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현대그룹]“누구편인지 모르는 이병규를 왜 써요!”

왼쪽부터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이병규 전 현대백화점 사장(현 문화일보 사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지난 3월30일 경기도 이천 현대엘리베이터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 이날 현정은 회장 측이 KCC 측에 낙승하면서 8개월여에 걸친 경영권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해 11월22일 토요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의 경영권 싸움이 한창일 때였다.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검은색 다이너스티 승용차가 도착했다. 현회장의 친정어머니인 김문희 여사는 63빌딩 맨위층에 있는 조용한 식당에 들어섰다. 최근 문화일보 사장으로 발령난 이병규 현대백화점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첫번째 대면이었다. 고 정몽헌 회장의 상가에서 잠깐 얼굴을 봤지만 정식으로 인사하기는 처음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들은 한 시간 가까이 최근의 현대그룹 사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문희 여사는 이병규 고문의 의사를 타진했다. 측근들의 얘기를 통해 당시 정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그룹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이사장(현대백화점 사장을 지내 지칭한 말임)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이사장이 현대그룹을 맡을 최적격자라고 했어요. 현대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필요하다고들 해요. 현정은 회장은 오너이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사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실장으로 그 분을 오래 모셨잖습니까. 창업자의 뜻을 잘 아시고 현대그룹을 이끌 만한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병규 사장은 김여사의 말을 다 들은 뒤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가신 그룹이라고 지탄받고 있는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과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을 먼저 사퇴시켜야 합니다.” 이병규 사장은 이런 조건을 들어주면 현대그룹 회장직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김문희 여사와 이병규 사장은 이날 만남에서 명확하게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서로 의견을 타진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현정은 회장 측은 왜 이병규 사장 영입을 추진한 뒤 끝내 그를 쓰지 않았을까? 현회장은 정상영 명예회장의 공격 방식에 무척 신경을 썼다. 정상영 명예회장 측이 현대그룹의 정통성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정씨 일가도 아니면서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평생 일군 현대그룹을 통째로 가져간다….” 현회장은 이 부분이 내심 께름칙했다. 정상영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현대그룹을 챙기기에는 ‘명분 확보’가 절실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현회장도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줄 만한 전문경영인을 앞장세우기 위해 사람을 찾고 있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명망이 있는 이병규 사장을 영입하면 현대그룹의 정통성 시비는 사라집니다.” 현대그룹 핵심 임원들은 입을 모아 그를 추천했다. 이런 조언에 따라 김문희 여사가 이날 이병규 사장을 만났던 것이다.

“이사장이 현대 맡을 최적임자” 며칠 뒤 김문희 여사는 현회장에게 이병규 사장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현회장의 반응은 뜻밖에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병규 사장이 현대그룹 회장으로 들어오면서 내건 조건이 가신 그룹 청산이라고요? 그 사람은 누구 편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강명구 회장과 김윤규 사장을 자르라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전쟁터에서 잘 싸우고 있는 장수를 자르라는 것이잖아요. 작은아버지(정상영 명예회장)가 밀고 들어오는 싸움판에서 이 사람들이 다 막아내고 있잖아요. 그런데 두 사람을 지금 잘라내면 전력 손실이 아닌가요? 제가 듣기로는 이병규 사장은 작은아버지와 더 친하다고 해요. 이 편인지 저 편인지 명확지 않은 사람을 제가 어떻게 써요.” 원래 이병규 사장은 현회장의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과 꽤 사이가 좋았다. 현회장도 평소에 이병규 사장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현회장은 이병규 사장에 대한 평가를 왜 바꾸었을까?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의 당시 발언은 이런 궁금증을 다소 풀어준다. “요즘 밖에서는 이병규 사장이 현대그룹 회장으로 영입된다고 하는데…. 그룹 내부 분위기를 보면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현회장이 고개를 갸우뚱하시거든요. 김문희 여사가 이병규 사장을 만난 것을 두고 현대그룹 회장으로 낙점된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병규 사장은 얼마 전 정상영 명예회장도 만났어요. 골프장에서 두 사람이 운동하는 것도 봤거든요. 그분은 이쪽 사람도 만나고, 저쪽 사람도 만나는 그런 사람이예요. 누구 편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내 편으로 쓰겠어요? 현회장도 이런 내용을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현회장은 이병규 사장이 확실하게 한편으로 줄을 서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즉 이병규 사장이 정상영 명예회장 쪽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회장의 이병규 사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단면은 또 있다. 지난 3월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산업정책연구원 주최로 열린 윤리경영포럼 발족 1주년 행사에 참석한 뒤 현회장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범현대가가 KCC 쪽에 기울었다고 하는데) “다시 한번 강조한다. 범현대가는 KCC 편도 꼭 우리 편도 아니다. 정몽헌 회장이 타계한 뒤 외국인들이 현대그룹을 노렸을 때 도와줬고 그게 전부다.” (최근 이병규 사장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얼마 전 현대엘리베이터 이사회 전에 있었던 가족 모임에 이병규 사장이 찾아왔다. 그런데 얘기를 해보니 너무나 현대그룹 사정을 모르고 있더라.” (어떤 것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최근 현대그룹 돌아가는 얘기에 대해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더라. 지분 상황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럼 이병규 사장이 너무 무능해서 이사 추천에서 배제했다는 얘기인가) “…….” 현회장이 이병규 사장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정상영 명예회장 측에서 먼저 이병규 사장을 현대그룹 회장으로 영입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경영권 분쟁 중에 “현대그룹을 소유하지는 않을 것이나 당분간 내가 나서서 경영진 개편과 사업조정 등 핵심 사안에 대해 대주주의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정몽헌 회장의 사후 현대그룹 재건에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정명예회장도 외부에서 현대그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의식해 이병규 사장을 전문경영인으로 앞세우려고 했다. 당시 알려진 정상영 명예회장의 현대그룹 장악 이후 운영 방안은 다음과 같다. ▶현대상선·현대택배·현대증권 등을 총괄하는 지주회사인 ㈜현대를 새로 설립하고 ▶이병규 사장을 현대그룹 회장으로 영입해 총괄하게 하고 ▶대북사업을 하는 현대아산을 국민기업화하며 ▶현대엘리베이터는 유가족을 위해 계열 분리하는 것 등이 골자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그림자 이병규 사장은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지난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92년까지 16년간 정주영 명예회장을 보좌한 ‘최장수 비서’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분신’ ‘정주영 명예회장의 그림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99년 4월 금강개발산업(현 현대백화점) 사장에 올랐다. 금강개발산업은 3남인 정몽근 회장 소유 기업이다. 그는 그해 1월 부사장으로 있다가 사표를 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한 단계 직급이 상승한 사장으로 돌아왔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신임이 여전히 변함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병규 사장은 입사 이후 그룹 내에선 일찌감치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려왔다. 99년 서른여섯 나이로 현대건설에서 ‘별’(이사)을 땄다. 이에 앞서 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 때는 당시 정주영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특별보좌역을 지냈다. 98년에는 금강산관광 등 그룹 핵심사업인 대북경협에 깊숙이 참여했다. 이렇게 정주영 명예회장을 그림자 보필하면서 수난도 겪었다. 정명예회장의 ‘정치 외도’를 돕다 옥고까지 치른 것이다. 이병규 사장은 당시 정명예회장의 정치자금을 관리한 혐의로 수배당해 무려 1년 8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김영삼 정부의 보복성 세무조사 등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는 서울 근교의 5평짜리 아파트에서 연탄을 직접 갈며 숨어지내야 했다고 술회했다. 이병규 사장은 “당시 외로움과 고달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매사에 성실해야 한다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병규 사장의 희생을 감안해 그후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94년 11월엔 현대문화신문(현 문화일보) 수석부사장으로 임명했다. 95년 1월부터 98년 3월까지는 왕회장의 재산을 관리하는 아산재단 사무처장·중앙병원 부원장·금강개발산업 부사장(여행사업부)을 겸임했다. 이병규 사장의 지인들은 그가 사석에서조차 정주영 명예회장을 언급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충직한 경영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2000년 형제간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 때도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닌 것 같다”며 답답한 심경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례식 때(2001년 3월)는 임직원 대표로 조사를 읽기도 했다. 특히 이병규 사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하기 전 마지막까지 지근거리에 서 있었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정명예회장은 가끔 바깥 나들이를 했다. 정명예회장이 타계하기 몇 달 전인 2000년 11월21일. 그는 이날도 “갑갑하다”며 새로 개통된 신공항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또 현대의 정씨 일가와 두루 친분을 쌓았으며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겸손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는 분당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뵙는 효자다. 한마디로 현대그룹의 정씨 일가 코드와 맞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이같이 현대그룹의 대표적인 ‘왕당파’로 분류된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사람이라는 뜻이다. 창업자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으로 현대 안팎에서 평가를 받았던 셈이다. 따라서 현정은 회장이나 정상영 명예회장 측이 이병규 사장을 영입하면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이어 받는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경영권 분쟁으로 흩어진 현대가를 추스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현대가에서는 언제든지 쓸 수 있었던 ‘히든카드’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현회장과 정명예회장 간 경영권 분쟁은 해를 넘기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전투구는 더 심해져 갔다. 따라서 범현대가에서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범현대가는 당초 정상영 명예회장 편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점차 거리를 두고 중재역을 자임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지난 2월10일. 김영주 한국프랜지 명예회장(정상영 명예회장의 매제)의 장남인 김윤수 한국프랜지 회장 등 범현대가 기업 관계자들이 회동을 갖고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갖고 있는 한국프랜지 외에 현대중공업·현대백화점·현대종합금속에서 대부분 참석했다. 이날 모임은 사실 정몽준 의원의 뜻이 배어 있었다. 그는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범현대가 그룹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친족이기 때문이다. 범현대가는 이 자리에서 우선 중립적인 인사 3명을 현대엘리베이터의 이사로 추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 12개 계열사의 사실상 지주회사다. 추천 인사는 역시 이병규 사장이었다. 또 황병기 전 감사원 사무총장, 박용상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이었다. 범현대가는 이 같은 권고안을 주주제안 형식으로 엘리베이터 측에 제출하는 한편 KCC와 현대그룹에도 전달했다. 그러나 현회장은 범현대가의 중재 움직임과 관련해 ‘선(先) KCC 지분 처분, 후(後) 중재안 수용’이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정명예회장이 ‘5%룰’(주식 대량 보유·변동 보고 의무)을 위반해 불법적으로 매집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먼저 처분하라는 주장이었다.

정몽준 ‘이병규 카드’로 중재 나서 그런데 이병규 사장이 범현대가의 이름으로 중재에 나선 지 한달 뒤인 지난 3월13일. 그는 전격적으로 ‘중재역’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병규 사장은 중재역 포기를 선언하면서 당시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냈다. “범현대가에서 주주제안 형식으로 현대엘리베이터 이사 후보로 추천해 양측의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최근 양측을 모두 만난 결과 현회장 측이 이에 동의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양측 중 어느 한쪽이라도 주주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퇴하겠다는 이사직 수락 당시의 약속에 따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에 앞서 현정은 회장과 정몽진 KCC 회장(정상영 명예회장의 장남)을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현회장 측은 “정상영 명예회장 측이 아직도 주식 공개매수를 선언하는 등 현대그룹 장악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재 절차는 분쟁 당사자들이 타협의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현대엘리베이터는 범현대가의 중재를 무시하고 이사회에서 현정은 회장, 최용묵 사장, 신복영 콤텍시스템 회장(전 서울은행장)을 이사 후보로 확정했다. 현회장 측이 이병규 사장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달 30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주총회에서 현정은 회장과 정상영 명예회장 간 표대결까지 갔다. 그러나 정상영 명예회장 측은 전날 현대증권 측이 서울지법에 낸 KCC의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정상영 명예회장 측은 이날 주총에서 표대결마저 포기해 두 손을 들었다. 정몽준 의원과의 관계 역시 이병규 사장을 보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다. 이병규 사장은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시절 정몽준 의원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선거 캠프를 지휘할 최적임자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몽준 의원의 대선 출마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곧 “국내 정치권의 변화와 관계 없이 기업 경영에만 전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해 고사했다. 그렇지만 이병규 사장과 정몽준 의원은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이 불거지면서 다시 만났다. 범현대가의 중재 역할을 서로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 이병규 사장은 문화일보 사장으로 발탁됐다. 현대그룹의 전직 사장을 지낸 한 인사의 말이다. “정몽준 의원은 범현대가의 중재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병규 사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사장이 범현대가 중재역 포기를 발표하자 매우 아쉬워했다. 그를 문화일보 사장으로 전격 영입하는 데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