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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분의 1’속에 담긴 신세계

‘10억분의 1’속에 담긴 신세계

나노테크놀러지가 반도체 ·가전제품 ·화장품 등에 활용되고 있다. 나노기술의 응용 영역은 무한하다. ‘복주머니’ 나노기술을 들여다보면….
"원자 수준에서 보고 작업할 수 있다면 화학과 생물학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 기기는 결국 개발될 것입니다.” 1959년 12월 말. 리처드 파인만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강연했다. 미국 물리학회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그는 소형화의 미래를 처음 제시했다.

당시 청중들은 원자를 관찰하고 제어하는 기술을 몽상으로 여겼다. 81년 주사전자현미경(STM)이 발명됐다. IBM은 90년 35개의 원자를 하나씩 금속 표면에 배열해 IBM이란 글자를 썼다. ‘몽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6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파인만은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는 제목의 이날 강연으로 ‘나노기술의 아버지’로 기억된다.

파인만은 같은 강연에서 더 놀라운 그림을 제시한다. “세포는 아주 작지만 걸어다니고 요동치며 매우 작은 규모로 온갖 신기한 일을 합니다. 정보를 저장하기도 하죠. 우리도 원하는 것을 그렇게 작은 규모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놀라운 그림도 하나 둘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1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보다 정교한 나노 단위의 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나노는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나노라는 말은 난쟁이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 ‘나노스(nanos)’에서 비롯됐다.

1나노미터는 수소 원자 10개를 나란히 늘어놓은 길이다. 일반적인 박테리아(세균)의 크기는 1,000나노미터다.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과 비교해보자. 핀 머리의 폭에는 1나노미터 크기 입자가 100만개 들어간다. 나노테크놀러지는 1~100나노미터 영역에서 원자나 분자를 조작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특성과 기능을 갖는 재료나 구조를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성급한 이들은 “머지 않아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혈관을 항해하며 질병을 치료하는 로봇이 나온다”고 말한다. 수백나노미터 크기의 기계(나노봇)가 우리 몸 안의 혈관 속에서 피돌기를 조절하고 당뇨병 환자에게는 인슐린을 조절해 공급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은 요원한 얘기다. 전문가들은 나노테크놀러지가 성공하려면 허황된 나노봇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모든 나노테크놀러지가 환상은 아니다. 나노기술은 소재 ·반도체 ·의학 ·화장품 ·태양전지 ·우주항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속속 상업화의 문턱을 넘고 있다. 나노기술은 각 분야에서 서로 성과를 주고받으며 고도화되고 있다. 물리·화학·공학·의학·약학 등이 ‘나노’라는 초점에 모이면서 공동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IBM은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헤드에 나노기술을 접목해 연간 80억달러 규모의 헤드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IBM은 헤드에 자기저항이 강한 GMR 소재를 나노 두께로 입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빽빽하게 저장된 정보를 잘 읽어들이도록 했다. 97년 GMR헤드가 개발된 이후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의 기록밀도는 연평균 100% 높아졌다. 엑슨모빌은 메탄올을 가솔린으로 분해하는 공정에 1나노미터 이하인 제올라이트 입자를 촉매로 쓴다.




반도체, 나노기술 첨병… 삼성전자가 선두

컴퓨터는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집채만 했다. 이제는 손바닥만한 크기로 작아졌다. 회로선폭을 줄이는 집적기술 덕분이다. 집적기술은 회로선폭을 줄여 이전보다 더 많은 소자를 칩에 넣을 수 있도록 한다. 집적회로는 58년 발명됐고, 집적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는 65년 이같은 추세를 ‘반도체 칩의 정보 기억량은 약 18개월 단위로 2배씩 증가한다’고 정리했다.

회로선폭을 줄이는 데에는 고진공기술 ·이온빔기술·플라즈마 증착기술 ·포토 리소그라피 등이 이용됐다. 반도체산업에서 나노기술은 0.1마이크로미터, 즉 100나노미터 이하의 회로선폭으로 설계하고 제조하는 것을 말한다. 지름 100나노미터의 전선은 머리카락의 약 1,000분의 1 정도 굵기이고, 실리콘 원자 약 500개 정도에 해당한다.

기존 기술 가운데 포토 리소그라피는 현재 마이크로 수준의 집적회로에 활용되고 있다. 포토 리소그라피는 그러나 100나노미터 이하로 가공하도록 정밀하기 어렵다. 포토 리소그라피 기술은 사진을 인화하듯이 자외선을 쬐어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의 패턴을 그리는 것이다. 이 때 이용되는 자외선의 파장이 약 250나노미터나 된다. 포토 리소그라피로 나노 수준의 집적회로를 만드는 것은 마치 굵기가 1㎜인 펜으로 그보다 가는 글씨를 쓰겠다는 것과 같다. 이런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서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넘더라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반도체업체들은 더 나은 나노구조 제작기술을 찾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파장이 0.1∼10나노미터인 X-선이나 파장이 10∼70나노미터인 극자외선을 이용하는 방식은 기존 기술의 연장선 상에서 개발되고 있다. 전자빔 리소그라피는 고분자 박막 위해 전자빔을 이용해 회로패턴을 새기는 방법이다. 장비가 매우 비싸고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게 단점이다.

반도체업체들은 광선 대신 인쇄와 주조 등 기계적인 회로 가공 방법도 실험중이다.
삼성전자는 나노기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세계 처음으로 90나노미터급 반도체 제품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고, 현재 70나노급 기술을 확보했다. 삼성전자는 화성 제12생산라인을 오는 7월부터 가동해 90나노급 메모리반도체를 양산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 안에 70나노급 반도체도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인텔은 오는 6월 90나노기술을 적용한 중앙처리장치(CPU)를 양산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상용화된 기술은 모두 하향식이다. 크기를 줄이는 방식이다. 연구자들은 반대로 원자나 분자 단위에서 시작해 나노 구조물을 쌓아올리는 상향식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상향식은 2∼10나노미터 크기의 구조물을 쉽게 만들 수 있고 비용도 매우 저렴하다. 상향식 가운데는 탄소나노튜브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10가닥 이상 꼬아 합성하면 반도체처럼 전기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을 갖는다. 탄소나노튜브는 굵기가 1나노미터에 불과하다. 연구자들은 이를 활용하면 실리콘보다 1만배가량 집적도가 높은 소자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화장품 가루, 고울수록 예뻐져요

물질의 입자를 이전보다 10분의 1로 줄이면 같은 양일 때 표면적은 100배로 늘어난다. 화장품이 살갗에 스며드는 양과 흡수 속도는 입자가 피부에 접촉하는 면적에 비례한다. 따라서 직경이 100나노미터인 입자를 포함한 화장품은 입자가 1마이크로미터인 제품에 비해 100배 정도의 효과를 낸다. 자외선 차단물질도 마찬가지. 자외선을 산란하는 이산화티타늄이나 산화아연 등을 200나노미터 이하 수준으로 가공해 피부에 바르면 자외선차단 효과가 2배 이상 높아진다.

화장품업체는 나노기술로 노화방지 ·주름개선 ·자외선차단 등 제품을 개발하고 피부에 잘 흡수되도록 가공한다. 아무리 효능이 우수한 생리활성물질이라도 액체에 녹은 상태가 아니면 피부에 흡수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주름개선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약용식물에서 추출해 정제한 성분은 용해도가 매우 낮은 탓에 화장품에 적용되지 못했다.

나노기술은 이런 물질의 구조를 바꿔 유기용매에 잘 녹는 입자를 얻을 수 있게 한다.
태평양은 고농축 식물성분을 식물성 나노 입자에 담은 ‘아이오페’ 스킨케어 제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이어 손상된 모발을 보호하는 ‘헤어팩 나노테라피’샴푸를 내놓았다. 태평양은 “헤어팩 나노테라피는 식물성 오일과 각종 비타민을 나노 수준의 작은 입자에 탑재해 두피와 모발에 잘 흡수된다”고 설명한다. 헤어팩 나노테라피는 일반적인 제품에 비해 1.7배 정도 더 흡수된다는 것.

태평양기술연구원의 한상훈 나노텍연구팀장은 나노기술을 색조화장품에도 도입하기 위한 연구를 벌이고 있다. 색조화장품 연구는 나비 날개에서 힌트를 얻었다. 나비 날개는 나노 수준의 규칙적인 격자형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는 빛의 산란각을 다양하게 해 색상을 화려하게 표현한다. 한 팀장은 “미세한 입자에 나노 수준의 구멍을 규칙적으로 내고 적당한 금속으로 표면처리하면 색상 표현력이 커진다”고 설명한다.
나노기술은 화장품의 생리활성물질이 서서히 나와 피부로 스며들어, 안전성을 높이고 효과를 오래 내는 쪽으로도 응용되고 있다.




나노실버 항균효능 가전 등에서 인기

은(銀)은 항균과 탈취 기능이 있다. 같은 양의 은을 입자를 작게 만들면 접촉 면적이 넓어지므로 항균·탈취효과가 강화된다. 은이 지닌 기능을 극대화하려면 입자를 나노 단위로 가공하면 된다. 대우일렉트로닉스는 2월 나노실버 기술을 적용한 냉장고와 에어컨 신제품을 내놓았다.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제품의 주요 부위에 미세한 은 입자를 첨가해 항균 항곰팡이 탈취 기능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양문형 냉장고 ‘나노실버 클라쎄’는 문을 냉장고 몸체에 밀착하는 개스켓과 냉장고 서랍, 냉기공급 통로 등에 나노실버를 적용했다. 나노실버 클라쎄는 함유된 은이 내뿜는 친건강 이온으로 일반 냉장고에 비해 항균 효능이 월등할 뿐 아니라 음식물을 신선하게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설명했다. ‘수피아 에어컨 O2’는 습기가 많은 곳에 미세한 은 입자를 함유해 세균이나 곰팡이가 번식하지 못하도록 했다.

은 이온은 세균보다 훨씬 작아, 세균막을 뚫고 들어가 세균을 죽게 만든다. 나노실버란 화학적인 처리와 전기분해를 통해 나노미터 단위의 크기로 얻어낸 은 이온 입자를 말한다. 은 이온 입자가 서로 달라붙어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각을 수지로 씌운다. 이 기술은 나노 폴리(고분자) 테크놀러지라고 불린다.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은 입자를 국내 벤처기업인 트리코유니온에게서 공급받아 해당 부품을 사출할 때 섞어넣었다.

이 방식은 표면에 코팅하는 것보다 실용적이라고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설명한다. 은 이온을 코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진다는 것이다. 나노실버는 젖병에도 응용됐다. 보령메디앙스는 나노실버젖병을 판매하고 있다. 이 젖병은 10나노미터 크기의 은 입자를 고분자로 ‘보늬’를 씌운 뒤 기존 소재와 섞어 만든 제품을 만들었다. 보령메디앙스의 은 입자도 트리코유니온이 공급하고 있다. 트리코유니온은 나노 단위의 은 입자 하나하나를 수지와 같은 고분자로 씌우는 기술을 개발했다.



‘나노분말’ 신공법 개발한 엔피씨

금 나노분말을 알코올에 담그면 연보라색을,은은 녹차색을 띤다.

엔피씨는 자그마한 회사다. 엔피씨는 ‘아주 작은’ 것을 만든다. 나노분말이다. 이 회사는 금속을 반응로에 넣고 6만도 이상의 고온을 가해 기체 상태로 바꾼 뒤, 급랭시켜 나노분말을 만든다. 반응로 온도는 고주파를 이용해 높인다. 기술적으로는 13.56MHz의 고주파를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다른 업체들의 4MHz 반응로보다 에너지 효율과 나노분말 회수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김영남(43) 사장은 “나노분말은 쓰임새가 아주 다양하다”고 설명한다. 금 나노분말은 비누 ·로션·화장품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은 나노분말은 항균 기능이 있어 섬유나 도료·플라스틱 등에 응용된다. 철은 해양오염 방제에, 구리합금 나노분말은 전자파 차폐 등에 활용 가능하다.

은 나노분말은 다른 업체도 만들지 않나? 김 사장은 “기존 방식으로 은 나노분말을 만들면 분말끼리 서로 달라붙는 문제가 있다”고 대답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은 입자 각각을 수지나 계면활성제로 둘러싸는데, 그렇게 하면 은 나노분말의 특성이 줄어든다고 그는 설명한다.

엔피씨는 지난해 1월 설립됐다. 연구인력 10명을 포함해 전 임직원은 18명에 불과하다. 김 사장은 성균관대 물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사 교관과 청주대 강사 등을 지냈다. 91년 이후 기업체에서 나노분말을 연구했다. 엔피씨는 금속별로 나노분말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보다는 반응로를 기업에 공급하는 쪽으로 사업방향을 잡았다.
기술적인 우수성이 꼭 사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엔피씨가 다른 기업의 구미를 당기기 위해서는 현재 10억원이 넘는 반응로 가격을 낮춰야 한다. 또 다른 기업이 나노분말을 제품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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