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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잡초…황량한 자연미

바람과 잡초…황량한 자연미

올해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는 로열트룬 올드 코스는 링크스 코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척박한 땅에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해 꾸민 코스로 황량한 느낌을 주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묘미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음산하다. 그 옛날 교수대가 서 있던 그래스 마켓의 ‘마지막 교수형(The Last Drop)’이란 으스스한 이름의 선술집에서 기네스 맥주에 스코틀랜드 순대 하기스(Haggis)를 먹고 늦은 오후 트룬(Troon)으로 향했다.
오는 7월 15일 전 세계 골프 팬을 열광시킬 메이저 중 메이저인 ‘디 오픈(The Open: 콧대 높은 영국인들은 브리티시 오픈을 디 오픈이라 부른다)’이 열리는 로열트룬(Royal Troon) 올드 코스로 라운딩하러 가는 길이다.

기네스의 취기가 가슴 터지는 흥분을 지그시 가라앉힌다. 좋은 코스엔 좋은 동반자가 금상첨화다. 동반자는 계량경제학자 세계 20걸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든버러대학 교수 신용철(44) 박사다. 이번에 리즈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어 여기저기서 축하 받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까다로운 로열트룬 취재 허가까지 받아낸 것이다.

신 박사는 전혀 근엄하지 않은, 전혀 교수답지 않은 너무나 소탈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다. 휴일에 우리 유학생들과 야구를 하다가 멱살잡이 싸움을 하고는 맥주를 마시며 낄낄 웃는 다혈질이면서도 단순한 사람이다. 호텔방에서 먹은 중국 음식 쓰레기 봉투를 버린다는 게 엉뚱하게 쇼핑한 옷 보따리를 버리고 와서 천장을 보고 욕을 퍼붓는 사람이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 동쪽 해안에 위치하고, 작은 소읍 트룬은 서쪽 해안에 붙어 있다. 그러나 두 곳을 잇는 횡단선은 영국 땅의 목에 해당되는 곳이라 자동차편으로 불과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트룬에 가까워질 때 찻길은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를 관통한다. 그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많은 공장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가 하늘을 검게 덮었다고 소개된 풍요의 도시(그 당시에 환경오염의 개념은 없었다) 글래스고는 굴뚝 산업의 퇴조로 한때 200만 명이던 인구가 70만 명으로 줄어 적막감마저 감도는 회색도시로 바뀌었다.

남서쪽으로 50여km를 달리면 트룬에 닿는다. 작은 어촌이었던 트룬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이 어둠이 내리자 북해의 세찬 바람소리뿐 거리는 한적하기만 하다.
명문 골프코스들이 대부분 자체 리조트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로열트룬은 클럽하우스뿐이다. 그러나 클럽하우스에서 몇 발짝 떨어진 마린호텔이 로열트룬 리조트 행세를 한다. 마린호텔에서 수영과 사우나를 하고 바에서 술 한 잔 마시고 자리에 누워도 다음날 아침 로열트룬에서 라운드한다는 감격에 잠이 오지 않는다.

날이 밝았다. 창밖의 풍경은 오늘도 음산하기만 하다. “바람과 먹구름 ·후두두 뿌리는 빗방울은 링크스 코스 골프의 일부분이지요.” 클럽하우스 창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를 가리키며 로열트룬의 캐디 마스터가 이야기한다. 도대체 링크스(Links) 코스란 무엇인가. 콰르르 해변을 때리는 북해의 파도는 백사장이 늘어진 비치를 만든다. 몰아치는 바람은 비치의 입자가 작은 모래를 해안으로 날려 보낸다. 천 년 만 년 바람에 날려온 미세한 모래는 해안에 쌓이고 또 쌓여 작은 언덕들을 만든다. 해질녘 햇살이 사선으로 누우면 작은 언덕들은 공동묘지처럼 봉곳봉곳 솟아올랐다.

이곳을 링크스 땅(Links Land)이라 부른다. 비치와 링크스 랜드가 다른 것은 비치는 굵은 모래에 바닷물에 잠겼다 나오기를 반복하지만, 링크스 랜드는 모래 입자가 섬세하고 엄청난 해일이 올 때 외에는 바닷물에 잠길 때가 없다. 하지만 강풍에 날려 온 바다의 물거품과 해무가 링크스 랜드에 항상 염분을 뿌린다. 링크스 랜드는 작물의 경작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연은 이 척박한 땅에도 놀랍게 적응하는 힘을 준다. 벼과의 억센 풀인 페스큐(Fes- cue)가 링크스 랜드를 덮고, 관목인 가시금작화(Gorse)가 띄엄띄엄 혹은 군락을 이루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놀라운 생명력을 보인다. 이 황량한 링크스 랜드 위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가시금작화를 피해 페스큐를 짧게 깎아 페어웨이를 만들고 그린을 만들었다.

여기서 만든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풀을 깎아 공이 가는 길을 정했을 뿐이다. 캐터필러가 굉음을 울리며 산을 깎고, 바위를 깨고, 땅을 자르고 붙이고, 인공 워터 해저드를 만들고, 수로를 만들고, 배수거를 구축하고, 배수관을 묻고, 자갈을 깔고, 모래를 얹고, 표토를 얹고, 잔디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링크스 코스에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천 년 만 년 세월 속에 자연이 빚어놓은 지형 그대로인 링크스 랜드에 인간은 조심스럽게 풀만 깎고 구멍만 뚫었을 뿐이다.
지형에 따라 골프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내륙(Park Land) 코스 ·해안(Sea Side) 코스 그리고 링크스 코스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코스는 내륙 코스다.

“페블비치 링크스는 링크스 코스가 아닌가” 라는 질문에 로열트룬의 비서(우리의 매니저격)는 웃으며 말한다. “해안 코스를 미국 사람들이 링크스라 이름 붙였다. 우스운 얘기다.”
스코틀랜드의 바닷가 골프코스라고 모두가 링크스 코스는 아니다. 그곳에도 해안 코스는 많다. 해안 코스는 위치만 해변에 있다 뿐이지 코스를 조성하는 과정은 내륙 코스와 다를 바 없다. 링크스 코스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다.

‘디 오픈’은 영국 내 8개 링크스 코스 가운데 영국왕실골프협회(R&A)가 지정한 코스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바로 이곳 로열트룬에서 4일간 치러진다.
지금껏 로열트룬에서 ‘디 오픈’을 일곱 번 개최했으니까 이번이 여덟 번째가 되는 것이다. 로열트룬에서 우승트로피인 클래럿 저그(Claret Jug)를 높이 쳐든 골퍼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아널드 파머(1962년)를 위시해 톰 왓슨(1982), 마크 캘커베키아(1989) 그리고 최근엔 97년 저스틴 레너드가 주인공이 됐다. 올해는 최경주를 포함한 156명이 열전을 벌인다.

비서에게 올해의 예상 챔피언 다섯 명만 꼽아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빙긋이 미소를 흘린 후 대답했다. “물론 타이거 우즈 ·어니 엘스 그리고 콜린 몽고메리 ·대런 클락이다.”
그가 최근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는 콜린 몽고메리를 꼽는 것엔 다른 이유가 있다. 몽고메리의 아버지가 로열트룬의 매니저로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콜린 몽고메리의 잔뼈가 굵은 곳이라 눈을 감고도 코스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열트룬은 1878년에 트룬의 몇몇 골프광들에 의해 문을 열었으니 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색창연한 골프코스다. 전형적인 링크스 코스로 클럽하우스 옆, 1번 홀 티 박스에서 바라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다.
레이아웃은 단조롭다. 오른쪽 바다를 끼고 프런트 9홀이 계속 이어지다가 백 나인은 방향을 틀어 프런트 나인과 평행을 이루며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파71 ·전장 7,174야드. 전체적인 레이아웃은 단순하지만 한 홀, 한 홀은 샌드듄의 모양새와 페스큐 러프와 항아리(pot) 벙커 ·가시금작화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다.

로열트룬의 시그니처홀은 8번 홀이다. 우표 딱지(Postage Stamp) 홀이라는 이름처럼 그린이 작다. 챔피언티가 불과 123야드 밖에 안 되는 짧은 홀이지만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티 박스가 이 골프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강풍에 완전히 노출돼 있다. 그린은 티 박스보다 훨씬 아래에 있지만 포대그린이라 풍속을 잘 읽고 내리막을 계산해서 온 그린 시킨다는 게 여간 어려운 홀이 아니다. 포대그린을 둘러싼 다섯 개의 항아리 벙커에 공이 들어가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다. 오른쪽 옆으로 흘렀다 하면 가시금작화 덩굴 속에 처박히고 만다. 디 오픈이 열리는 8개의 골프코스를 통틀어 가장 짧은 홀이지만 멕시코 고추만큼 매운 홀이다.

로열트룬은 최근 올해 디 오픈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1 ·6 ·11 ·15번 홀 티 박스를 뒤로 빼 전체 길이를 100야드 늘리고 10개의 새 벙커를 만들었다. 대회까지 방문객에게는 라운드를 허용하지 않는다.3월엔 바람이 프런트 나인에 역풍이 되지만, 7월엔 거꾸로 백 나인이 역풍을 맞는다. 바람이 관건이다. 로열트룬은 7월 15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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