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난에 묶인 ‘서민의 발’
경영난에 묶인 ‘서민의 발’
“시내버스는 사양사업” 남은 업체들의 사정을 보자. 2001년 결산 기준 59개 생존 업체들의 부채 총액은 5천4백억원. 업체당 평균 90억원 정도의 부채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들 가운데 자본잠식 상태인 업체 수가 26개로 절반에 가깝다. 8개 업체는 완전 잠식됐고, 18개 업체는 부분 잠식 수준이다. 한 교통 전문가의 지적대로 “시내버스는 사양사업”이 되고 말았다. 시내버스 업계의 어려움은 버스 1대당 수익성에 잘 드러난다. 보통 1대의 시내버스를 굴리는 데 드는 비용은 기름값·인건비·감가상각비 등을 합쳐 하루 40만원 정도. 그러나 현재 운행 중인 서울 지역 시내버스 중 하루 35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노선은 드물다. 노선 9개, 버스 대수 1백91대로 업계 중위권인 서울승합의 경우 가장 승객이 많다는 21번 버스가 하루 41만∼42만원 정도 벌어 본전을 맞추는 정도다. 경영난 때문에 버스 인력들에 대한 처우도 형편없다. 이는 곧바로 난폭 운전 등 서비스 질의 저하로 이어져 승객 감소를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기본급이 제때 나가지 않는 경우는 다반사고, 매년 올린 임금의 인상분은 몇 년치가 밀려 있다. 사정이 나은 업체라고 해도 상여금 지급은 꿈도 못 꿀 처지다. 지난해까지 서울 시내버스 업계 체불 임금은 총 5백억원에 이른다. 임금이 낮은 탓에 숙련된 운전사들은 호시탐탐 빠져 나갈 기회를 노린다. 2002년 6월 말 현재 서울 시내버스 운전사 부족률은 18.6%. 시내버스 광고판에 매달린 버스기사 모집 공고에 눈에 띄게 박혀 있는 ‘초보자 환영’ 문구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시내버스 업계가 아사(餓死) 직전에 이른 원인은 단순하다. 수입원이라고는 버스 요금밖에 없는데 승객 수가 크게 줄어든 것. 요즘은 ‘서민’의 발이라 불리지만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내버스는 온 서울 ‘시민’의 발이었다. 버스업체 수도 계속 불어났고, 업체 사장들은 알짜배기 ‘부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접어들어 대체 교통수단이 늘어나고, 교통 체증 때문에 시내버스의 정시성(定時性)이 떨어지면서 점차 승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됐다. 지하철에 KO敗 특히 비슷한 요금대의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은 시내버스 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 85년 57.5%에 이르던 시내버스 수송분담률은 지난해 27.6%까지 떨어졌다. 반면 85년 15%에 이르던 지하철 수송분담률은 97년 시내버스를 추월했고, 2001년엔 36.5%로 뛰어올라 시내버스를 저만치 앞질러 갔다. 현재 지하철과 버스의 노선이 겹치는 구간은 20.6%. 승객들로서는 같은 요금(6백원)이라면 배차 시간 일정하고 밀리지도 않는 지하철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원가에 훨씬 못 미치는 버스 요금의 지지부진한 인상도 업계로서는 불만이다. 지난 2001년 7월 마지막으로 오른 시내버스 요금은 6백원. 인건비·기름값 등 시내버스 요금 원가 7백∼8백원에 턱없이 모자란다. 당국은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물가상승률 산출의 지표가 되는 공공요금이라 시장 원가를 완전히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 바람에 버스 요금은 계속 억제돼 왔다. 업계는 “지원이 필요할 땐 민간사업이라고 나 몰라라 하고, 요금 문제만 나오면 공익사업이라며 시장 상황을 무시한다”며 당국의 이중잣대를 비난하고 있다. 박석득 서울버스운송조합 기획차장은 “백화점 물건값 몇 천원씩 오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버스요금은 몇 십원만 올라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일본이 2천원대, 유럽이 3천원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버스요금이 비싼 편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서울시는 지난 3월 고건 전 시장 재임시 올 3·4분기 중 버스요금 인상을 약속했었다. 당시 버스 노사가 임금 인상 문제로 대치하자 나온 중재안이었다. 그러나 지난 7월 이명박 시장이 취임하면서 시는 “서민 가계 현실을 고려해 올해는 버스 요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시의 용역 결과 1백10원가량의 요금 인상 요인이 있는 것으로 나오긴 했지만, 먼저 서비스 개선을 하지 않으면 요금을 올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내버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계속 속아만 와서 이제 시에서 무슨 약속을 해도 믿지 않게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보조금 입찰제 도입해야 꼬이고 꼬인 ‘서민의 발’을 풀 방법은 없을까? 관련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대부분 “묘안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서울시가 완전히 이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부터 서울시는 노후 차량 교체에 싼 이자의 자금을 지원하고, 교통카드 요금할인에 따른 손실분을 보전해 주는 한편, 유류 가격 인상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업체들의 차고지 부담을 낮춰주기 위해 은평·강동·송파 등에 공영차고지를 조성했다. 문제는 이렇게 지급된 시내버스 재정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사상 처음 지급된 지난해 시내버스 보조금은 2백60억원 정도. 지하철 1㎞ 구간 공사에 투입된 비용이 1천억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다. 이 때문에 버스업계 관계자들은 지하철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적자서자(嫡子庶子)’론을 제기하고 있다. 구체적인 지원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안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현재 568번 한 개 노선에 대해 실시하고 있는 보조금 입찰제가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즉 비수익 노선에 대해 지원금을 지급하되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사업자들 중 입찰을 통해 가장 적합한 이를 선정해 선별적으로 지원하자는 것이다. 황상규 교통개발연구원 실장은 “이 같은 입찰제 지원 방식이 한정된 재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연구원의 이상민 책임연구원도 “노선 입찰제가 업체들의 경영 혁신과 서비스 향상 노력을 부추길 수 있다”며 도입을 촉구했다. 노선을 공영화해 한 개의 노선을 여러 업체가 돌아가면서 운행하는 공동배차제 실시도 고려되고 있다. 실제로 대구·대전·광주 등 일부 지방 광역 도시에서는 공동배차제 이후 각 업체의 수익금이 평준화되면서 도산 도미노가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업계와 연구기관 모두 지역 특성상 서울에서의 공동배차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운행 범위가 너무 넓은데다 일부 수익노선을 보유한 업체들이 이를 공유하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서비스 질을 낮출 우려도 있다. “교통세 없애라” 업계는 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재원 지정을 기대하고 있다. 보조금 입찰제나 공동배차제처럼 아직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제도들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기보다 당장 도움이 되는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박석득 버스운송조합 차장은 “공익사업인 만큼 농기계나 연안여객선과 같은 교통세 면제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내버스 한 대당 교통세 부담이 연간 1천만원”이라며 “이것만 없어져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쉬운 당국의 역할 “이 버스 아마 거저 주고 운영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강동 공영차고지에서 만난 한 버스기사의 말은 비즈니스로서의 매력을 잃은 시내버스 사업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줬다. 돈이 되면 뛰어드는 대기업들이 외면한 몇 안 되는 사업이라는 점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시내버스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서민의 발’로서 버스에 대한 수요가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영제를 고수하건 부분 공영제로 가건 이렇다 할 지원 없이 시내버스 업계에 자립 노력만을 촉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계속 방치했다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공공서비스를 지켜내는 것. 그게 시장에서 국가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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