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칭기즈칸’ 한국인 CEO들
‘21세기의 칭기즈칸’ 한국인 CEO들
다국적 기업 GE가 한국에서 발견한 세계화 모델은 철저한 현지화 작업이었다. 이 모델의 핵심은 한국 내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이런 인력을 바탕으로 GE와 한국의 대기업이 전략적으로 제휴를 맺는 것이다. 강석진 전 한국GE 회장(현 CEO 컨설팅그룹 회장)은 GE와 삼성을 연결시켜 제트기 엔진을 제작하는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이 설립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그는 또 국내 유일의 발전설비 제조업체였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 GE의 기술을 접목시켰고, GE의 첨단 의료기기 기술을 국내로 들여왔다. 이런 현지화 전략을 통해 한국GE는 80년대 초 2백60억원의 매출에서 2002년 말 4조원에 이르는 매출을 기록했다. 웰치 전 GE 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강 전 회장을 지목하며 “한국인은 21세기의 칭기즈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제2의 강석진’을 기대하며 한국인을 한국 법인의 대표로 발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아시아에서 한국시장이 중요해지고, 한국인이 세계경영의 파트너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국적 기업에서 한국인 출신으로 CEO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다국적 기업이 한국인 출신을 한국 법인의 CEO로 영입하거나 발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국내 시장에서 오너십과 근성을 갖고 일할 사람으론 한국인이 제격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외국기업협회 회장인 손영석(48) TI 코리아 사장은 “한국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되돌아가는 외국인 CEO는 오너십을 갖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는데 약하다”며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한국인 경영자들의 경우 어떤 문제든지 끝장을 보려는 근성과 장기적 투자 안목을 갖출 수밖에 없고, 이런 점이 능력을 1백% 발휘하는 요소”라고 평가했다.또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한지 대부분 10여년이 넘어서면서 매출 규모나 조직이 커졌다.
이에 따라 본사에서 파견한 외국인 CEO가 이를 관리하기엔 벅차다는 판단 때문에 한국인 경영자를 선호하고 있다. 조직이 커질수록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데,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며 언어가 통하는 한국인 CEO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한국인 특유의 기질도 성공 비결로 꼽힌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뛰어든 분야에는 사양산업도 없고 한계도 없다. 김상현(40) 한국 P&G 사장은 7월 한국에 오기 전 미국 P&G 본사에서 4년 동안 북미 지역 및 글로벌 전략 기획부문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는 남성용 스킨 ‘올드 스파이스’라는 브랜드를 관리했다. 미국에서 올드 스파이스는 노인들이 쓰는 스킨 제품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올드 브랜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떨어진 과제는 올드 스파이스의 매출을 확대하라는 것.
주위에선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 브랜드를 10대들이 사용하는 브랜드로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대대적인 이미지 변신 작업에 들어갔다. 단순한 스킨 제품이 아니라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컨셉트를 목표로 김사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 레이서를 만나 스폰서를 맡았다. 또 스킨뿐 아니라 1회용 면도기·냄새 제거제 등 남성용 제품을 다양하게 출시했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향을 스킨에 첨가했다.
이런 전략이 맞아떨어져 올드 스파이스는 미국에서 넘버 원 ‘틴 브랜드’(Teen Brand·10대가 애용하는 제품)로 발돋움했고, 그가 한국에 오기 직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남성용 제품으로 급성장했다.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40세의 나이에 한국 P&G 사장겸 P&G의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전세계 10만명의 P&G 임직원 중 오직 30명만 이런 직급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승진은 회사 내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상현 사장은 “P&G는 한국인 출신을 적극적이고 포기하지 않는 기질을 갖춘 직원으로 평가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또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본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공세적인 경영자세도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한 한국인 경영자들이 갖는 특징 중 하나다. IMF 체제 직후인 98년 4월 박세준(51) 한국암웨이 사장은 한국암웨이를 통해 아기용 기저귀·전기밥솥·김치 등 국내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을 팔겠다고 미국 본사에 제안했다. 그러자 본사에선 “이런 방법이 성공할지 의문”이라며 “한국의 중소기업 제품이 암웨이 제품보다 더 잘 팔릴 경우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주저했다.
그러나 박사장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본사 임원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제안을 했던 이유는 한국 소비자들과 판매 파트너들이 사고 팔기를 원하는 제품 중 암웨이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을 국내 중소기업을 통해 공급하자는 것 때문이었다. 또 암웨이를 통해 IMF 직후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해 흑자도산의 위험에 놓여 있는 중소기업을 살린다면 국가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고, 암웨이에 대한 이미지도 제고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원포원(One for One)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급속도로 성장해 지난해 2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암웨이 덕분에 도산을 면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박사장은 “현지화에 성공하려면 본사의 우려를 불러일으키더라도 한국 문화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남희(41) 클라란스 코리아 대표이사는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6월 클라란스 한국 법인 사장으로 발탁됐다. 클라란스는 19개국에 지사와 현지법인을 갖추고 연간 1조1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프랑스 화장품 제조업체다. 박사장의 조직관리 원칙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주력하자는 것. 그는 과거 로레알·비오템 등에서 근무할 때 후배들의 장점을 윗사람들에게 보고하는 것을 즐겼고, 직원들이 일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경영진의 허락을 받아 지원해주는데 노력했다.
이를 통해 박사장은 직원들이 ‘나도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 박사장의 지원을 받아 유능한 사원이 되겠다’는 확신을 갖도록 했다. 그는 이런 조직관리의 노하우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적인 피부보호용 화장품 ‘비오템’을 98년부터 맡아 4년여만에 매출을 10배 이상 신장시켰다. 박사장은 “일이 되게 하려면 내 위와 아래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결정된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승한 한국존슨앤드존슨 사장은 리더십이야말로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귀띔한다. 그가 정의하는 리더십은 군대식 상명하달이 아니고 운동선수의 코치식 방법이다. 의견을 전달하기보다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에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직원들에게 “내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신의 아이디어는 무엇이냐”며 토론하기를 즐긴다. 최사장은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도 내 의견을 계속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하기에 따라 많다”고 조언했다.
그가 정의하는 리더십은 꼭 상사가 후배를 설득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후배라도 선배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이것도 훌륭한 리더십이며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최사장은 강조한다. “부하 직원이 상사의 성향이나 접근 방법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려는 일을 좀더 수월하게 할 것”이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최사장은 전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 그리고 모나지 않으면서도 집요한 설득으로 조직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유니레버 코리아에서 근무할 때 도브 비누의 시장 점유율을 1위로 끌어올린 이력을 갖고 있다. 또 유니레버 말레이시아 법인에서는 세탁세제의 시장 점유율을 1위로 올려놓기도 했다.
물론 모든 한국인 CEO들이 축배의 잔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지화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인 CEO도 있다. 종합식품 제조업체 한국네슬레의 이삼휘 사장은 지난 8월 25일 직장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7월 7일부터 시작된 노조의 파업이 지속되자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노조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농심과 네슬레 커피의 판매대행 계약을 맺어 대리점을 관리하던 50여명의 노조원들이 구조조정을 당하게 됐다”며 “고용보장 요구는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사장은 “지난해 단체협상을 했고, 올해는 임금협상만 해야 하는데 노조가 이를 어겼다”며 “노조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한국네슬레측은 최근 3년 동안 한국 직원들의 평균 임금 인상률(10.5%)이 다른 나라 직원(1.5%)보다 높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때문에 호주·터키, 그리고 대만 등 해외 시장을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식품 업계에선 경쟁력없는 사업을 접는 것은 시장의 논리상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사장이 한국인 경영자로서의 이점을 살려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노조측에 충분히 설득했더라면 파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노조 문제와 함께 한국 특유의 접대문화는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들에겐 또다른 복병이다.
국내 비즈니스 풍토는 정부 관계자나 고객사의 담당자와 상대할 때 인맥·학맥 등 개인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접대 등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본사의 규정이 이를 허용하지 않아 한국 법인 사장들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한 한국 법인 대표는 “일보다는 관계가 중요한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본사와 갈등이 없을 수 없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요즘 이런 풍토는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다국적 기업에서 활약하려면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하는 것일까. 김상현 한국 P&G 사장은 “일을 하는 것(Doing)과 성취하는 것(Winning)은 다른데, 한국인들은 일은 열심히 하지만 그저 일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김사장은 한국 법인 CEO로 부임한 첫날 직원들의 업무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이런 주문을 했다. “20여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앞으로 최대 2쪽 내로 줄여서 작성해 주세요.” 더 간단하게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일의 요점을 파악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빨리 찾을 수 있어서다. 손영석 TI 코리아 사장은 빨리 성장하려는 조급증을 버린다면 한국인으로서 다국적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말한다. 손사장은 “다국적 기업은 국내 기업보다 직원에 대한 신뢰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뢰도는 적어도 10년 이상 장기 근무하면서 쌓이는 것인데, 더딘 승진 등으로 실망하고 회사를 그만 둔다면 잃는 것이 더 많다.
대기만성형이 다국적 기업에서 인정받는다”고 충고한다.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한 한국인 경영자들은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적 폐쇄성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다국적 기업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언제든 다른 나라에 파견돼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면서 사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과감하게 수용해 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열린 마음도 갖춰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다국적 기업에도 한국인이 많이 진출하는 것이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내 경제의 성장 폭도 넓힐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그는 또 국내 유일의 발전설비 제조업체였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 GE의 기술을 접목시켰고, GE의 첨단 의료기기 기술을 국내로 들여왔다. 이런 현지화 전략을 통해 한국GE는 80년대 초 2백60억원의 매출에서 2002년 말 4조원에 이르는 매출을 기록했다. 웰치 전 GE 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강 전 회장을 지목하며 “한국인은 21세기의 칭기즈칸”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제2의 강석진’을 기대하며 한국인을 한국 법인의 대표로 발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아시아에서 한국시장이 중요해지고, 한국인이 세계경영의 파트너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국적 기업에서 한국인 출신으로 CEO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다국적 기업이 한국인 출신을 한국 법인의 CEO로 영입하거나 발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국내 시장에서 오너십과 근성을 갖고 일할 사람으론 한국인이 제격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외국기업협회 회장인 손영석(48) TI 코리아 사장은 “한국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되돌아가는 외국인 CEO는 오너십을 갖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는데 약하다”며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한국인 경영자들의 경우 어떤 문제든지 끝장을 보려는 근성과 장기적 투자 안목을 갖출 수밖에 없고, 이런 점이 능력을 1백% 발휘하는 요소”라고 평가했다.또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한지 대부분 10여년이 넘어서면서 매출 규모나 조직이 커졌다.
이에 따라 본사에서 파견한 외국인 CEO가 이를 관리하기엔 벅차다는 판단 때문에 한국인 경영자를 선호하고 있다. 조직이 커질수록 내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데,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며 언어가 통하는 한국인 CEO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한국인 특유의 기질도 성공 비결로 꼽힌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뛰어든 분야에는 사양산업도 없고 한계도 없다. 김상현(40) 한국 P&G 사장은 7월 한국에 오기 전 미국 P&G 본사에서 4년 동안 북미 지역 및 글로벌 전략 기획부문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는 남성용 스킨 ‘올드 스파이스’라는 브랜드를 관리했다. 미국에서 올드 스파이스는 노인들이 쓰는 스킨 제품으로 이미지가 굳어져 ‘올드 브랜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떨어진 과제는 올드 스파이스의 매출을 확대하라는 것.
주위에선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 브랜드를 10대들이 사용하는 브랜드로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대대적인 이미지 변신 작업에 들어갔다. 단순한 스킨 제품이 아니라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컨셉트를 목표로 김사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 레이서를 만나 스폰서를 맡았다. 또 스킨뿐 아니라 1회용 면도기·냄새 제거제 등 남성용 제품을 다양하게 출시했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향을 스킨에 첨가했다.
이런 전략이 맞아떨어져 올드 스파이스는 미국에서 넘버 원 ‘틴 브랜드’(Teen Brand·10대가 애용하는 제품)로 발돋움했고, 그가 한국에 오기 직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남성용 제품으로 급성장했다.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40세의 나이에 한국 P&G 사장겸 P&G의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전세계 10만명의 P&G 임직원 중 오직 30명만 이런 직급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승진은 회사 내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상현 사장은 “P&G는 한국인 출신을 적극적이고 포기하지 않는 기질을 갖춘 직원으로 평가하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또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본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공세적인 경영자세도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한 한국인 경영자들이 갖는 특징 중 하나다. IMF 체제 직후인 98년 4월 박세준(51) 한국암웨이 사장은 한국암웨이를 통해 아기용 기저귀·전기밥솥·김치 등 국내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을 팔겠다고 미국 본사에 제안했다. 그러자 본사에선 “이런 방법이 성공할지 의문”이라며 “한국의 중소기업 제품이 암웨이 제품보다 더 잘 팔릴 경우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주저했다.
그러나 박사장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본사 임원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제안을 했던 이유는 한국 소비자들과 판매 파트너들이 사고 팔기를 원하는 제품 중 암웨이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을 국내 중소기업을 통해 공급하자는 것 때문이었다. 또 암웨이를 통해 IMF 직후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해 흑자도산의 위험에 놓여 있는 중소기업을 살린다면 국가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고, 암웨이에 대한 이미지도 제고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원포원(One for One)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급속도로 성장해 지난해 2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암웨이 덕분에 도산을 면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박사장은 “현지화에 성공하려면 본사의 우려를 불러일으키더라도 한국 문화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남희(41) 클라란스 코리아 대표이사는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6월 클라란스 한국 법인 사장으로 발탁됐다. 클라란스는 19개국에 지사와 현지법인을 갖추고 연간 1조1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프랑스 화장품 제조업체다. 박사장의 조직관리 원칙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주력하자는 것. 그는 과거 로레알·비오템 등에서 근무할 때 후배들의 장점을 윗사람들에게 보고하는 것을 즐겼고, 직원들이 일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경영진의 허락을 받아 지원해주는데 노력했다.
이를 통해 박사장은 직원들이 ‘나도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 박사장의 지원을 받아 유능한 사원이 되겠다’는 확신을 갖도록 했다. 그는 이런 조직관리의 노하우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적인 피부보호용 화장품 ‘비오템’을 98년부터 맡아 4년여만에 매출을 10배 이상 신장시켰다. 박사장은 “일이 되게 하려면 내 위와 아래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결정된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승한 한국존슨앤드존슨 사장은 리더십이야말로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귀띔한다. 그가 정의하는 리더십은 군대식 상명하달이 아니고 운동선수의 코치식 방법이다. 의견을 전달하기보다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에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직원들에게 “내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신의 아이디어는 무엇이냐”며 토론하기를 즐긴다. 최사장은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도 내 의견을 계속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하기에 따라 많다”고 조언했다.
그가 정의하는 리더십은 꼭 상사가 후배를 설득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후배라도 선배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이것도 훌륭한 리더십이며 경영자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최사장은 강조한다. “부하 직원이 상사의 성향이나 접근 방법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려는 일을 좀더 수월하게 할 것”이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최사장은 전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 그리고 모나지 않으면서도 집요한 설득으로 조직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유니레버 코리아에서 근무할 때 도브 비누의 시장 점유율을 1위로 끌어올린 이력을 갖고 있다. 또 유니레버 말레이시아 법인에서는 세탁세제의 시장 점유율을 1위로 올려놓기도 했다.
물론 모든 한국인 CEO들이 축배의 잔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지화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인 CEO도 있다. 종합식품 제조업체 한국네슬레의 이삼휘 사장은 지난 8월 25일 직장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7월 7일부터 시작된 노조의 파업이 지속되자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노조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농심과 네슬레 커피의 판매대행 계약을 맺어 대리점을 관리하던 50여명의 노조원들이 구조조정을 당하게 됐다”며 “고용보장 요구는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사장은 “지난해 단체협상을 했고, 올해는 임금협상만 해야 하는데 노조가 이를 어겼다”며 “노조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한국네슬레측은 최근 3년 동안 한국 직원들의 평균 임금 인상률(10.5%)이 다른 나라 직원(1.5%)보다 높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때문에 호주·터키, 그리고 대만 등 해외 시장을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식품 업계에선 경쟁력없는 사업을 접는 것은 시장의 논리상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사장이 한국인 경영자로서의 이점을 살려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노조측에 충분히 설득했더라면 파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노조 문제와 함께 한국 특유의 접대문화는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들에겐 또다른 복병이다.
국내 비즈니스 풍토는 정부 관계자나 고객사의 담당자와 상대할 때 인맥·학맥 등 개인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접대 등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본사의 규정이 이를 허용하지 않아 한국 법인 사장들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한 한국 법인 대표는 “일보다는 관계가 중요한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본사와 갈등이 없을 수 없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요즘 이런 풍토는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다국적 기업에서 활약하려면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하는 것일까. 김상현 한국 P&G 사장은 “일을 하는 것(Doing)과 성취하는 것(Winning)은 다른데, 한국인들은 일은 열심히 하지만 그저 일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김사장은 한국 법인 CEO로 부임한 첫날 직원들의 업무 프리젠테이션을 듣고 이런 주문을 했다. “20여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앞으로 최대 2쪽 내로 줄여서 작성해 주세요.” 더 간단하게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일의 요점을 파악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빨리 찾을 수 있어서다. 손영석 TI 코리아 사장은 빨리 성장하려는 조급증을 버린다면 한국인으로서 다국적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고 말한다. 손사장은 “다국적 기업은 국내 기업보다 직원에 대한 신뢰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뢰도는 적어도 10년 이상 장기 근무하면서 쌓이는 것인데, 더딘 승진 등으로 실망하고 회사를 그만 둔다면 잃는 것이 더 많다.
대기만성형이 다국적 기업에서 인정받는다”고 충고한다. 다국적 기업에서 성공한 한국인 경영자들은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적 폐쇄성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다국적 기업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언제든 다른 나라에 파견돼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면서 사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과감하게 수용해 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열린 마음도 갖춰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다국적 기업에도 한국인이 많이 진출하는 것이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내 경제의 성장 폭도 넓힐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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