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10억을 모은 사람들 (4)]…“양조장 머슴 생활 잊은 적 없어요”
- [10억을 모은 사람들 (4)]…“양조장 머슴 생활 잊은 적 없어요”
Don’t forget your past (과거를 잊지 말자) 1967년은 유원장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5남2녀 중 4남인 유원장이 전북 진안에서 양조장 겸 인삼 밭을 하던 먼 친척 집으로 머슴살이를 떠나던 해이기도 하다. 매일 시장으로 술을 나르고, 돼지 똥을 치우고… 그 속에서도 학구열만은 식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이듬해 인근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없었다. 주인집에서는 먹여줄 뿐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생이 됐지만 학비는 밀리고, 머슴살이와 학업의 병행은 지옥 같았다. 온 몸에 술 냄새와 돼지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얻어 먹는 게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돼지 우리에 영어단어를 걸어놓고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덕분에 성적은 좋아 선생님에게서 5·16 장학금 대상자로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신청 요건인 ‘등록금 납부 영수증’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선생님이 한밤 중에 양조장으로 쳐들어 왔다. “어린 애를 머슴살이 시키면서 품삯 한번, 학비 한번 안대 주는 파렴치한들!” 유 원장은 그나마 머슴살이도 끝이구나, 싶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단다. 그 후 구박은 더 심해졌지만 체면 때문인지, 밀렸던 두 학기 학비를 내줬고 그 영수증으로 5·16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중학교 3년을 마쳤다.그 4년의 머슴살이 상징이 액자 속의 청바지다. 주인 아저씨가 입다가 유원장에게 준, 말하자면 머슴 유니폼이다. 그는 술에 삭고 찢어진 그 바지를 철사 줄로 얽어서 입고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 고된 4년을 청바지에 담아 들고 양조장을 떠났다. 대전으로 진출한 그는 계란 배달과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가면서 고교 시험준비를 했다. 보문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 할 수 없이 후기인 대성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생활이 문제였다. 독서실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해가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 구두를 닦고 친구들의 머리를 깍아 차비와 책값을 벌었다.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기도 했다. 모처럼 잡은 가정교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유원장은 돈을 쪼개 중학교 학원까지 다녔다. 잘 가르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기초가 생긴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더부살이를 했던 독서실은 학원을 겸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칠판도 닦아주고 교실 청소도 해 주며 친해진 학원강사가 대구에 일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입 원서를 살 돈조차 없어 방황하던 유원장은 그 강사를 쫓아 대구로 내려간다. 대구의 학원에서 우연히 대타로 강의를 하게 된 유원장은 영어강사로서 재능을 발휘한다.그걸 계기로 학원강사의 길로 들어서 인기를 얻었다. 군대(방위)를 마치고 다시 학원강사를 하던 그는 대구 최대 학원에 스카우트 된다. 77, 78년 당시 그의 월 수입이 1백만원 정도였으니 고수입자였던 셈이다. 그 학원의 원장을 하던 모씨는 강사비의 3분의2를 무조건 저축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며 ‘원천징수’ 해 갔다. 고졸자라는 ‘약점’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던 유원장은 뭐든 시키는대로 했다. 결국, 이 돈도 떼 먹히는 바람에 그의 수년간 고생은 물거품이 됐다. 수입의 3분의 2는 무조건 저축했다 78년 그는 서울 경동시장 앞에 있던 대우학원에 스카우트된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냉혹했다. 그 해 3월 새벽 6시10분 그의 서울 첫 강의 수강생은 달랑 1명이었다. 그는 그 수강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꼭 나와야 한다. 학생이 안 나오면 나는 쓰레기통이라도 올려 놓고 강의를 할 거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단 1초도 지각한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강사 생활을 했다. 덕분에 점차 명성을 얻었고 월 평균 2백∼3백만원씩 벌어들였다. 알뜰히 돈을 모은 그는 79년 33평형 잠실 진주아파트를 3천4백만원에 사들이고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곧 이어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는 ‘대일학원’에 스카우트 되기에 이르렀다. 일류 강사의 총 집결지였던 대일학원에는 명문대 출신 강사들이 수두룩했다. 거기서 ‘고졸자’로 버텨내기란 정말 힘겨웠다. 수강생들에게 인정 받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루 8번 바쁜 강의 일정 중에서도 유명강사의 강의를 빼 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장점은 꼼꼼히 적었다가 자기 강의에 반영했다. ‘벤치마킹’이었던 셈이다. ‘유홍렬’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유머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문기본영어 강의를 맡았던 그는 커다란 종이 차트에 책 내용을 일일이 다 배껴 썼다. 다른 강사들이 한 문장씩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할 시간에 그는 맨 뒤에 앉은 학생까지 다 보일 수 있도록 그 차트를 걸어놓고 설명했다. ‘효율적인 강의 방식’을 고안한 것이다. 때로는 명문대 영문학 석박사들을 불러다 개인 교습을 받아가며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에 대일학원에 온 뒤 1년여 만에 그는 수강생 1등을 차지한다. 한달에 수강생 4천2백명 기록을 올린 적도 있었다. 잘 나가던 유원장은 80년 과외금지령으로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재수생만으로는 학원강사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85년 대일학원 강사를 하면서 압구정동에 사무실을 빌려 재수생 학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날로 높아 가는 임대료와 걸핏하면 들이닥치는 세무사찰에 시달렸다. 고민 끝에 이민 가 있는 미국 처가로 아내와 아이들을 보냈다. 혼자 남은 유원장은 방송통신대를 다녀가며 강사생활을 계속했다.88년 그는 서울역 학원 밀집 지역에 82평짜리 땅을 1억2천6백만원에 사들였다. 부업으로 독서실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건축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판단착오로 목욕탕까지 지으면서 건축비가 올라가고 준공 시점도 지연돼 4억5천만원이나 빚을 지게 됐다. 그 사이 압구정동 임대 건물의 보증금은 매년 25%씩 인상돼 월 1천만원을 월세로 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그는 ‘내 건물’ 마련에 나선다. 97년 8월 그는 매물로 나온 신사동 지금의 학원건물을 16억2천만원에 매입했다. 서울역 독서실과 목욕탕은 4억5천만원에 팔아 빚을 청산했다. 살던 집을 팔고, 그 동안 모은 돈을 싹싹 긁은 뒤 총 9억원의 신규 대출을 보태 지금의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3개월 만에 IMF가 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고 대출 금리는 치솟았지만 짠돌이 생활로 버텨냈다. 덕분에 현재 시가 25억짜리 건물을 지킬 수 있었다.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는 13년째 특수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특례입학 대상자들의 국내 대학입학을 돕는 일이다. 사실 학원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임대료 정도에 불과하다. “학원을 접고 임대료로 편히 살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구 소련지역과 스리랑카 등 동남아 오지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분들의 최대 고민이 자녀교육이거든요.” 현재 그의 제1 목표는 빚 청산이다. 몇 년전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친척의 간청으로 외제차를 한대 구입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닐 때가 훨씬 더 많다. 양조장 머슴시절 약속대로 술은 입에도 안 댄다. 빚을 빼고도 20억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그지만 “늘 IMF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집에 갖춰 놓은 편집기로 비디오 촬영 작품을 만드는 것. 은퇴한 뒤에는 아내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비디오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다. 그 꿈의 맨 밑바닥에는 ‘청바지’가 있다. 그 청바지는 유원장의 표현대로 “고난이자 동시에 성공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유원장 ‘10억원 모으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논현동 빌딩 구입이었다. 16억2천만원에 사서 현재 시가가 25억원에 달하니 8억8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셈이다. 97년 빌딩을 살 때 까지만 해도 유원장의 재산은 7억원 정도였다. 독서실 겸 목욕탕 투자는 몇 년간 갚았던 이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나머지는 ‘소처럼’ 일해서 모은 재산이었다. 잠실 진주 아파트 매입은 재테크의 절호의 기회였지만 동생 사업자금으로 조기에 팔아버린 뒤 10배나 올라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다. 사실 유원장의 최대 자산은 ‘최악의 환경을 성공의 밑거름을 삼을 만한’ 성실과 노력이다. 머슴살이하던 소년이 서울에서 손꼽히는 명강사로 성공한 비결을 유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남들보다 모자라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했죠. 다른 강사들이 ‘내가 최고’라고 자만할 때 저는 연구하고 배웠습니다. 대일학원에 간 뒤 5년여 동안 한번도 강사실 소파에 앉아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오히려 재테크를 몰라 손해 본 부분도 많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 아예 은행에 맡기기 시작했다. 99년부터 유원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신한은행 PB센터 고준석 부동산재테크 팀장은 “연리 10.6%짜리 비싼 대출을 금리 7%짜리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연간 1천7백50만원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대출금리보다 싼 이자를 받으며 붓고 있던 적금을 깬 뒤 자산구조를 대출 갚는데 주력하는 구조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유운규 원장의 재산 형성 과정 1973년 고교 졸업. 첫 영어강의 경험. 77년 대구 최대 학원 영어강사로 스카우트 78년 서울 대우학원 스카우트. 79년 서울 최고의 학원으로 꼽히던 대일학원 스카우트. 월 4천명 이상의 수강생을 끌 어 모으는 최고 인기 강사로 부상. 잠실 진주아파트 33평형 3천4백만원에 매입. 80년 7.30 과외 금지조치로 학원 수입 급감. 82년 동생 사업자금 위해 잠실 진주 아파트 매각. 83년 결혼과 함께 후암동 18평형 동자 아파트를 1천2백만원에 매입. 85년 압구정동에 학원 개설. 88년 서울역 앞 82평짜리 대지를 1억2천6백만원에 매입. 독서실겸 목욕탕 운영. 건축 과정에서 4억5천만원의 빚을 지게 됨. 91년 대학 특례 입학자 대입학원인 KOSEI&신대일학원 시작. 97년 서울역 앞 독서실 겸 목욕탕 4억5천만원에 매각. 신사동 4거리 부근에 지하2층 지상 6층짜리 건물 16억2천만원에 매입. 학원 이전. 2003년 2월 現 논현동 건물 시가 25억원.(부채 9억원) 미국 버지니아주 볼티모어 자택 시가 25만 달러(약 3억원). 정기예금 3억원 순자산 22억원 (문의 : 신한은행 프라이빗뱅킹 강남센터 02-3011-5500, 서울파이낸스센터 02-3783-0700)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Klout
Klout
섹션 하이라이트
섹션 하이라이트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 모아보기
- 일간스포츠
- 이데일리
- 마켓in
- 팜이데일리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CAPEX 힘주는 하나제약, 바닥 보이는 현금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이데일리
이데일리
팜이데일리
‘이혼숙려캠프’ 故강지용 부인 “억측 자제 부탁”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르포]SKT 유심 교체 대란… "앱 접속 안 돼, 매장에서 기다리는 게 낫다"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3분만에 완판된 일본 신칸센 토큰증권…비결은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K바이오 최대규모 6.5조 기술수출 뉴로바이오젠...판매 로열티 등 의문 투성이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