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누군가에… 홍반장’
영화 제목이 깜찍하다. 무려 스물여섯자나 되는 긴 제목의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은 1970년대 인기 만화영화 ‘짱가’의 주제곡 가사에서 제목을 따왔다. 영화를 보면 홍반장(김주혁)은 혜진(엄정화)이 위기에 처했을 때 꼭 나타난다. 여자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만능 해결사라고 할 수 있는 홍반장은 그러나 ‘백마를 탄 왕자님’과는 거리가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는가 하면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퀵 서비스 배달원이 되는가 하면 정육점 주인에다 편의점 점원, 심지어 밤무대 통기타 가수까지 뛰는 그는 만능인이다. 좋은 말로 만능인이지 뚜렷한 직업이 없는, 일당 5만원이면 무슨 일이든 ‘예스’하는 인물이다. 치과의사 혜진은 그런 홍반장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녀는 전형적인 도시풍의 자존심 강한 여성이다. 종합병원 치과에서 근무하던 중 잘난 체하는 환자의 진료를 거부했다가 문제가 돼 사표를 던진 그녀는 개업의사를 꿈꾼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한 돈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힌다. 우연히 간 바닷가 시골마을에 마음을 정한 혜진은 첫날부터 홍반장의 도움으로 건물을 구하고 내부를 그럴듯하게 꾸민다. 이렇듯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홍반장의 해결사 역할로 시작된다. 위기 때마다 받는 도움에 홍반장의 따뜻한 마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 그러하듯 두 스타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연기의 호흡과 긴장감이 볼거리다. 자존심이 강하고 ‘싸가지 없는’ 여의사 혜진은 홍반장의 도움으로 마을에 적응하며 공동체의 삶과 안락함을 배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 보낸 ‘고아 소년’ 홍반장은 혜진마저 떠나버릴까봐 고백하기를 주저한다. 흔히 로맨틱 코미디는 여주인공이 지닌 신데렐라의 환상을 그려낸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귀여운 연인’에서 보듯 밑바닥에 있는 한 여자는 한 사업가를 만나 진짜 여인이 된다. ‘…홍반장’은 이를 슬쩍 뒤집어 버린다. 알고 보니, 대재벌의 딸인 혜진이 직업은 뚜렷하지 않지만 마음이 착한 홍반장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홍반장’에 따르면 여성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물질적 풍요나 신분 상승보다는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남자다. 김주혁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 낸다. ‘…홍반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나리오 솜씨다. 이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신정구 작가는 조만간 한 방송사에서 방영될 시트콤 ‘두근두근 체인지’의 대본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 4시간 동안 사용자를 미녀로 만들어주는 마술 샴푸를 구해 얼짱으로 변신한다는 만화 같은 내용이다. ‘…홍반장’도 그런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위기마다 어디서나 나타나는 홍반장의 모습은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의 감성이 녹아 있다. 오늘날에는 시골에서조차 동네 일을 제 일처럼 거드는 인물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적인 상상력의 한계도 있다. 3분의 2까지는 한 마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로 에피소드를 전개하지만 마지막 3분의 1은 상큼한 마무리 대신 두 사람의 관계를 질질 끌며 늘어진다. 어디에나 나타나는 홍반장의 신비를 적절히 풀어주거나 감추지 못한 결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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