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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G와 에이스, 법정서 격돌

AIG와 에이스, 법정서 격돌

오른팔처럼 여기던 부하와 아들까지 경쟁사 에이스로 옮기면서 배신감을 느낀 보험사 AIG의 그린버그 회장이 요즘 반격의 칼날을 갈고 있다.
세계적인 보험사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AIG)의 모리스 그린버그(Maurice Greenberg · 78)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 과거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브라이언 듀퍼롤트(Brian Duperreault · 56)다. 듀퍼롤트는 그린버그 밑에서 21년 동안 근무하며 해외사업을 이끌어오다 지난 1994년 경쟁사 에이스(Ace)의 회장 겸 CEO로 자리를 옮겼다.

듀퍼롤트는 그 뒤 AIG의 핵심 임원 6명도 빼내갔다. 그 중에서 그린버그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일은 2001년 11월 그의 아들 에반 그린버그(Evan Greenberg · 46)까지 고용한 것이다. 한때 그린버그의 후계자로 인식됐던 에반은 지금 에이스의 사장이다. 몇 년 전 그린버그는 애널리스트들을 위한 브리핑 자리에서 에이스가 “반창고 이름이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에이스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에이스는 미국에서 초고속 성장하며 AIG 자리를 넘보는 경쟁사다. 에이스의 순 보험료 수입은 지난해 27% 증가해 81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손해보험 업계의 평균 증가율 14%를 훨씬 웃돈 수치다.

그린버그는 8년 전 제기한 복잡한 소송으로 복수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른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AIG는 에이스와 에이스의 전신(前身)이 보험계약 수천 건을 계열사 노스 아메리카 보험(INA)에서 센추리 인뎀너티(Century Indemnity)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석면 소송에 따른 보험금 수십억 달러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당시 센추리는 자금도 부족한 소규모 보험사였다. AIG는 에이스의 행위를 ‘야바위’라고 비난했다.

의혹을 더 부채질하는 부분은 지난 99년 에이스가 시그나(Cigna) 보험으로부터 INA와 다른 자산들을 인수하면서 20억 달러 상당의 자산이 INA 계약에 포함된 다른 업체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당국의 서류에서 드러났다. 따라서 센추리가 파산할 경우 보험 가입자들은 20억 달러를 날리게 된다. 그렇게 될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그린버그는 센추리가 파산할 경우 석면 관련 보험금을 INA 측이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주의 보험 가입자들이 INA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잊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법원이 그린버그의 손을 들어줄 경우 다른 주에 있는 센추리 보험 가입자들도 제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에이스는 책임이 없다며 센추리가 파산해도 석면 보험 가입자들에게 보상해줄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다.
AIG는 그린버그의 제소가 악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가입자들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AIG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계열사들이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된다면 결국 지주회사 격인 대형 보험사가 메워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AIG는 에이스의 INA 인수 훨씬 전부터 이런 원칙을 위해 싸워 왔다고 강조했다.

그린버그는 에이스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시점에서 에이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센추리에 대한 석면 피해 관련 보험금 청구가 증가하자 에이스는 지난해 12월 준비금으로 22억 달러를 늘려야 했다. 그 결과 예비비 가운데 무려 90%를 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에이스가 다른 보험사에 빌려준 돈이 지난 3년 사이 60%나 증가해 140억 달러를 기록했다. 에이스 유형자산의 3.5배에 해당하는 액수다. AIG는 0.5배에 불과하다. 따라서 채무를 상환받지 못할 경우 발생할 파장에 대한 우려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AIG와 에이스의 분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95년이다. 당시 시그나 소유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소재 보험사 INA는 주 당국에 새로운 회사 설립 인가를 요청했다. INA에 부담이 되고 있는 엄청난 액수의 석면 · 환경피해에 대한 보험금 청구를 법적으로 INA와 독립된 신생기업으로 떠넘기겠다는 생각이었다. 골치 아픈 부분을 잘라내면 신용등급이 올라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린버그는 INA의 계획을 둘러싸고 당국에 항의했지만 결국 분사가 허용됐다. 그린버그는 문제를 펜실베이니아주 대법원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99년 7월 주 대법원은 당국의 조처가 “적법했다”고 판결했다. 재미 있는 사실은 대법원이 당시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던 INA 보험 가입자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퇴짜를 맞은 그린버그는 99년 후반 무대를 캘리포니아주로 옮겼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어떤 기업이든 자사에 피해가 없어도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제소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AIG는 보험 가입자들의 동의 없이 INA가 특정 사업부를 분사시킨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2000년 5월 그린버그는 또 패소했다. 샌프란시스코 법원은 AIG 측이 제소할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보험 가입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손해는 “추측에 기인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2001년 7월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샌프란시스코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항소법원은 INA 측이 분사 당시 보험 가입자들에게 발송한 공지서가 “어떤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며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많은 데다 나아가 ‘사기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원심 파기 이유를 밝혔다. 상당히 강한 어조였다. 올 3월 AIG는 센추리가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될 경우 INA가 1차적으로 부담하도록 해달라는 약식판결까지 법원에 요청했다. 요청서에는 INA의 분사 공지와 관련된 당혹스러운 e메일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고객에게 발송하는 공지서에서 단어 선정시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최종 발송된 공지서를 보면 앞으로 센추리가 보험금 청구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하게 된다는 말 대신 “처리하고”,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에이스는 이에 대해 보험 가입자들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으며 오해라고 해명했다. 에이스는 더 나아가 어떤 경우에도 이런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주체가 보험 가입자들이어야지 AIG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에이스는 AIG의 제소 이면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비난했다. INA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에이스는 AIG가 그토록 보호하고자 한다는 보험 가입자들을 이로써 ‘궁지에 몰아넣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7월 17일 공판은 시작됐고 누가 이기든 항소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AIG 측 변호사들이 17억 달러에 달하는 INA의 자산 이동 의혹을 또 다른 공격대상으로 삼을지 여부는 아직 확실치 않다. 99년 에이스는 INA와 관련 계열사 등 시그나의 손해보험 사업을 인수했다. 인수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인 99년 7월 시그나는 INA에서 17억 달러를 빼냈다. 전체 자산 가운데 18%만 남겨 놓은 것이다. 빼돌린 돈 대부분은 자매회사 에이스 아메리칸 보험으로 넘어갔다. 에이스 아메리칸은 현재 진행 중인 석면 소송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건 스탠리의 앨리스 슈뢰더 고문은 “자산을 이동해야 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었으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에이스는 이에 대해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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