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세인의 두 아들 어떻게 사살됐나
See How They Ran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팀 오브라이언은 유명한 단편 소설 ‘그들이 가져간 것들’(The Things They Carried)을 통해 군인이 전쟁터에 가져가는 물건들을 보면 그 군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에는 베트남에 파견돼 논을 헤쳐나가는 미군 소대가 등장한다. 그들이 전쟁터에 가져간 물품 가운데는 고국에서 온 연애편지, 수류탄과 지뢰,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장식물, 살충제, 미군 내부용 신문, 손톱깎기, 대마초, 붕대, 심리전용 전단, 그리고 선탠로션이 포함돼 있었다. 오브라이언은 “부상자와 몸이 허약한 동료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소설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가 전투에 가져간 것은 무엇일까. 지난 7월 22일 한바탕 치열한 포위공격이 벌어진 뒤 미군은 그의 시신 근처에서 서류가방을 발견했다. 뉴스위크 취재에 따르면 그 가방 안에는 진통제, 향수병 여러 개, 비아그라, 포장을 뜯지 않은 남자 속옷 여러 벌, 와이셔츠 여러 벌, 실크 넥타이 한개, 그리고 콘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우다이와 그의 동생 쿠사이는 그 외에도 거액의 현금과,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성용 지갑 두개도 갖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면서 최후의 저항을 하기보다는 디스코장에 가서 광란의 마지막 밤을 보내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는 물품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들은 ‘가치 높은 표적’ 2호와 3호로 분류돼온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을 사살한 것을 환영했다(표적 1호는 그들의 부친인 후세인이다). 이번 일로 마침내 이라크의 옛 정권이 완전히 사라졌고 후세인과 그의 자식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새 질서에 대한 저항은 소용 없다는 사실을 이라크인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망함으로써 거의 매일 미군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게릴라전이 중단될 수 있을까? 한 쿠르드족 정보 관리는 “우다이와 쿠사이는 게릴라들에 대해 실질적인 명령권과 통제권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또 어느 전직 이라크 공보부 관리는 후세인에게 충성하는 지지자 약 3만5천명이 ‘검은 여단’ 또는 ‘보복군’ 등의 이름으로 저항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정보 관리들은 이라크의 게릴라들이 중앙에서 통제되는 조직으로 구성돼 있는지 아니면 오합지졸의 부랑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어느 경우든 저항세력은 무자비함과 고문의 무시무시한 상징이었던 우다이와 쿠사이 두 사람의 시신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함으로써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들의 사망 소식에 처음에는 거리에서 환영의 총성이 울렸다. AK47 소총의 붉은색 예광탄들이 바그다드의 하늘을 수놓았다.
그러나 많은 이라크인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들이 정말 죽었을까? 몇몇 이라크인들은 후세인과 쿠사이가 자신들을 빼닮은 사람을 내세우는 것으로 잘 알려졌지 않았느냐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미국인들은 분명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미군이 처음 공개한 사진에는 수염이 텁수룩한 피투성이 남자의 시신이 찍혀 있었다. 시체 공시소에는 그런 시신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미국 관리들은 다음날 기자들을 불러다가 바그다드 국제공항 육·공군 시체 공시소의 들것 위에 있는 우다이와 쿠사이의 시신을 비디오로 녹화하게 했다. 이번에는 말끔하게 면도시키고 상처난 부분을 꿰맨 뒤 밀랍처리한 시신들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에 난 총알구멍은 그대로였다.
이라크 국민 가운데 일부는 그 사진을 보고도 우다이와 쿠사이의 죽음을 믿지 못하며 아마 앞으로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죽으면 신속히 수의를 입혀 매장하는 이슬람교의 관습을 미국인들이 무시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라크인들이 격분했다. 우다이와 쿠사이의 시신은 가족이 나타나 인수할 때까지 냉장 보관될 것이다.
결국 잊혀지지 않는 괴기한 인물 2명의 공포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다이는 둘 중에서 좀더 괴기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이라크 유명인사들의 여자 친구들을 성폭행하고는 그들의 몸에 ‘U’라는 알파벳을 새겨넣는 악취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우다이를 올림픽 위원회 본부에 고문실을 갖춘 세계 유일의 위원장으로 기억한다.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은 자갈 채취장에서 질질 끌려 다닌 뒤 상처가 곪도록 폐수에 던져졌다.
후세인은 차남 쿠사이를 더 아꼈다. 쿠사이는 눈에는 덜 띄었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잔혹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등 우다이 못지 않게 사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범들의 발부터 나무 절단기에 집어넣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가 지루함을 느끼면 정치범들을 나무 절단기에 머리부터 넣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쿠사이는 후세인의 경호부대를 지휘했다. 우다이는 부랑자들로 구성된 페다인 민병대를 운영했다. 이라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두려워했다.
뉴스위크가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쿠사이와 우다이는 최후의 나날을 비참하게 보냈다. 물론 그들이 게릴라전을 계획하고 자금을 댔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도망가서 숨는데만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때 충성 세력에 둘러싸였던 그들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경호원은 단 1명뿐이었다.
우다이는 늘 추종자들을 겁주고 협박했다. 그러나 이라크전 동안 미군의 맹습으로 권력이 약화되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우다이의 올림픽 위원회에서 경호 책임을 맡았던 아메드(가명)는 지난 3월 미군이 침공한 직후 우다이의 호출을 받았던 일을 돌이켰다. 당시 우다이는 겁을 집어 먹어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부하들에게(일부는 바로 직전 해고를 당한 상태였다) “많은 경호원이 필요하다”면서 그들에게 전쟁 기간 중 옆에 머물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여러분들은 이제 복직됐다. 이제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간청했다. 부하들 중 대다수는 넌더리가 나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떠났다.
우다이도 용기 있는 통솔자의 역할을 해보려고 했다. 그는 페다인 부대를 위한 스포츠레저차량(SUV)을 구입하려고 심복 경호원 아디브 샤반을 요르단에 보냈다. 샤반이 곧장 돌아오지 않자 우다이는 그를 찾기 위해 더 많은 경호원들을 보내며 샤반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들의 가족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또 그는 샤반의 가족을 감금했다. 샤반은 마침내 요르단에서 돌아왔고 결국 그도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SUV를 갖고 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다이는 경호원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겁주기 위해 그중 17명을 처형했으며, 탈출시에 대비해 개조한 쓰레기차에 보석을 실어두었으며, 자신의 수많은 호화 승용차를 이슬람교 묘지에서 불태울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 9일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고 있을 때 우다이는 어머니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직후부터 그의 자취는 사라졌다.
미군에서도 태스크 포스 20으로 알려진 비밀 부대는 3개월 이상 우다이와 동생 쿠사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 후세인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태스크 포스 20의 핵심에는 전투 응용그룹(델타 작전 파견대)과 해군 특전 개발그룹(Seal팀 6)이 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그럴 듯한 단서를 찾아 뒤쫓았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7월 22일 오전 10시쯤 태스크 포스 20의 요원 약 20명이 이라크의 북부 국경 가까이에 있는 모술의 한 호화 맨션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대문을 두들겼고 그 맨션의 소유자인 나와프 알-자이단(46)이 문을 열었다.
집 주인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짜여진 각본에 따른 연극이었을 것이다. 나와프가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출입 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웃에 따르면 그는 후세인 통치 동안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엔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에 따른 석유와 농산물 수출입 계약을 후세인 일가로부터 따냈다. 그는 후세인 일가와의 연줄을 자랑스러워 했다. 이웃인 무클리스 다히르 알-지부리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후세인 일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집안 여러곳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이 확실시되자 나와프의 충성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을 도살자이자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후세인이 미군에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후세인 일가와 찍은 사진을 집안에서 떼어냈고 재빨리 쿠르드 민병대의 깃발을 찾아 집밖에 내걸었다. 그는 지난 5월 약탈이 수그러들고 쿠르드족이 모술에서 철수할 때까지 쿠르드족의 옷을 입었다.
한동안 모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약 한달 전 어느 날 그는 뜰에서 담배를 피우고 펩시 콜라를 마시며 친구 무클리스에게 후세인 일가가 집에 찾아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무클리스는 “관례대로 할 것이다. 하루 이틀 또는 사흘 정도는 집에 머무르게 했다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무클리스에 따르면 나와프는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전직 관리중 누구라도 찾아오면 난 목숨을 바쳐 그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대화가 있고 난 뒤 이웃들은 나와프의 집 주위에 낯선 방문객들이 보이고, 돈이 없다고 불평하던 그가 새로 뽑은 BMW 시리즈 5를 타고 다니는 것을 알았다. 7월 1일께 나와프는 뜰에서의 손님 접대를 중단했다.
그는 약간 불안해 하고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웃들에게 여성 친척이 자기 집을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 방문객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무클리스는 그가 비싼 시가 한박스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무클리스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와프는 시가가 아니라 일반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었다. 7월 22일 아침 6시 30분 나와프는 가족들을 식당으로 데려갔다. 7시 30분쯤 그는 아들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0시에 미군 특수부대팀이 그의 대문을 두드렸다. 미군은 나와프와 그의 아들을 급히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뒤 한 군인이 확성기를 들고 쿠사이와 우다이에게 투항을 권했다. 그 다음 총격전이 시작됐다.
미군 특공대원들은 집안에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서 AK47 소총 공격을 받았다. 대원 3명이 집안에서 부상했고 집밖에서 한명이 총상을 입자 미군은 퇴각했다. 이때 작전권은 101공수사단의 제2전투여단(‘타격여단’)의 여단장인 조 앤더슨 대령에게 넘어갔다. 앤더슨은 순조로운 진입을 위해 그 집을 초토화하기로 결정했다. 세 방향에서 약 2백명의 미군이 50구경 기관총과 수류탄을 집안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키오와 무장헬기가 공중을 날며 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오쯤 미군은 다시 집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AK47 소총 공격이 계속되자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앤더슨은 포격이 좀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기관총과 로켓포로 집중 사격을 가했다. 오후 1시 20분 마침내 미군이 집안으로 진입했다. 쿠사이와 우다이, 그리고 경호원 1명이 화장실에서 총탄과 포탄 파편에 온몸이 벌집처럼 돼 죽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AK47소총으로 저항하던 쿠사이의 10대 아들 무스타파는 침대 아래 누운 상태로 숨져 있었다. 방탄 창문 같은 정교한 방호 장치가 돼 있다는 이야기는 허위로 판명됐다. 우다이와 쿠사이는 벽과 방문 앞에 매트리스와 침대틀을 쌓아두었다. 우다이가 자살했다는 소문도 군의관들에 따르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투가 끝난 뒤 나와프의 이웃인 무클리스가 상황을 알아보러 집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와프가 아들 샬란과 함께 미군 험비 차량에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클리스는 “왜 자네 집이 포격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나와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와 쿠사이가 내 집에서 23일이나 머물렀다. 그들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내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나와프는 얼마 후 미군이 징발한 모술의 최고급 호텔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목격됐다.
이웃들은 곧 나와프가 우다이와 쿠사이를 팔아넘겼다고 짐작했다. 미군과 정보당국은 그런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나와프는 3천만달러의 상금(후세인의 두 아들 목에 각각 1천5백만달러씩 걸렸었다)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군은 이번 습격으로 그 상금을 지불하고도 남는 돈을 압수했다. 쿠사이와 우다이는 이라크 디나르화와 미화로 약 1억달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영국군 특공대장 같은 몇몇 사람들은 왜 미군이 최루탄 등을 사용해 우다이와 쿠사이를 집밖으로 나오게 해 생포한 다음 전쟁범죄자로 재판받게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했다.
반면 미군 간부들은 두 아들이 생포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생포됐다고 해도 후세인의 행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은 결국 언론의 구경거리로 변해 더 많은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미군 관리들은 말했다. 지난주 쿠사이와 우다이가 죽고 나자 게릴라 공격이 약간 더 심해졌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더 많은 제보자들이 나오고 있으며 25일의 기습 공격에서 후세인의 경호원 가운데 6명이 4만5천개의 다이너마이트 봉을 갖고 있다 체포됐다고 밝혔다. 미군은 후세인의 목에 걸린 2천5백만달러의 상금을 누군가 타내려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인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기만 하다. 미군은 후세인 색출에 전력을 기울이며 아직 그가 모술 지역 어디엔가 있다고 믿고 있다. 후세인이 바그다드에서 마지막으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군이 진주하던 4월 8일이었다. 한 비디오 테이프에는 전투로 연기가 도시를 뒤덮고 있는 와중에 알 아담 사원 부근에 세워진 승용차 보닛 위에 올라서서 지지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아들 쿠사이를 닮은 남자도 곁에 있었다).
4월 9일 미군이 그 사원에 포격을 가했을 때 행인 가운데 한 사람이던 셰이크 나시르 압둘 라자크 무하마드 살레는 후세인과 그 일행 몇몇이 검정색과 흰색 벤츠 차량 두대에 나눠타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뉴스위크는 나중에 그 행인을 인터뷰했다).
그는 차량들이 큰길에서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 뒤 후세인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후세인이 유니폼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행은 다시 차에 올라타 20번 도로에서 북쪽을 향했다. 20번 도로는 바그다드를 벗어나면 고속도로가 되고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들이 최후를 맞은 모술로 이어진다.
그들이 탄 차량이 바그다드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흰색 벤츠의 뒷 창문이 열리면서 후세인이 자신의 부츠를 내던졌다. 셰이크 나시르는 그 부츠를 주워들었다. 후세인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 형도 포함돼 있다는 그는 이제 잔혹한 시대가 영원히 끝나기를 바라며 그것을 그 시대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With COLIN SOLOWAY in Mosul,
SCOTT JOHNSON in Baghdad and
MARK HOSENBALL in Washington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 팀 오브라이언은 유명한 단편 소설 ‘그들이 가져간 것들’(The Things They Carried)을 통해 군인이 전쟁터에 가져가는 물건들을 보면 그 군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에는 베트남에 파견돼 논을 헤쳐나가는 미군 소대가 등장한다. 그들이 전쟁터에 가져간 물품 가운데는 고국에서 온 연애편지, 수류탄과 지뢰,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장식물, 살충제, 미군 내부용 신문, 손톱깎기, 대마초, 붕대, 심리전용 전단, 그리고 선탠로션이 포함돼 있었다. 오브라이언은 “부상자와 몸이 허약한 동료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소설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가 전투에 가져간 것은 무엇일까. 지난 7월 22일 한바탕 치열한 포위공격이 벌어진 뒤 미군은 그의 시신 근처에서 서류가방을 발견했다. 뉴스위크 취재에 따르면 그 가방 안에는 진통제, 향수병 여러 개, 비아그라, 포장을 뜯지 않은 남자 속옷 여러 벌, 와이셔츠 여러 벌, 실크 넥타이 한개, 그리고 콘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우다이와 그의 동생 쿠사이는 그 외에도 거액의 현금과,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성용 지갑 두개도 갖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면서 최후의 저항을 하기보다는 디스코장에 가서 광란의 마지막 밤을 보내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는 물품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들은 ‘가치 높은 표적’ 2호와 3호로 분류돼온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을 사살한 것을 환영했다(표적 1호는 그들의 부친인 후세인이다). 이번 일로 마침내 이라크의 옛 정권이 완전히 사라졌고 후세인과 그의 자식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새 질서에 대한 저항은 소용 없다는 사실을 이라크인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망함으로써 거의 매일 미군 사상자를 내고 있는 게릴라전이 중단될 수 있을까? 한 쿠르드족 정보 관리는 “우다이와 쿠사이는 게릴라들에 대해 실질적인 명령권과 통제권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또 어느 전직 이라크 공보부 관리는 후세인에게 충성하는 지지자 약 3만5천명이 ‘검은 여단’ 또는 ‘보복군’ 등의 이름으로 저항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정보 관리들은 이라크의 게릴라들이 중앙에서 통제되는 조직으로 구성돼 있는지 아니면 오합지졸의 부랑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어느 경우든 저항세력은 무자비함과 고문의 무시무시한 상징이었던 우다이와 쿠사이 두 사람의 시신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함으로써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들의 사망 소식에 처음에는 거리에서 환영의 총성이 울렸다. AK47 소총의 붉은색 예광탄들이 바그다드의 하늘을 수놓았다.
그러나 많은 이라크인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들이 정말 죽었을까? 몇몇 이라크인들은 후세인과 쿠사이가 자신들을 빼닮은 사람을 내세우는 것으로 잘 알려졌지 않았느냐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미국인들은 분명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미군이 처음 공개한 사진에는 수염이 텁수룩한 피투성이 남자의 시신이 찍혀 있었다. 시체 공시소에는 그런 시신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미국 관리들은 다음날 기자들을 불러다가 바그다드 국제공항 육·공군 시체 공시소의 들것 위에 있는 우다이와 쿠사이의 시신을 비디오로 녹화하게 했다. 이번에는 말끔하게 면도시키고 상처난 부분을 꿰맨 뒤 밀랍처리한 시신들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에 난 총알구멍은 그대로였다.
이라크 국민 가운데 일부는 그 사진을 보고도 우다이와 쿠사이의 죽음을 믿지 못하며 아마 앞으로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죽으면 신속히 수의를 입혀 매장하는 이슬람교의 관습을 미국인들이 무시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라크인들이 격분했다. 우다이와 쿠사이의 시신은 가족이 나타나 인수할 때까지 냉장 보관될 것이다.
결국 잊혀지지 않는 괴기한 인물 2명의 공포 통치가 막을 내렸다. 우다이는 둘 중에서 좀더 괴기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이라크 유명인사들의 여자 친구들을 성폭행하고는 그들의 몸에 ‘U’라는 알파벳을 새겨넣는 악취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우다이를 올림픽 위원회 본부에 고문실을 갖춘 세계 유일의 위원장으로 기억한다.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은 자갈 채취장에서 질질 끌려 다닌 뒤 상처가 곪도록 폐수에 던져졌다.
후세인은 차남 쿠사이를 더 아꼈다. 쿠사이는 눈에는 덜 띄었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잔혹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등 우다이 못지 않게 사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범들의 발부터 나무 절단기에 집어넣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가 지루함을 느끼면 정치범들을 나무 절단기에 머리부터 넣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쿠사이는 후세인의 경호부대를 지휘했다. 우다이는 부랑자들로 구성된 페다인 민병대를 운영했다. 이라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두려워했다.
뉴스위크가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쿠사이와 우다이는 최후의 나날을 비참하게 보냈다. 물론 그들이 게릴라전을 계획하고 자금을 댔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도망가서 숨는데만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때 충성 세력에 둘러싸였던 그들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경호원은 단 1명뿐이었다.
우다이는 늘 추종자들을 겁주고 협박했다. 그러나 이라크전 동안 미군의 맹습으로 권력이 약화되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우다이의 올림픽 위원회에서 경호 책임을 맡았던 아메드(가명)는 지난 3월 미군이 침공한 직후 우다이의 호출을 받았던 일을 돌이켰다. 당시 우다이는 겁을 집어 먹어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부하들에게(일부는 바로 직전 해고를 당한 상태였다) “많은 경호원이 필요하다”면서 그들에게 전쟁 기간 중 옆에 머물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여러분들은 이제 복직됐다. 이제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간청했다. 부하들 중 대다수는 넌더리가 나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떠났다.
우다이도 용기 있는 통솔자의 역할을 해보려고 했다. 그는 페다인 부대를 위한 스포츠레저차량(SUV)을 구입하려고 심복 경호원 아디브 샤반을 요르단에 보냈다. 샤반이 곧장 돌아오지 않자 우다이는 그를 찾기 위해 더 많은 경호원들을 보내며 샤반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그들의 가족들을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또 그는 샤반의 가족을 감금했다. 샤반은 마침내 요르단에서 돌아왔고 결국 그도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SUV를 갖고 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다이는 경호원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겁주기 위해 그중 17명을 처형했으며, 탈출시에 대비해 개조한 쓰레기차에 보석을 실어두었으며, 자신의 수많은 호화 승용차를 이슬람교 묘지에서 불태울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 9일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고 있을 때 우다이는 어머니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직후부터 그의 자취는 사라졌다.
미군에서도 태스크 포스 20으로 알려진 비밀 부대는 3개월 이상 우다이와 동생 쿠사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 후세인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태스크 포스 20의 핵심에는 전투 응용그룹(델타 작전 파견대)과 해군 특전 개발그룹(Seal팀 6)이 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그럴 듯한 단서를 찾아 뒤쫓았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7월 22일 오전 10시쯤 태스크 포스 20의 요원 약 20명이 이라크의 북부 국경 가까이에 있는 모술의 한 호화 맨션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대문을 두들겼고 그 맨션의 소유자인 나와프 알-자이단(46)이 문을 열었다.
집 주인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것은 짜여진 각본에 따른 연극이었을 것이다. 나와프가 큰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출입 사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웃에 따르면 그는 후세인 통치 동안 정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엔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에 따른 석유와 농산물 수출입 계약을 후세인 일가로부터 따냈다. 그는 후세인 일가와의 연줄을 자랑스러워 했다. 이웃인 무클리스 다히르 알-지부리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후세인 일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집안 여러곳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이 확실시되자 나와프의 충성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을 도살자이자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후세인이 미군에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후세인 일가와 찍은 사진을 집안에서 떼어냈고 재빨리 쿠르드 민병대의 깃발을 찾아 집밖에 내걸었다. 그는 지난 5월 약탈이 수그러들고 쿠르드족이 모술에서 철수할 때까지 쿠르드족의 옷을 입었다.
한동안 모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약 한달 전 어느 날 그는 뜰에서 담배를 피우고 펩시 콜라를 마시며 친구 무클리스에게 후세인 일가가 집에 찾아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무클리스는 “관례대로 할 것이다. 하루 이틀 또는 사흘 정도는 집에 머무르게 했다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무클리스에 따르면 나와프는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전직 관리중 누구라도 찾아오면 난 목숨을 바쳐 그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대화가 있고 난 뒤 이웃들은 나와프의 집 주위에 낯선 방문객들이 보이고, 돈이 없다고 불평하던 그가 새로 뽑은 BMW 시리즈 5를 타고 다니는 것을 알았다. 7월 1일께 나와프는 뜰에서의 손님 접대를 중단했다.
그는 약간 불안해 하고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웃들에게 여성 친척이 자기 집을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 방문객은 허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무클리스는 그가 비싼 시가 한박스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무클리스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와프는 시가가 아니라 일반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었다. 7월 22일 아침 6시 30분 나와프는 가족들을 식당으로 데려갔다. 7시 30분쯤 그는 아들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0시에 미군 특수부대팀이 그의 대문을 두드렸다. 미군은 나와프와 그의 아들을 급히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뒤 한 군인이 확성기를 들고 쿠사이와 우다이에게 투항을 권했다. 그 다음 총격전이 시작됐다.
미군 특공대원들은 집안에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서 AK47 소총 공격을 받았다. 대원 3명이 집안에서 부상했고 집밖에서 한명이 총상을 입자 미군은 퇴각했다. 이때 작전권은 101공수사단의 제2전투여단(‘타격여단’)의 여단장인 조 앤더슨 대령에게 넘어갔다. 앤더슨은 순조로운 진입을 위해 그 집을 초토화하기로 결정했다. 세 방향에서 약 2백명의 미군이 50구경 기관총과 수류탄을 집안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키오와 무장헬기가 공중을 날며 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오쯤 미군은 다시 집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AK47 소총 공격이 계속되자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앤더슨은 포격이 좀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기관총과 로켓포로 집중 사격을 가했다. 오후 1시 20분 마침내 미군이 집안으로 진입했다. 쿠사이와 우다이, 그리고 경호원 1명이 화장실에서 총탄과 포탄 파편에 온몸이 벌집처럼 돼 죽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AK47소총으로 저항하던 쿠사이의 10대 아들 무스타파는 침대 아래 누운 상태로 숨져 있었다. 방탄 창문 같은 정교한 방호 장치가 돼 있다는 이야기는 허위로 판명됐다. 우다이와 쿠사이는 벽과 방문 앞에 매트리스와 침대틀을 쌓아두었다. 우다이가 자살했다는 소문도 군의관들에 따르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투가 끝난 뒤 나와프의 이웃인 무클리스가 상황을 알아보러 집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와프가 아들 샬란과 함께 미군 험비 차량에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클리스는 “왜 자네 집이 포격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나와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와 쿠사이가 내 집에서 23일이나 머물렀다. 그들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내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나와프는 얼마 후 미군이 징발한 모술의 최고급 호텔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목격됐다.
이웃들은 곧 나와프가 우다이와 쿠사이를 팔아넘겼다고 짐작했다. 미군과 정보당국은 그런 짐작을 확인해주었다. 나와프는 3천만달러의 상금(후세인의 두 아들 목에 각각 1천5백만달러씩 걸렸었다)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군은 이번 습격으로 그 상금을 지불하고도 남는 돈을 압수했다. 쿠사이와 우다이는 이라크 디나르화와 미화로 약 1억달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영국군 특공대장 같은 몇몇 사람들은 왜 미군이 최루탄 등을 사용해 우다이와 쿠사이를 집밖으로 나오게 해 생포한 다음 전쟁범죄자로 재판받게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했다.
반면 미군 간부들은 두 아들이 생포되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생포됐다고 해도 후세인의 행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은 결국 언론의 구경거리로 변해 더 많은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미군 관리들은 말했다. 지난주 쿠사이와 우다이가 죽고 나자 게릴라 공격이 약간 더 심해졌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더 많은 제보자들이 나오고 있으며 25일의 기습 공격에서 후세인의 경호원 가운데 6명이 4만5천개의 다이너마이트 봉을 갖고 있다 체포됐다고 밝혔다. 미군은 후세인의 목에 걸린 2천5백만달러의 상금을 누군가 타내려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인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기만 하다. 미군은 후세인 색출에 전력을 기울이며 아직 그가 모술 지역 어디엔가 있다고 믿고 있다. 후세인이 바그다드에서 마지막으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군이 진주하던 4월 8일이었다. 한 비디오 테이프에는 전투로 연기가 도시를 뒤덮고 있는 와중에 알 아담 사원 부근에 세워진 승용차 보닛 위에 올라서서 지지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아들 쿠사이를 닮은 남자도 곁에 있었다).
4월 9일 미군이 그 사원에 포격을 가했을 때 행인 가운데 한 사람이던 셰이크 나시르 압둘 라자크 무하마드 살레는 후세인과 그 일행 몇몇이 검정색과 흰색 벤츠 차량 두대에 나눠타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뉴스위크는 나중에 그 행인을 인터뷰했다).
그는 차량들이 큰길에서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 뒤 후세인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후세인이 유니폼을 벗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행은 다시 차에 올라타 20번 도로에서 북쪽을 향했다. 20번 도로는 바그다드를 벗어나면 고속도로가 되고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들이 최후를 맞은 모술로 이어진다.
그들이 탄 차량이 바그다드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흰색 벤츠의 뒷 창문이 열리면서 후세인이 자신의 부츠를 내던졌다. 셰이크 나시르는 그 부츠를 주워들었다. 후세인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 형도 포함돼 있다는 그는 이제 잔혹한 시대가 영원히 끝나기를 바라며 그것을 그 시대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With COLIN SOLOWAY in Mosul,
SCOTT JOHNSON in Baghdad and
MARK HOSENBALL in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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