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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번뇌 사라지는 ‘백팔골’ 비탈밭

백팔번뇌 사라지는 ‘백팔골’ 비탈밭

보성 차밭은 국대 최대의 茶단지로 아름다운 논차밭의 곡선과 삼나무 산책로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가을에 녹차밭을 둘러보는 것은 색다른 분위기를 제공한다. 가파르면서 넓은 비탈 밭에 이랑들이 실지렁이처럼 얹힌 모습은 무척 이채롭다. 영화 ‘선물’에서 이정재와 이영애가 걷던 삼나무 숲길, 모 이동통신 CF에서 수녀가 비구니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오솔길, MBC TV 드라마 ‘온달왕자’의 신혼 여행지 등 수많은 영화와 CF·드라마의 촬영장소가 전남 보성 차밭 안에 있다. 으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풍경에 반해 실제 촬영지를 찾으면 영상마술에 속았다며 실망하기 마련인데 보성차밭만큼은 예외다. 영화 장면이 아무리 환상적이라도 이곳에서 실제로 보고 느끼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요즘은 싱그러운 가을바람에 묻어나는 다향에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진다. 녹차 하면 떠오르는 몇몇 도시가 더 있다. 지리산·하동·강진·제주도 등. 하지만 아름다운 녹차 밭의 곡선과 삼나무 산책로가 사람들의 발길을 계속 끌어당기는 곳은 국내 최대의 차(茶)단지가 있는 보성차밭이다. 차나무 재배 면적만 무려 1백27만평에 달한다. 전국 생산량의 28%를 차지하며 차를 재배하고 쪄내는 차 생산업체만도 15곳이다.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서 바닷가 마을 율포로 빠지는 18번 국도. 득량만이 시원스레 보이는 활성산 오선봉 자락이 보성만을 향해 뻗어나가다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이 언덕의 이름은 봇재. 고개를 넘으면 깎아지른 비탈에 푸른 융단같은 차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수만 그루의 삼나무는 30만평의 차밭을 경호하듯 빙 둘러싸여 있다. 녹차관광농원인 대한다원(061-852-2593, 이하 지역번호 생략)은 보성에서 가장 큰 다원을 갖고 있다. 승용차 1대가 겨우 드나들 만큼 좁은 삼나무 숲길로 들어간다. 비포장길이다.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간다고 해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3백여m를 걸어들어 가야 한다. 차나무는 먼지에 민감하므로 자동차가 일으키는 먼지로부터 차잎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햇살 한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삼나무 터널을 걸어들어 가는 기분도 각별하다. 삼나무 숲그늘과 높이가 90㎝ 정도인 차나무밭의 긴 골을 산책하면 몸과 마음 역시 초록으로 물든다. 그 상쾌함이란 이루 형용하기 힘들다. 사실 녹차밭 산책은 해뜨기 전후가 가장 좋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잠긴 고즈넉한 차밭을 거닐면 저절로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산비탈의 굴곡을 따라 만들어진 차밭은 서 있는 위치와 시선에 따라 제각각 다른 절경을 만들어낸다. 셔트를 누를 때마다 작품사진이 한 장씩 찍혀 나온다. 계단형의 골은 모두 1백8개. 차밭 사이로 난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나면 ‘백팔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록 일색의 차밭에서는 배움도 느낌도 많다. 차밭 가로지르는 유려한 곡선에서는 둥글둥굴한 세상사는 이치를, 늘 푸른 찻잎에서는 항상심을, 잘라도 새잎을 내는 차나무에서는 베품의 미덕을 각각 배운다. 배가 출출해짐을 느끼면 대한 다원 내에 자리한 녹차음식점 ‘차목원’(853-5558)에서 녹차수제비(5천원)를 먹고 난 후 녹차방에서 구수한 차맛을 음미해 보자. 삼나무 숲과 어우러지는 그윽한 차향기를 맡고 있으면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시름을 잊을 수 있다. 보성 차나무는 일본 식민지 시절인 1938년 일본인이 종자를 처음 뿌리면서 경작되기 시작했다. 맑고 고온다습한 날씨와 좋은 토양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향기와 맛의 기품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본인들이 감탄할 정도다. 차는 채취시기에 따라 우전차·첫물차·두물차·세물차·네물차 등으로, 제조방법에 따라 녹차·우롱차·홍차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곡우 전에 딴 차잎으로 만든 우전차는 최고급으로 맛이 부드럽고 향이 뛰어나 값이 가장 비싸다. 차제품은 1백g 단위로 포장돼 있는데, 우전차의 가격은 4만∼5만원. 첫물차는 4월20일쯤부터 5월 중순까지 채엽하여 만든 차로 맛과 향이 좋고, 6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한 두물차는 맛은 강하지만 감칠맛이 떨어진다. 세물차는 8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에 딴 차로 떫은 맛이 강하고, 9월 하순에서 10월 초순까지 수확하는 네물차는 엽차용으로 쓰인다. 보성은 남도의 정서를 구성지고 애절한 소리로 승화시킨 서편제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애꾸눈 명창 박유전이 담장 너머로 익힌 가락에 삭힐 대로 삭인 한을 붙여 만든 창법이 서편제다. 대원군에게 총애를 받은 박유전의 창법은 이날치와 정재근으로 이어진다. 보성 출신으로 정재근의 조카인 정응민은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섭렵해 그만의 독특한 보성소리를 만들었다. 봇재 너머 저수지를 지나 회천면 영천리의 도강마을 입구에는 서편제보존연구소가 있고 여기를 지나면 정응민의 예적지가 나온다. 조상현과 조통달도 이곳에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차밭을 구경하고 유난히 때깔 좋은 일림산을 등정한 뒤 율포 해수녹차온천탕(853-4566)에서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면 금상첨화. 지하 1백20m에서 끌어올린 바닷물과 보성의 다원에서 생산된 차잎을 우려낸 녹수를 이용하여 건강목욕을 즐길 수 있다. 3층 남탕(여탕은 2층)의 통유리창 밖으로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일림산은 한치재를 통해 올라가며 정상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매년 5월 중순께는 다원과 공설운동장 등지에서 보성다향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차잎따기·다례시범·차아가씨 선발 등 차밭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행사와 달리기 일림산등반대회 등도 벌어진다. 보성군청 문화관광과(852-5924) 여행수첩 ▶교통 고속버스는 광주∼보성읍 30분마다 운행. 열차는 서울역∼보성역 하루 2회, 광주∼보성 하루 10회 운행. 보성읍에서 봇재·율포해수욕장까지는 15∼20분 간격으로 군내버스 운행. 승용차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영양·강진·장흥을 차례로 지나면 보성이다. 호남고속도로 서광주IC에서 29번 국도를 타거나,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에서 2번 국도로 바꿔타도 된다. ▶음식·숙박 율포에 싱싱한 회와 조개류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 많다. 보성읍 중앙식당(825-2692)은 반찬이 푸짐한 백반집. 싱싱한 참꼬막도 먹을 수 있다. 농협 옆에 있는 녹차마을 녹돈촌(850-5735)은 녹차를 먹인 돼지고기를 판다. 보성읍내에 아리아(852-1441)·나인모텔(852-5695)·귀빈장(852-2131) 등 모텔급 숙소 40여개. 제암산자연휴양림(852-4434):9평형(7인용) 5만원·20평형(15인용) 8만원. 주차 무료. 웅치관광농원(852-6300):웅치면 강산리 4만평 산자락에 객실을 비롯해 야외수영장·자라양식장·보트장·사슴목장 등을 갖췄다. 방값 2∼3인 기준 3만원. 7∼8명 5만원. 부대시설 무료. ▶주변명소 율포해수욕장:1.2㎞ 펼쳐진 모래밭과 소나무숲이 청정바다와 어우러진 국민관광지. 해수녹차온천탕과 야외수영장도 있다. 온천탕은 해수와 녹차를 이용하며 동맥경화 완화와 피로회복 등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림산:해발 약 6백64m로 득량만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백두대간의 줄기. 섬진강 6백리 물줄기의 발원지가 있고, 조선시대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가 있다. 제암산:장흥군과 경계를 이룬 해발 8백7m의 명산. 정상에 철쭉과 억새 군락지가 있다. 등산은 휴양림에서 시작. 좁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용추폭포도 구경거리. 백민미술관(853-0003):죽산교를 지나 대원사로 향하는 산자락에 위치.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자연광을 이용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응용해 지었다. 보성 출신의 백민 조규일 화백이 자신의 작품과 러시아·북한 등 국내외의 유명 미술품 3백36점을 전시. 입장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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