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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부채에 발목 잡힌 경제

가계 부채에 발목 잡힌 경제



Korea Goes Bust

두 아들의 어머니인 조경희(30)씨는 칫솔 하나에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고 말한다. 2000년 여름, 서울 거리를 걷던 조씨에게 신용카드 회원 모집원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회원으로 가입할 경우 전동 칫솔을 공짜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남편이 직장인이라는 말만으로도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곧 그녀는 또다른 모집원들로부터 5장의 신용카드를 추가로 발급받았다.

그러고는 다른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처럼 신용카드 빚을 또다른 신용카드로 갚으면서 쇼핑에 열중했다. 현재 그녀의 카드 빚은 약 2천4백만원이나 된다. 전화요금도 못 내고 있고, 전기와 수돗물 공급은 조만간 끊길 판이다. 그녀와 남편이 지난주 신용회복위원회 서울 상담소를 찾았을 무렵 그들 가정은 파산 직전이었다. 그녀는 “빚 때문에 자살을 여러번 생각했었다”며 “신용카드를 아예 신청하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 말은 요즘 한국인들의 모토가 돼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과 태국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소비문화 속에 신용카드를 도입하고 있는 요즘, 유독 한국에서만은 기본적으론 편리한 도구인 신용카드의 부작용이 톡톡히 나타나고 있다.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외채와 외국의 요구에 과도하게 의존했음을 보여줬다. 아시아 국가들은 수출만으론 살 수 없었고, 내수 진작을 위해 현대적 쇼핑 소비문화를 권장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신용카드였다.

그러나 유독 한국은 신용카드 주도 경제를 하룻밤에 만들어내려 애썼다. 97년 12월 금융위기가 절정에 달한지 몇달 후 한국 정부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를 없애고, 신용카드 사용에 대해 감세 혜택을 주더니 나중에는 카드 소지자를 위한 복권도 만들었다. 한국인들은 그 미끼를 물었고, 급증하는 신용카드 지출은 1999년과 2000년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을 두자리 숫자로 밀어올렸다. 카드 부채 상환 시기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최공필 선임연구원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부진할 때도 한국은 가계지출 덕분에 활황을 누렸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호황을 누리는 지금 한국의 경제성장은 가계부채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지적한다. 소비진작을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 지금은 소비위축의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세계 최다의 가계부채로 허덕이면서 지난해 한국의 GNP 성장률은 3% 미만으로 떨어지고 실업률은 거의 4%로 올랐다.

모건 스탠리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급증하는 가계부채는 이제 소득의 1백17%, GNP의 75%에 이르며 이는 “미국과 영국 같은 성숙한 경제도 위축시킬 수준”이다.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는데, 이는 신용카드로 다른 카드 빚을 갚는 소위 ‘다중 채무자’가 아직도 1백만명이 넘기 때문이라고 모건 스탠리는 경고한다.

한국은 불과 5년만에 또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번에는 채무자가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다. 하지만 두 위기 모두 궁극적으로는 은행들의 무모한 대출로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정부의 공격적인 정책과 관련 있다. 금융당국이 신용카드 발급과 사용에 대한 규제를 철폐한 후 금융기관들은 기초적인 신용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카드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한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지역 노숙자의 27%가 신용카드 소지자다. 홍콩·일본 같은 다른 아시아 시장의 경우 금융기관들은 “대출이나 카드 발급에 좀더 신중하다”고 서울에 있는 인더스트리얼 리서치 앤드 컨설팅의 헨리 모리스는 말한다. 모건 스탠리는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놀랍게도” 신청자의 거의 1백%에 대해 카드를 발급하고 있다며 “이런 관행이 지금 바뀌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경고했다.

금융당국의 반응은 위기를 심화시켰을 뿐이다. 경상대 어느 교수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당국은 누적되는 가계부채에 관한 경고를 2001년 5월께부터 받았지만 ‘확장’ 의식에 사로잡힌 재경부는 소비를 더욱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국의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은 2002년 말 갑자기 신용카드 체납자에 대한 신용 제공을 중단했다.

다른 은행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은행들은 신용카드 발급과 가계대출을 억제하고, 때론 만기 전에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가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당국은 방침을 바꿨다. 90년대 말의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창립된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가계부채를 설정액의 30% 선에서 매입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자 많은 소비자들은 이를 부채 탕감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공사측은 그 계획을 철회했지만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고 임춘수 삼성증권 상무는 말한다. 많은 가구들이 무작정 부채 상환을 중단해버린 것이다.
3개월 이상의 채무 연체자 수는 3백70만명에서 올해 말 4백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론적으론 전체 인구의 15%가 파산자라는 뜻이다. 그 대다수는 구치와 아르마니 제품을 사기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한 40세 미만의 젊은층이다. 신문에는 카드 빚으로 인한 이혼·자살, 그리고 사창가로 넘어간 젊은 여성들에 관한 얘기가 넘쳐난다. 지난해 12월에는 한 젊은 가장이 약 3천6백만원의 카드 빚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뒤 자신의 두 아이를 차가운 한강물에 던져 죽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경상대 김홍범 교수(경제학)는 “97년의 외환위기는 비교적 빨리 끝났다. 하지만 가계부채 위기는 주로 젊은층의 문제인 만큼 오래 갈 것”이라고 말한다.

2002년 말 창설된 신용회복위원회의 서울 상담소에는 방문객들이 상담받기 위해 4~5시간씩 줄을 서 기다린다. 신용회복위원회 교육홍보팀 이동기 과장은 방문객의 다수가 자녀들의 부채 상환을 돕기 위해 빚을 얻은 사람들로 이제는 그들 자신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있다면서 “98년 대기업들이 계열사간 상호출자 때문에 파산 도미노 현상을 일으켰듯이 지금은 개인들이 가족간의 지원 때문에 파산 도미노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관계당국자들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굴욕적인 5백6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얻어야 했던 98년에 비해 이번 위기는 해결하기가 더 쉽다고 말한다. 당시 기업들의 부실채무를 해결하는 데는 1천4백억달러가 들어갔지만 부실 가계채무의 경우는 훨씬 적은 3백억달러 수준이라는 게 당국의 얘기다.

하지만 이견도 있다. “과거에는 기업 구조조정과 해고라는 명확한 해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신속한 해결책이 없다. 이미 신용불량자들은 벼랑끝에 와 있다”고 최공필 연구원은 지적한다. 조경희씨는 신용카드 회사 직원들이 지금도 자신을 매일 쫓아다닌다고 말한다. 다만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카드 빚 변제라는 게 과거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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