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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와 공룡

바퀴벌레와 공룡

이길재 농수산홈쇼핑 회장
얼마 전 지인 몇 사람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됐다. 한 친구가 추천한 음식점이었는데, 허름하긴 하지만 제법 맛있는 집이어서 모두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식사가 끝날 무렵에 어디선가 튀어나온 바퀴벌레 한 마리였다. 그 바퀴벌레 때문에 음식점에 대한 점수는 절반 이상 깎이고 말았다. “허허, 바퀴가 얼마나 훌륭한 놈인데!” 그 어수선한 와중에, 누군가의 “바퀴벌레는 훌륭하다”는 말에 좌중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생물학자인 K박사였다. 평소 귀에 솔깃한 말을 잘하는 분이어서 그랬겠지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구의 정복자는 사람이 아냐, 바퀴벌레야.” 그의 ‘바퀴 예찬’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바퀴벌레는 3억∼4억년 전 고생대 석탄기 때부터 번성해 온 ‘미물’인데, 이 미물은 지금까지도 4천종 이상 서식하고 있는 일종의 화석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곤충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이겠지만, 그들은 농반 진반으로 “지구의 정복자는 인간이 아닌 곤충, 그 중에서도 바퀴벌레”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K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퀴 예찬론을 끝맺음했다. “바퀴벌레는 설사 핵폭탄이 터져 인류를 포함한 다른 종이 멸종한 뒤에도 지구 최후의 생존자가 돼 ‘잘 먹고 잘 살 것’이야.” 생물학자들의 바퀴를 상대로 한 장난스런 실험, 예컨대 굶기고 공기를 밀폐시켜 숨을 못 쉬게 해도 끄떡없이 살아남더라는 등의 얘기, 심지어 그놈들은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의 손톱 발톱까지 먹으며 살아남더라는 얘기는 사족에 불과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자 사업가 L씨가 나서 “어디 바퀴벌레 따위를 지구의 정복자로 말할 수 있냐,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놈은 공룡”이라는 공룡 예찬을 시작했다. 그의 공룡 예찬은 좀 상투적이고 싱거워서 한줄로 요약하겠는데, 요컨대 ‘크고 거대한 것이 아름답다‘는 주장이었다. 바퀴 예찬론에 이미 경도돼 있던 친구들은 공룡 예찬론자의 말에 별 호응을 보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바퀴 예찬론자 K박사는 공룡 멸종설 가운데 흥미로운 것들을 몇 개 설명하는 것으로 공룡 예찬론자 L씨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는데 그 가운데는 ‘공룡은 덩치가 커서 멸종했다’는 내용도 있다고 설명해 줬다. 바퀴벌레와 공룡으로 시작된 화제는 이래저래 발전해 마침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화두로 옮겨갔다. 잘 알려진 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경제학자 E. F. 슈마허(1911∼1978)가 저술한 책 제목이기도 한데, 슈마허는 거대 기술 대신 이른바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처음 주창한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이른바 선진공업국이 주도해 온 거대한 ‘공룡 테크놀로지’를 개발도상국에 적용하면 허다한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에 인류는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슈마허에 대한 화제는 자연스레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공룡기업’ ‘거대기업’ ‘문어발 기업’의 모순과 폐해로 이어졌다. 또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작은 정부’ ‘작은 기업’ 등에 대한 얘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것 같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한 친구는 요즘 떠오르는 대안 경제이론 가운데 ‘불교 경제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도의 경제학’ ‘중간기술 개발 경제학’이며 ‘인간의 얼굴을 가진 기술문명‘을 제창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사업가 L씨와 같은 차를 동승하게 됐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요즘 사업이 잘돼 대규모로 확장하려는 욕심이 막 꿈틀거리던 차였다. 아닌 말로 나라고 재벌 총수가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는 그런 욕심이었다. 그런데 오늘 친구들의 말을 듣고 보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카톨릭 신자인 나는 그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얘기를 해주며 성경 속의 그 얘기가 우화 같기는 하지만 모종의 어떤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해줬고,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재 농수산홈쇼핑 회장 1940년 광주 生 광주농고·전남대 수의학과 卒 66∼84년 카톨릭농민회 창설, 전국회장 92∼2000년 14·15대 국회의원 98년 민족화해협력범민족협의회 공동의장 2000년∼現 농수산포럼 대표 2001년∼現 농수산홈쇼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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