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生 인수한 ‘승부사 김승연’
한화, 재계 5위 급부상 올해는 김승연 회장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해다. 우선 1952년 한국화약을 모태로 창업한 한화그룹이 창업 50돌을 맞았다. 또 최순영 전 대생 회장 측이 벌인 저지 로비를 뿌리치고 대생을 인수함으로써 금융전문 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도 그는 별 말이 없다. 그는 지난 9월 초 출국, 아직 귀국하지 않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2010년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과 한미교류협회 회장·경제통상대사 등 대외활동이 많아 미국과 유럽에 머물고 있다”며 “대생 인수와 관련된 주요 현안들은 매일 보고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그의 장기 출장 배경에 대해 한나라당이 대생 인수 로비 의혹을 폭로, 지금 귀국하면 자칫 이 문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해석은 김회장이 지난 81년 그룹 회장에 오른 후 겪은 우여곡절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92년과 그 이듬해 그는 ‘동생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과의 재산싸움’과 ‘람보별장’ 불법 매입사건에 휘말렸다. 미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소유였던 별장을 4백7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이 한 시민단체에 의해 폭로됐을 땐 5개월 동안 해외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람보별장’ 매입 자금 출처 조사에서 외국은행에 불법으로 계좌를 개설, 1백10만5천 달러를 빼돌린 것이 밝혀져 그해 11월30일 구속됐다. 그는 50여일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구약성경 욥기 8장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에 의지해 견뎠다고 한다. 94년 1월 중순 그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백80만 달러(47억여원)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 재판부는 “김피고인이 중동에서 건설공사를 수주하면서 지급한 커미션을 되돌려받아 이 돈으로 호화별장을 구입한 것은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나, 그가 이를 깊이 뉘우치고 있고 해외사업 확장을 위해 로비용으로 쓴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김회장은 다시 해외로 나가 6개월을 보냈다. 이에 대해 외화 밀반출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자숙의 의미였다고 한화그룹 관계자는 전했다. 이후 그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그룹 회장에 오른 그는 본래 ‘거칠 것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그가 국세청에 신고한 상속세는 70억원으로 최고의 상속세 납부자로 기록됐다. 요즘의 재벌 총수들처럼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비상장 계열사를 통해 우회증여를 하는 등의 편법을 쓰지 않았다. 그룹 회장직 수행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최근 한화그룹이 발간한 50년사를 보면 김회장이 취임한 시기를 제2의 창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1981년 10월 「다이너마이트」지(옛 한화그룹 사보)에 실린 김회장의 취임 일성을 보자. “새 시대에는 확고한 가치관을 지닌 경영철학 위에 새로운 기업상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동안의 좋은 전통은 계속 유지, 발전시키고 과거의 누적된 문제점은 솔직히 노출시켜서 과감하게 시정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 민간기업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신속한 업무처리와 창의성 있는 활동입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조직이 딱딱해지는 것, 즉 관료주의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룹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관료주의화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 점을 고치지 않고서는 새 시대의 새로운 기업으로서 세계 속으로 뻗어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울림이 있다. ‘무서운 젊은 회장’ 김회장은 취임 후 특유의 꼼꼼한 성격으로 경영 전반을 장악해 나갔다. 취임 후 한동안은 사무실에 비치된 임직원 인사카드를 집에까지 들고가 일일이 신상을 파악했다. 한화그룹의 퇴직 임원인 K씨는 “김회장은 어린 나이에 그룹 회장에 올라 안팎의 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다. 자신을 은근히 깔보는 원로경영인들, 회사와 불합리한 관계에 있던 외국 기업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그는 상당한 ‘오기’와 뚝심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美 유니온 오일과의 합작회사인 경인에너지(옛 한화프라자)의 경영권을 장악할 때의 일이다. 경인에너지는 계약상 회사의 경영권을 89년까지 유니온오일 측이 행사하게 돼 있었다. 한화 측으로서는 이 회사에 근무하는 국내 직원들의 인사권까지 유니온오일 측의 사전동의 없이는 행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 회사는 인재들의 유출이 잦았다. 일을 잘해도 미국 사람 밑에서는 중역으로 승진할 기회가 없다고 봤던 것. 김회장은 인사 담당 중역을 불러 경인에너지의 몇몇 부·차장급 간부사원들을 그룹 종합기획실로 전보 발령하라고 지시했다. 선대 회장인 고 김종희 창업주도 넘보지 못했던 경인에너지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유니온오일 측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일로 당시 경인에너지 수석부사장을 맡고 있는 라이슨씨가 그를 찾아와 계약위반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김회장은 “유니온오일이 경인에너지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을사보호조약이나 마찬가지”라고 응수했다. 몸싸움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후 그는 주한미국상공인협회 회원들 사이에 ‘코메리칸 깡패’로 통했다. 그룹 안에서는 ‘무서운 젊은 회장’으로 불렸다. 김회장의 경영철학의 핵심은 ‘혁신’이다. 그는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인 90년대 중반부터 경영혁신을 강조했다. 지난 95년 계열사 사장들로부터 ‘회사 기본 운영계획 및 제3의 개혁’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지금은 변혁기의 상황이다. 국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변혁기이며, 위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가 오히려 발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96년 그룹 창립 44주년 기념사에선 “밥값이나 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업무에 임하는 임원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화그룹 구조조정본부는 “김회장이 이처럼 다소 과격하다 싶은 내용의 발언을 하게 된 것은 그룹 내에 이류의식·패배주의·적당주의·무사안일이 팽배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구조조정과 개혁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과 관행의 문제를 과감히 혁파하지 않고는 앞으로 10년을 버텨내기 힘들다는 것이 김회장의 생각이었다. 위기론이었다. 구조조정의 마술사 김회장은 96년 창립 44주년 기념식에서 “제3의 개혁은 결국 구호나 말로만 떠들어대는 개혁이었고, 실제적인 개혁이 전혀 안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94년부터 2년 동안 추진해 온 제3의 개혁을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한화그룹을 21세기형 사업구조로 조정하기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우선 직급간의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경쟁과 불신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장기 근속자에게 수여하는 메달의 직급별 차등을 없앴고,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기능직 사원들의 급여체계를 개선해 직책간의 벽도 허물었다. 그가 건 드라이브가 먹혀들어간 것은 그 자신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1998년 초 한화에너지는 자금회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원유를 도입할 자금마저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김회장은 그해 2월 은행권에 한화에너지에 대한 협조융자를 신청하면서 계열사 주식과 금융자산 등 사재를 담보로 제공했다. 회장의 집이 은행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은 회사 정상화에 대한 그의 의지에 신뢰를 보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소유주의 사재출연을 요청한 이후 실제로 재벌 회장이 사재를 담보로 기업운영자금을 마련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한화바스프우레탄과 한화NSK정밀·한화GKN·한화종합화학 과산화수소 사업부문 등 비주력 사업뿐 아니라 비교적 수익성이 높고 재무구조가 건실한 계열사까지 매각했다. 97년 말 32개였던 계열사 수는 98년 말 15개로 줄었고, 자산도 12조원에서 7조8천억원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차입금은 8조원선에서 3조6천억원으로 줄어 몸집이 가벼워졌다. 규모가 작아진 반면 알찬 기업으로 거듭난 셈이다. 그는 올해 그룹 창립 50돌을 맞아 세 가지 혁신을 내세웠다. ‘의식의 혁신·조직의 혁신·사업구조의 혁신’이다. 인물평은 엇갈려 김회장에 대한 인물평은 크게 엇갈린다. 그에겐 재벌 총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면이 있다. 지난 98년 10월 故 이성수 전 경향신문 사회부장의 빈소를 찾은 김회장은 8시간 동안 목놓아 통곡했다. 초등학생이던 고인의 장남을 불러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김회장과 이 전 부장, 두 사람은 한화가 경향신문을 경영할 당시 그룹 총수와 노조 지도자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김회장은 98년 12월 말 구조조정 과정에서 희망퇴직 등으로 회사를 떠난 5천여명의 임직원들에게 감사의 연하장을 보내면서 사보 「HANWHA」를 보내도록 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임직원들에 대한 배려였다. 99년 10월 한국시리즈에서 프로야구단 한화 이글스가 우승했을 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그는 급성백혈병으로 입원해 있던 유승안 코치(현재 감독)의 부인 이금복씨의 병실로 방문, 위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회장은 이씨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매우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회사 안에서의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직원들은 그를 위해서라면 불법도 불사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9월 한화그룹 비서실 과장 하모씨는 인천 인송중학교에서 치러진 제4회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 필기시험에 김회장의 주민등록증을 지참하고 김회장의 이름으로 응시했다가 수험표 대조 과정에서 감독관에게 적발됐다. 동력수상레저기구 면허는 모터보트·수상오토바이 등 5마력 이상의 추진기관이 달린 수상레저기구를 타기 위해 필요한 면허. 하씨는 “회장이 수상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 같아 면허를 대신 따주기 위해 비서실에서 보관 중이던 회장 주민등록증을 갖고 시험에 응시했을 뿐 회장의 지시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Klout
Klout
섹션 하이라이트
섹션 하이라이트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 모아보기
- 일간스포츠
- 이데일리
- 마켓in
- 팜이데일리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충청서 압승 거둔 이재명…득표율 88.15%(종합)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어머니, 아버지 저 장가갑니다”…‘결혼’ 김종민 끝내 눈물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충청서 압승 거둔 이재명…득표율 88.15%(종합)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EU있는경제]투자만이 살 길…PE 규제 허물고 반등 노리는 英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동물실험 폐지 명암] 투심 쏠린 토모큐브, 빅파마가 주목하는 까닭①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