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회사원인가? 회사원이 맞다면, 회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나? 때 되면 승진하고, 대과(大過)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입사 이래 남보다 뒤처진 적 없이 줄곧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니 ‘나는 회사가 꼭 필요로 하는 인재다?’ 혹시 오산(誤算)은 아닐까? 오산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우수한 인재일 수 있다. 하지만 핵심인재인가? ‘실적이 좋아 인센티브를 받았다’는 사람도 핵심인재는 아닐 수 있다. 뛰어난 실적이 자동으로 당신을 조직의 핵심 그룹으로 인도하는 컨베이어벨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적도 보증수표가 아니라면?’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은 보통 HPI(high potential individual)로 통하는 핵심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HPI는 말 그대로 ‘잠재력이 있는 개인들’을 일찌감치 발굴해 회사의 리더로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삼성과 LG는 1990년대 중반에, 다른 그룹들은 IMF 체제를 통과하며 이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김영기 LG전자 부사장은 “‘21세기의 CEO로 육성하자’는 게 이 제도의 취지”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대리·과장 때 ‘싹수가 보이는’ 인재를 골라 CEO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사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관심 사원’들로서는 CEO로 가는 왕도(王道)인 셈이다. 핵심인재 육성 프로그램은 성과주의에 바탕한 기존의 보상 프로그램과 전혀 다르다. 기존의 성과주의 프로그램이 ‘잘한 사람에게 보상해 주는’ 시스템이라면 핵심인재 육성 프로그램은 ‘잘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다. ‘일 잘해 승진하고, 해외 연수도 가고, 그러다 보면 사장도 될 수 있겠지’ 하는 전통적인 믿음은 절반만 유효하다. 오히려 ‘일 잘할 자질이 엿보이니 교육도 시키고 다양한 경험도 시켜 결국 CEO로 만들자’는 것이 HPI 프로그램의 개념이다. 삼성·LG·CJ 등 핵심인재를 육성하는 회사들은 한결같이 대리나 과장급에서 자질과 성과가 있는 인재를 발굴한다. 지난해 LG는 30여명의 과장급 사원을 미국의 워싱턴대학 MBA 과정에 보냈다. 일단 각 해당 회사에는 우수사원으로 선정돼 해외교육을 받는 것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 인원은 전부 그룹 차원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HPI 자원들이다. 물론 성적도 우수하다. 그러나 해외교육은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들에게 포상격으로 주어지는 연수가 아니다. 회사에서 “장차 CEO로 키울만 한 재목들에게 투자하는 것”이라는 게 한만진 LG전자 상무의 설명이다. 아무리 국내 굴지의 그룹이라 해도 1억원 이상씩 드는 해외 유학을 그냥 보내줄리 만무하다. 회사에 장기적인 계획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CJ도 지난해 MBA 과정에 차장급 3명을 보냈다. 1년간 회사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유학을 간 이 3명의 차장급 재원은 CJ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다. 차장급보다 더 아래인 과장급이나 대리급에서도 HCL(high competent leader) 인력을 선정한다. 이들은 9개월간 CJ의 초급 매니저 과정을 이수하면서 서서히 핵심인력으로 자리잡는다. 다른 회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파격적인 경우 사원까지도 핵심인재로 선발한다. 이렇게 선발된 사람들은 이후 조직으로부터 집중투자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과장 혹은 차장 때 외국에 나가 MBA 과정을 이수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을 경우 핵심인재 1인당 드는 교육비는 3억∼4억원 선이다. 한상무는 “사업은 전투다. 전투에는 이기는 병사가 필요하지 지는 병사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더 많은 투자를 하더라도 비즈니스 전쟁에서 이기는 사람에 집중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각 기업들이 키우는 핵심인력은 전체 인원의 5%를 넘지 못한다. 3%선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핵심인재를 다시 S급·A급·H급으로 나누고 있다. 이중 S급은 10명 안팎이다. 4만8천명에 이르는 삼성전자 임직원과 4백명에 이르는 임원 숫자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극소수다. 1만2천명의 직원들이 몸담고 있는 CJ의 경우 HCL 자원은 1백50명 수준이다. 1%를 약간 넘는 숫자다. LG화학의 경우 4천여명의 사무관리 직원 가운데 1백50여명을 HPI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3%가 약간 넘는 숫자다. 극소수이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혜택도 많다. 일단 교육에서 우선적으로 배려된다. 각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외 MBA 제도는 거의 이들로 채워진다. SK그룹의 한 관계자는 “굳이 이들을 우선적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다 보면 어차피 핵심인재들이 뽑히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도 지난해 50여명의 자원을 MBA 과정에 보냈다. 물론 대부분 HPI 그룹들이다.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 핵심인재들은 지역전문가(대리)나 해외 MBA(과장·차장) 과정을 통해 국제적인 수준의 감각과 안목을 키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핵심 인력들은 SMA(삼성 매니저 아카데미)에서 리더십 교육과 직책 교육을 맡는다. SMA는 부장급 중에서도 선택된 사람들만 받는 교육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장이나 임원에 이르면 핵심인력의 세 분류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CJ는 과장급부터 부장까지 팀을 짜 각종 과업들을 해결하는 일을 통해 교육을 실시한다. 여기에는 HCL 자원과 그 후보군만 포함된다. 각 팀엔 인사·재무·R&D·영업 등 서로 다른 파트의 사람들이 모이고, 팀마다 임원 한 명과 외부 교수 한 명이 조언자로 참가한다. 일상적인 업무와 이 교육을 병행하면서 업무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조직적으로 일하는 능력, 전문적인 식견을 키운다. 당연히 이 교육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과 갈수록 능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투자는 교육뿐만이 아니다. 보직도 배려한다. 장차 CEO 내지는 기업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력관리도 병행한다. SK의 한 관계자는 “예를 들어 재무통의 경우 생산이나 영업쪽을 경험하게 하고, 생산통의 경우 기획쪽에 보내기도 한다. 나중에 CEO가 되면 회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과장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경우도 많다. 승진이 거듭되면서 회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도록 해 자연스럽게 조직원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형성해 간다는 얘기다. 회사 내의 정해진 길 뿐 아니라 이들을 위해 새로운 길도 개척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사업이나 프로젝트의 테스크포스에 이들을 집중 배치하는 경우다. LG전자의 경우 부장급 HPI 자원들은 의무적으로 신사업 개척이라는 과업을 부여받는다.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고 거기서 성공하는 쾌감을 맛보는 것이 리더에겐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는 게 김부사장의 설명이다. 이미 삼성과 LG 등 일부 그룹에서는 HPI 자원들이 그룹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부사장은 “LG그룹의 CEO나 중요 임원들은 다 HPI 자원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의 존재는 그러나 회사 내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HPI나 HCL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다. LG그룹 사옥에서 만난 이 회사 이 모(30) 씨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은 극비로 분류된다. 알려질 경우 조직의 인화(人和)를 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양기 CJ 상무는 “핵심인재로 분류된 사람들에 회사가 더 투자하는 것인데 여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회사가 우리는 제쳐두고 일부에게만 투자한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말했다. 회사 입장에선 초과투자를 하는 셈인데 자칫 자기들 몫을 빼앗아 일부에게 투자한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주장이다. CJ의 경우 일부 인사담당 임원과 CEO를 제외하면 HCL의 존재 자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누가 HCL인지는 물론,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대부분 모른다. HCL 인재도 자신이 당사자인지 아닌지 모른다. 보안이 아주 철저한 편이다. 삼성도 비슷하다. 핵심인재가 누구인지는 본인도 연봉이나 승진 속도 등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CEO와 인사담당자외엔 누가 해당자인지 알 수 없다. SK는 조금 다르다. CEO가 직접 관리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차장급 정도되면 당사자는 자신이 해당자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다. LG는 HPI 프로그램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각 직급별로 HPI 자원을 선정해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김영기 LG전자 부사장은 “LG의 핵심요직(key position)에는 HPI 그룹이 2∼3명씩 포진해 있다”고 말했다. LG는 HPI로 선정되면 해당 부서장이나 팀장이 “회사에서 너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또 상무급 이상부터 자기 사업부의 HPI 인재를 알고 있다. 또 계열사 사장이 모여 분기 1회 인재회의를 통해 HPI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도 하고 있다. 핵심인재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될까? 이들을 선발하는 데 성과(performance)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최근 기업들이 ‘성과주의’를 강조하지만 인재를 뽑는 데 성과라는 기준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일 뿐이다. 안승준 삼성전자 상무는 “성과를 많이 내는 사람은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성과가 꼭 그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더욱이 기업들은 전문가의 길과 경영자의 길을 따로 구분해 운영하고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뛰어난 실력과 성과에 대해 많은 보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마다 경영자 후보군인 HPI를 선정하는 기준은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어느 정도 남들이 인정할 수 있는 성과가 기본이고 리더십·창의력·실행력·도전정신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만진 LG 상무는 “말만 하거나 아이디어만 내놓고 실행을 하지 않으면 가치가 창출되지 않는다. 가치는 실행력이 있을 때 창출된다”고 강조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도 추진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리더십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최양기 CJ 상무는 “남의 공(功)을 가로채거나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사람이 따라야 핵심인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성과와 달리 개인의 자질(competence)은 누가, 어떻게 평가할까?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각 부서의 팀장이나 상사의 평가를 바탕으로 인사팀이 자체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에 CEO나 임원의 의견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핵심인재에 대해선 CEO나 임원이 항상 주시하고 있다. 사실 CEO들의 최대 관심사는 인재다. 일찌기 굽타 맥킨지 회장은 “21세기는 인재확보 전쟁(War for talent)의 시대”라고 설파했다.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영=인재관리’라는 등식이 성립할 만큼 인재에 대한 CEO들의 관심은 높다. LG전자 CU의 구자홍 부회장은 지방출장이나 사업장 방문 등의 행사 공식일정이 끝나면 대개 그곳에 있는 HPI 자원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한다. “얼핏 보기엔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냥 점심이나 먹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순간 톱(Top)이 핵심인력들의 성향이나 자질을 판단한다”고 이 회사의 한 임원은 전했다. 구부회장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대단하다. “스타들에게 지붕이 없는 무대를 만들어 주자”고 할 정도다. 좋은 인재에게는 상한선이 없다는 얘기. 인재에 대해선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천재 1명이 평범한 사람 1만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라고 말할 만큼 핵심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핵심인재 중 S급은 이회장이 직접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한국 최대의 그룹인 삼성의 회장도 그룹 내 최고 엘리트 인력은 직접 관심을 두고 관리한다는 얘기다. 이재현 CJ 회장도 HCL 그룹과는 직급을 가리지 않고 자주 대화를 하며 그룹의 비전과 장래에 관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오너와 CEO들은 인재 육성과 확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도 핵심인재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투자가 정말 가능성(potential)이 큰 인재를 향하고 있는지는 그러나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다국적 인사 컨설팅사인 타워스 패린의 박광서 지사장은 “핵심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발전이지만 자칫 HPI가 패션처럼 될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퍼지고 있는 HPI 현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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