울시에서 지원받고 있기는 하지만, 재정자립보다는 설립 취지에 걸맞게 시민들의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좀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권력자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장소가 이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한번쯤 찾아가 신선 놀음도 해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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