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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과 완성도 면에서 수준급인 ‘황산벌’

스케일과 완성도 면에서 수준급인 ‘황산벌’

황산벌
퓨전(Fusion)은 현대 사회를 규정짓는 특징 중 하나다. 영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코미디·액션·멜로드라마 등 우리 영화를 주도하고 있는 세 장르 중 둘 혹은 세 장르가 자유자재로 뒤섞이는 건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시도가 아니다. 먼 시대 이야기든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든, ‘비천무’ ‘단적비연수’ ‘아나키스트’ ‘무사’ ‘청풍명월’ 등 근자에 선보인 일련의 시대물들을 떠올려보라. 이상하게도 이들 중 코미디의 외양을 띤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웃음으로 채색하기엔 역사란 그만큼 진지하고 무겁다고 여겼던 걸까. 17일 개봉한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그 고정관념에 수퍼헤비급 강펀치를 날리는 2003년의 파격 프로젝트다. 홍보 문구대로 한바탕 ‘신명나는 퓨전 역사 코미디’인 것이다. 사랑하는 처자식까지 죽이고 결전의 황산벌 전투에 임하는 백제의 명장 계백 장군이 부하들에게 결사항전을 독려하며 느닷없이 호남 사투리를 팍팍 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체신머리 없이 ‘거시기 타령’이나 일삼는다. 신라의 노장 김유신 장군 역시 영남 사투리로 그 특유의 준엄한 이미지를 해체시켜 버리는 광경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의문은 품어봤을 것이다 ‘영화 또는 TV 사극 속의 주인공 은 왜 모두 표준어를 쓰는가’라는. ‘황산벌’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황산벌 전투 전후의 660년을 배경으로, 소박하지만 기념비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흥미만점의 대중오락물로 나아간다. 백제 의자왕(오지명)·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이호성)·고구려 연개소문(이원종) 3국 시대 3인방이 당 태종 면전에서 자기 지방만의 사투리로 혈전을 벌이는 도입부부터 영화는 편견의 허를 사정없이 찌른다. 이후 갈수록 영화는 점입가경이다. 처남·매제 지간인 김유신(정진영)과 김춘추가 반말을 하고, 계백(박중훈)의 거시기 타령이 터져나오면서 관객들은 그야말로 웃음에 무방비 상태가 돼버린다. 백제·신라 양 진영 군사들의 욕싸움, 각 진영을 대표하는 몇몇 병사의 맞장뜨기, 그리고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는 최후의 총공격전 등은 관객들을 웃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황산벌’ 역시 역사를 빙자해 맹목적 웃음이나 유발시키고, 그로서 떼돈이나 벌려는 천박한 코미디일까. 천만의 말씀. 그렇게 진단하기엔 영화의 땀과 피가 화면 곳곳에 너무 짙게 배어 있다. 의상이나 분장 등의 꼼꼼함은 시대극이라면 기본이니만큼 새삼 상술하진 않으련다. 비록 코미디의 모습을 띠고는 있으나 영화는 우선 액션물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한 스케일과 완성도를 뽐낸다. 사투리 구사가 그저 웃음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라는 점도 영화의 큰 성취다. 걸쭉한 그들만의 대화법은 통쾌하기 그지없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기존 역사물의 맹목적 표준어 구사가 실제론 얼마나 많은 역사 왜곡을 야기했는지를 생생하게 웅변해 준다고 할까. 세계 그 어디든 존재하는 사투리는 각 해당 지역의 정서는 물론 고유의 문화를 표현하는 데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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