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은 씨가 마르고, 장외주식은 외면하고”
“어음은 씨가 마르고, 장외주식은 외면하고”
대기업 어음 2∼3년 전의 4분의1 사채시장의 불황은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어음물량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31일 만난 한 사채업자는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몰리는 월말인데도 오전 내내 어음 한 장밖에 할인하지 못했다. 어음이 씨가 말랐다”고 말한다. 통상 사채시장에 나오는 어음은 물품을 제공한 대가로 받는 진성어음(물품대금어음)이 주류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어음을 장기적으로 없애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기업구매자금 카드를 사용하면서 어음물량이 급속히 줄었다.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음할인 업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2∼3년 전보다 4분의1가량으로 어음물량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들의 물량이 사라지자 중견기업들과 코스닥 기업들의 어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안정성이 높은 A급 어음들의 할인금리는 월 0.5∼0.6%선. 경남기업, 경향건설, 경동보일러 등의 어음이 A급으로 분류된다. 이들 기업의 어음은 과거에는 B급으로 분류됐던 것들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의 SK글로벌 사태도 사채시장에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SK글로벌의 할인금리는 월 1.5%가 넘는다. 보통 3개월 단위로 투자하는 어음할인의 특성상 고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은 SK글로벌과 같은 회사의 어음도 사는 게 과거 모습이었지만 고수익에도 입질을 하는 투자자는 없다. 한 사채업자는 “지난 3월말께 9백20만원짜리 SK글로벌 어음이 나왔는데 전주들이 아무도 매입하려 하지 않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물량은 적고 시장이 불안하다보니 어음 간의 차별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A급 어음으로 간주되는 경동도시가스, 고려아연 등의 어음은 월 0.5% 수준이지만, 코스닥 등록기업들의 어음은 매입자를 만나지 못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은 주로 A급 어음만을 찾고 있다. 한치호 부장은 “좋은 회사 어음은 무조건 사가지만 안 좋은 회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차별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어음할인 시장과 함께 사채시장의 다른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대출 시장도 혹독한 불황을 맞고 있다. 사채시장의 대출상품에는 전세자금 등 부동산담보 대출, 소액급전 대출, 주금납입 등이 있다. 이 중 부동산담보 대출은 제도권 금융기관이 흡수한 지 오래고, 소액급전 대출은 IMF 이후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금업체들이 자금력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했다. 따라서 현재 사채시장 1번지 명동에서 소액급전 대출사업을 하는 사채업자들은 거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주금납입이다. 법인등록시 주금이 납입됐다는 은행 잔고, 즉 주금납입 증명서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돈을 빌려주는 하루짜리 대출상품이 주금납입니다. 주금납입 시장도 찬바람이 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30일 명동의 큰손으로 가장 많은 주금납입 대출을 했던 반재봉씨가 구속되면서 주금납입 시장도 크게 위축됐다.검찰이 반씨를 구속하자 사채업자들이 몸을 움추려 1억원당 20만∼30만원 하던 수수료가 50만원으로 올랐다. 주금납입을 하는 한 사채업자는 “반씨가 구속된 이후 주금납입을 꺼리는 분위기다. 업자들이 대출을 꺼리면 당연히 수수료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지금은 최소 50만원 이상을 주지 않으면 주금납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사채시장의 주력 상품인 어음할인 시장과 대출시장이 어렵다보니 망하는 사채업소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저금리 기조가 정착된 지난해부터 사채업소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되고 있다. 50억∼1백억원의 자금을 갖고 어음을 매입, 수수료를 떼고 이를 투자자들에게 되파는 사채업소들은 0.1% 이상 수수료를 챙겨야 사채업소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0.1%의 마진율을 챙기기도 어렵다는 게 사채업자들의 얘기다. 한 어음할인 업자는 “물량도 물량이지만 마진이 너무 없다. A급 어음을 월 0.5%로 할인해주어도 손에 떨어지는 수수료는 0.1%가 안 된다. 과거에는 월 1%는 수수료로 챙길 수 있었지만 오래 거래한 전주(錢主)들에겐 거의 마진 없이 어음을 넘기는 때도 있다”고 말한다. 최근 직원 3명을 내보낸 한 사채업자도 “여러 명의 직원들이 있는 대형 업소와 달리 중소형 업소들은 직원들 2∼3명을 데리고 일을 한다. 0.1% 수수료 받아 사무실 임대료 내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나뿐만 아니라 구조조정에 들어간 업소들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빈 사무실도 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로 입주를 못해 난리였던 대표적인 사채 빌딩인 서울 명동의 신원빌딩, 유네스코빌딩, 계양빌딩 등은 계약금만 있으면 언제든지 입주할 수 있는 상황이다. 명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는 “2년 전만 해도 사무실을 얻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아직 보증금은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 계속되면 보증금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장외주식도 주도주 없어 업소들 울상 IMF 이후 코스닥 열풍을 타고 급성장했던 장외주식도 전혀 매수세가 없다. 시장을 이끄는 주도주도 없고 거래량도 미미하다. 장외주식 정보제공업체인 38커뮤니케이션의 강성수 운영팀장은 “지난해 연말 대비 거래량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한다. 코스닥 거품이 걷힌 뒤 장외주식 업소들을 먹여살렸던 주식은 강원랜드였다. 코스닥 등록 때까지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던 강원랜드 주식매매로 장외업소들은 짭짤한 수입을 올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주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장외시장에서 우량주로 꼽히는 삼성생명, 삼성카드, 삼성캐피탈 등 삼성 계열 주식들도 반 토막이 난 상황이다. 고가주인 삼성생명 주식도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졌던 30만원선이 무너져 지금은 20만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한 장외주식 거래업자는 “주식을 찾는 사람도 없고 파는 사람도 없다. 주식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장외주식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하루빨리 경기가 좋아져 주식시장이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최근 명동을 떠난 한 장외주식 업자는 “주식에 물려 있는 업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시장이 좋을 때는 먼저 주식을 사놓고 매수자를 찾아 주식을 팔았지만 지금은 매도자와 매수자가 둘 다 나서지 않으면 아예 중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세 차익은 필요 없이 수수료만 챙기는 영업만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매기가 있는 종목은 로또복권 운영회사인 코리아로터리서비스다. 로또 열풍을 타고 2만8천원에서 3만1천원 사이의 박스권에서 움직이고 있다. 사채시장은 그 어떤 시장보다 경기에 민감하다. 경기가 나빠지는 것만큼 사채시장에 크게 작용하는 악재는 없다. 사채전문가인 오남영 이원컨설팅 대표는 “사채시장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수익성이 과거보다 훨씬 떨어진 상태”라며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망하는 사채업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사채시장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지 자못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에클스턴 전 F1 회장 내놓은 69대 경주차 매물 ‘8866억 원’ 추산
2세계 전기차 업계 한파 매섭다…잇단 공장 폐쇄·직원 감축
3'삼성동 집 경매' 정준하..."24% 지연손해금 상식적으로 말 안 돼"
4‘연구원 3명 사망’ 현대차 울산공장·남양연구소 11시간 압수수색
57조 대어 LG CNS, 상장 예심 통과…“내년 초 상장 목표”
6윤 대통령 “백종원 같은 민간 상권기획자 1000명 육성할 것”
7삼성전자, 반도체 위기론 커지더니…핫 하다는 ETF 시장서도 외면
8롯데 뒤흔든 ‘위기설 지라시’…작성·유포자 잡힐까
9박서진, 병역 면제 논란…우울·수면 장애에 가정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