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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뛰어 넘은 미국인의 우상

냉전을 뛰어 넘은 미국인의 우상

American Dreamer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타이밍은 언제나 절묘했다. 1984년 6월 6일 노르망디 절벽에서 거행된 D데이 상륙작전 기념 행사에서 멋진 경례로 참전 노병들을 치하한 지 꼭 20년만인 지난 5일 밤 그는 캘리포니아 벨에어의 자택에서 알츠하이머병에 맞선 길고도 당당한 싸움을 끝내고 영면에 들어갔다. 임종을 지킨 가족들 중 한명은 “아주 평온하게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레이건의 타계 소식은 세계가 다시 한번 나치 통치를 종식시킨 연합군의 승리를 기리는 동안 타전됐다. 지난 주말 바로 그 노르망디 해변에서 각국 정상·참전용사·유가족들은 미국인들과 더불어 레이건의 죽음을 애도하며 녹음 테이프를 통해 20년 전 그가 남긴 연설을 다시 들었다. 1984년 전승기념일에 레이건은 해방의 선봉대였던 유격대원들을 기리며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전 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확신이요, 정의의 신이 끝내 은총을 내리리라는 믿음이었다”고 말했다. 레이건의 목소리는 감정에 북받친 듯 떨리고 있었다.

품위와 신념, 그리고 강력한 힘이 깃들인 그의 연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가장 냉소적인 비판이라야 레이건 자신은 2차대전 당시 할리우드에서 군대용 교육 영화나 찍지 않았느냐는 게 전부였다. 그 노르망디 연설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직생활 내내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인들에게 암흑의 세계에서 한줄기 빛이 되자는, 용기있고 선한 사람들의 나라가 되자는 미국의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노르망디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언제나 자부심을 느낄 것이고, 늘 준비돼 있을 것이며, 늘 자유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유란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소련의 압제, 그리고 미국의 국력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것은 레이건이 미국에 안겨준 큰 선물이었다.

레이건의 나이 향년 93세였다. 낸시 레이건(80) 여사에게 남편의 죽음은 반세기의 사랑, 그리고 투병과 간병의 고통스런 10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레이건의 나이 향년 93세였다. 낸시 레이건(80) 여사에게 남편의 죽음은 반세기의 사랑, 그리고 투병과 간병의 고통스런 10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각계에서 쏟아지는 애도의 물결에 얼마간 위안을 얻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레이건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도 많지 않다. 그의 장례식은 이번주 의사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뒤이어 워싱턴 대성당에서 추도 예배가 거행될 예정이다. 그후 그의 시신은 사우스 캘리포니아 시미 밸리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의 뜰에 안치될 것이다.

낸시 여사에게 그것은 남편의 ‘긴 작별인사’가 끝남을 의미할 것이다. 그 밖의 미국인들에게 제 40대 대통령의 별세는 미국의 역사라는 대하 드라마에서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불가사의한 지도자의 탄생과 집권에 관한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이 내림을 뜻할 것이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하며 수년간 꽤 선전했다. 그 오랜 싸움의 끝을 앞둔 1990년대 말부터는 어린 시절만 기억할 수 있었다.

기억이 흐려지면서 그는 스포츠 캐스터에서 배우, 주지사에서 대통령으로 살아온 기억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린 듯했다. 그의 가장 생생한 기억은 일리노이주에서 보낸 유년기였다. 그는 LA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방문객들과 이야기할 때나 벨에어의 자택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고향집 베란다에서 어머니에게 신문 읽기를 배운 기억, 형 닐과 놀던 기억, 집을 떠나 교정이 아름다운 유레카 칼리지에 간 기억 등에 대해 말했다. 또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던 록리버에 관한 추억도 기억했다.

LA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에는 이 강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방문객들이 이 사진에 대해 물을 때마다 레이건은 “거기서 인명 구조대원으로 일하면서 77명을 살려냈다”고 말하곤 했다. 한 측근은 “그는 구조대원 시절의 일을 늘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때의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다른 기억이 사라진 때에도 그 이미지만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구조대원은 자라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미국 역사의 행로를 바꿨다. 1981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은 지미 카터가 ‘자신감의 위기’라고 칭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2차대전의 승리와 1950년대의 호황 이후 정점으로 치닫던 전후 미국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계기로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뒤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같은 불행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카터 집권기에는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고 재정적자가 쌓였다. 또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고 이슬람 민병대가 이란 주재 미국 외교관 52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일부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의 임무는 누가 하든 혼자 수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레이건이 칠순에 가까운 고령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알콜 중독증이 있는 중서부 출신의 구두판매원인 아버지와 신앙심 두터운 연극애호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정서적 유대가 없었다. 비평가의 호평을 받은 출연작이 거의 없는 2류 할리우드 배우 출신인 그는 개인으로서는 낙천적이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캘리포니아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국내의 관료주의와 해외의 공산정권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며 보수강경 정책을 폈다.

백악관에 입성한 레이건은 여러 면에서 상충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첫부인과 이혼했고, 종종 자녀들과 불화를 겪었다. 균형 예산을 열렬히 옹호하면서도 실제로는 단 한번도 의회에 균형 예산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골수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냉전 종식에 앞장섰다. 또 그 자신이 엄격한 도덕성을 상징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정부는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그는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으면서도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신봉했다.

그는 자주 문제를 잘못 이해하곤 했다. 복지 지원금 수혜자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가 1980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한 곳은 3인의 인권운동가들이 흑인 차별정책 철폐를 주장하다 살해당한 미시시피의 필라델피아였다. 심각한 불황기였던 1982∼1983년 미국을 통치했고 새롭게 출현한 에이즈 위기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특히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그의 행동은 탄핵당할 수 있는 위법행위에 위태로울 정도로 가까웠다(어쩌면 실제로 위법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레이건은 빌 클린턴이나 조지 W. 부시만큼 국민들의 찬반이 팽팽히 양분된 지도자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퇴임할 때 63%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현재 미국이 당면한 갈등의 정치와 이념적 대립의 뿌리는 레이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레이건 자신은 정치대결의 장에서 멀찌감치 물러선 채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 그의 발언과 정책의 거친 점을 유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재치있고 호소력이 있었으며 대담했다. 1981년 3월 30일 흉부에 저격당한 후 수술실에 실려 왔을 때 그는 의사들에게 “당신들 중에 혹시 민주당원이 있는 것 아니겠지?”라며 농담했다. 수술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아내 낸시에게 “깜박 피하는 것을 잊어버려 사고를 당했소”라고 속삭였다. 1987년에는 분단된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서 “고르바초프는 들으시오. 이 문을 여시오. 이 벽을 무너뜨리시오”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결국 몇년 후 그 장벽은 실제로 무너졌다.

레이건은 프랭클린 델라노어 루스벨트 대통령 이래 가장 백악관을 내집처럼 여긴 대통령이었다. 대중 앞에서 발산되는 그의 품위와 TV라는 매체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기술은 이후 대통령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1989년 그의 대통령 퇴임시 소련은 그의 말처럼 실제로 ‘역사의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재정적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미국 경제도 그런 대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레이건을 좋아했다. 정적들조차 그의 매력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힘은 배우로서의 능력 그 이상에서 왔다. 그는 “어서 덤벼, 한 번 해보자고” 같은 거친 수사를 종종 사용했지만 사실은 그의 지지자나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하는 말은 단호했지만 행동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성향은 그가 할리우드에서 미국 영화배우조합장을 지내던 시절에 얻어진 것이었다.

당시 그는 여느 유능한 노조 협상가들처럼 궁극적으로는 처음 제안했던 것보다 더 적은 것을 얻어내게 된다는 점을 감안해 처음에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야 함을 배웠다. 그가 1983년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86년에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스타워즈’ 우주방어계획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핵무기를 전부 폐기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1987년 그는 냉전시대 최초로 진정한 무기감축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이 구축해 놓은 정치세계에서 살고 있다. 밖으로는 미국의 힘을 과시하고 안으로는 감세정책에 골몰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레이건의 신화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레이건의 행적(특히 1984년 대선에서 월터 먼데일 후보에게 50개 주 중 49개 주에서 압승한 것)은 클린턴의 신민주당 온건노선을 태동시켰다.

레이건의 선례가 없었다면 클린턴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 첫 재선에 성공한 1996년, 의회에서 “거대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레이건 자신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타고 달려와 사기가 떨어진 미국을 구해낸 그의 이야기는 수줍음 많은 소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을 추구한 그의 이면에는 평화에 대한 감상적인 갈망이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실제의 레이건은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세계를 선과 악의 거대한 투쟁으로 보면서도 모든 것이 결국은 좋게 마무리될 것이며,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1920년대 소년 시절 인명 구조대원이었던 레이건은 전체주의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는 소련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역사에서 옳지 못한 방향에 서있다는 것을 개인적인 설득으로 깨닫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헬리콥터에 태워 미국 전역을 구경시키며 집 뒷마당에 있는 수영장과 보트, 그리고 한집에 두대씩 있는 자가용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에게 두나라 체제의 차이점을 인식시킬 수 있다면 소련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런 공상의 단면 속에는 세계를 구하겠다는 그의 꿈과 자신이 수행하려던 주인공 역할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연기하고 꿈꾸는 법을 배웠다. 1922년 겨울 열한살이었던 레이건은 아버지 잭이 문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1965년 회고록에서 당시 “아버지는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못본 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추운 날 밤 레이건의 가슴 속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어머니나 형이 사태를 수습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냥 아버지를 넘어가 침대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지만 손수 아버지를 구했다.

“아버지에게로 몸을 구부렸더니 독한 위스키 냄새가 났다. 나는 아버지 코트 자락을 움켜쥐고 문을 연 다음 아버지를 방안으로 질질 끌고 가 겨우 침대에 눕혔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리고 적어도 레이건 마음 속에서는 모든 일이 다 해결됐다. “며칠이 지나자 아버지는 다시 내가 알고 있었고, 사랑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 허풍많고 유쾌한 아버지로 돌아왔다.” 어른스럽게 위기를 잘 처리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레이건은 전설적인 모험담 속에서 위안을 구했다. 그것은 위인들의 어린 시절에서 흔한 일이다. 부모에게 외면받았던 윈스턴 처칠은 자라면서 상상 속의 삶을 구축해 나갔으며 수천개의 장난감 군인 모형을 모았고 영국의 위대한 군인들 이야기를 읽었다. 레이건은 어린 시절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우주 모험기를 섭렵했다. 또 그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 나갔다.

어린 시절 레이건은 자식이 없던 이웃집 ‘에마 아주머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레이건에게 용돈 10센트와 과자뿐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위안을 주었다. 그는 “아주머니 집에서는 꿈을 꿀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기이한 모양의 가구와 책, 그리고 이상한 향내로 가득찬 에마 아주머니 집 거실의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커다란 흔들의자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모험담과 교회처럼 에마 아주머니도 그에게 폭풍 속의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가 몽상에 잘 빠져든 데는 신체적인 이유도 있었다. 고등학교때까지 그는 자신이 심한 근시라는 사실을 몰랐다. 레이건은 “교실의 맨 앞줄에 앉아도 칠판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수업을 다 알아듣는 척 했고 그에 비하면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경쟁심이 강했던 그는 야구보다는 미식축구를 택했고 힘을 쓰는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미식축구를 할 때는 “공이나 상대방의 얼굴이 잘 안보여 고생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상대 선수를 잡고 쓰러뜨리기만 하면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차 안에서 형 닐은 볼 수 있는 도로 표지판을 자신은 볼 수 없는데 화가 나서 어머니의 안경을 한 번 써봤다. 그는 이렇게 돌이켰다.

“안경을 쓰자 갑자기 선명하고 찬란한 세계가 또렷이 보였다. 나는 나무들이 그처럼 하나하나 뚜렷한 나뭇잎들을 가지고 있는데 놀랐다. 집들은 분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언덕은 하늘과 대비되며 뚜렷한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또렷한 것이라고는 생각과 느낌뿐인 자신만의 세계에 너무 오래 침잠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선생님·친구들 등 자신 이외에는 모두 실체를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몇십년 뒤 낸시 여사는 “레이건은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아무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하지 않는다. 그의 주위에는 벽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나 자신조차 그 벽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삶의 불공평함을 푸념하기보다는 현실을 실제보다 훨씬 덜 심각하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어머니 넬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넬은 알콜중독자인 남편 잭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알콜중독을 비롯해 여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명랑한 표정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레이건은 “아버지가 아내나 자녀들을 학대하는 알콜중독자는 아니었지만 술을 마시면 상당히 무뚝뚝해졌고 어머니가 그의 음주를 나무랄 때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넬은 아들들 앞에서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늘 사람의 좋은 점을 찾으려 했다”고 레이건은 회고했다. 다시 말해 넬은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을 연기로 견뎌냈다. 그것을 자기 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극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레이건은 어머니의 그런 성격을 물려받았다.

레이건은 순전히 자력으로 입신했지만 그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있었다. “우리 가족이 완전히 빈곤층은 아니었지만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레이건은 출세를 위해 자기가 속한 세계를 먼저 정복했다. 그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고, 여름철이면 인명구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유레카 칼리지의 우수한 남학생 클럽에 가입했고, 대공황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포츠캐스터로 취직했으며,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있었던 시카고 컵스 야구팀의 춘계훈련을 취재하면서 우연히 워너 브러더스의 오디션에 참여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한치의 착오도 없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의 생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연기 재능은 어머니가 물려준 선물이었다. 어머니는 일리노이주에서 독후감 발표 대회 및 연극 공연을 주최했다. 어머니는 어느날 밤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웅변을 시켰다. 수줍음이 많던 레이건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쟁심이 그를 부추겼다. “형은 이미 여러차례 웅변을 해서 인기가 좋았다”고 레이건은 돌이켰다. 그래서 자신도 해보기로 했다. “그날 밤 용기를 내 무대로 올라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내 생애의 첫 연기를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청중은 내 말에 웃고 박수를 쳤다.”

그의 앞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무대 위에서는 아버지의 알콜중독은 문제되지 않았다. 또 그의 나쁜 시력과 가족의 방랑벽 때문에 갖게 된 수줍음도 관중의 따뜻한 환호 속에서 저절로 녹아버렸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난 그런 경험이 무척 좋았다. 어린 시절의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나에게 관중의 환호는 달콤한 음악 그 자체였다”고 레이건은 말했다. 그는 그 이래 할리우드에서,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바로 그런 환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할리우드에서 그는 B급 영화(활달한 첩보원 브래스 밴크로프트역을 맡아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에서 배우 훈련을 마친 다음 인기있는 중간급 스타가 됐다. 레이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배우라는 직업의 많은 부분이 겉치레와 비현실적인 역할의 해석에 매달려 있다. 따라서 배우는 깨어 있는 시간중 적어도 절반은 공상이나 리허설 또는 촬영에 할애해야 한다.”
레이건은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지만 배우로서 자부심은 있었다. 몇년 뒤 그는 자신의 전기작가 루 캐넌에게 자신이 한 연기에 대한 비판(그의 1951년 코미디 영화 ‘베드타임 포 본조’를 조롱한 것을 말한다)이 “노출된 신경을 건드리는 것처럼 아렸다”고 털어놓았다.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 레이건은 영화활동 덕분에 할리우드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1940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레이건은 이미 한차례 실연의 슬픔을 맛보았다. 그의 고교시절 연인 마거릿 클리버는 국무부 직원과 눈이 맞아 레이건을 저버렸다. 그녀는 레이건이 준 남학생클럽 배지와 약혼반지를 우편으로 되돌려주었다.

“내 어머니처럼 그녀는 적갈색 머리카락에 키가 자그마하고 예뻤으며 지성적이었다”고 레이건은 돌이켰다. 그는 완전히 낙담했지만 늘 그렇듯 그 아픔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다. “내면의 무엇인가가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래도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마거릿이 나를 버린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그녀가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더이상 사랑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와이먼이 그 빈자리를 채워줬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평범한 로맨스의 정석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혼은 부분적으론 할리우드식 언론 플레이의 결과였다. 두 사람은 영화 ‘브러더 래트’를 찍으면서 만났고, 가십 칼럼니스트인 루엘라 파슨스가 둘 간의 관계를 부추겼다. 그들은 41년 딸 모린을 낳았고, 레이건이 컬버시티에서 문선대 복무를 마친 뒤에는 아들 마이클을 입양했다. 훗날 그들은 딸 크리스틴을 잃기도 했다. 레이건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폐렴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입원한 레이건은 자신이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나는 간호사에게 지쳐서 더 이상 숨을 못 쉬겠다고 말했는데 그때가 밤 몇시였는지 모르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흔히 알려진 두 사람의 이혼 사유는 이렇다. 와이먼은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레이건은 영화배우 생활이 잘 안 풀리면서 정치와 영화배우조합장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레이건이나, 와이먼도 자신들의 파경에 대해 수십년간 공식적으로 일체 함구하면서 품위를 지켰다. 레이건은 두 사람간에 어떤 어려움도 느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리처드 닉슨 당시 하원의원이 이끌던 하원 반미 활동위원회에서 증언한 뒤 캘리포니아로 돌아왔을 때 와이먼이 이혼을 추진 중임을 알았다. 고교 시절 애인 마거릿 클리버와 헤어질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상처는 입었지만 늘 그랬듯 자신을 추스른 뒤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또 그로 하여금 인생의 역경 속에도 웃고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침착함과 안정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레이건이 에마 아주머니 집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집 베란다에서 모친에게 신문 읽기를 배우면서, 또 록 리버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갖게 된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자신이 즐겨 읽던 영웅담 속의 주인공 중 한명이 돼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에겐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찾아 왔다. 레이건은 믿을 수 없는 부친을 두었지만 고교 및 대학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또 대공황이 한창일 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구했다. 또 두차례 실연도 경험했지만 52년엔 낸시 데이비스와 결혼했다. 낸시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레이건은 영화배우 생활은 잘 안 풀렸어도 TV 출연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위의 소개로 낸시를 만난 레이건은 그녀의 웃음을 좋아했다. 레이건에게 낸시는 질서·사랑·안정, 그리고 전진을 의미했다.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는 한때 “만일 레이건이 첫 결혼을 낸시와 했더라면 그는 아카데미상을 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했을 당시 레이건은 이미 배우 생활을 접은 상태였다(딸 패티는 결혼 7개월 후에, 아들 론은 58년에 태어났다).

그 후 8년 간 레이건은 매주 일요일 밤 방송되는 TV 프로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의 진행자로 미국인들의 안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기술 발전 탓에 쫓겨나고 말았다. 62년 컬러 서부극 ‘보난자’가 등장하면서 그가 출연하던 흑백 프로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모친이 주최한 연극 공연무대에 선 이래 최초로 일자리를 찾는 신세가 됐다.

레이건은 정치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30년대 당시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우상’으로 삼았으며 민주당 대선후보 해리 트루먼의 선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공주의, 높은 세금, 그리고 그가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의 진행자로 일하면서 갖게 된 정부의 규제에 대한 우려는 그를 우파로 기울게 했다. 공화당은 64년 10월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지지부진하자 레이건에게 30분짜리 대국민 연설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40년이 지난 요즘에 봐도 그는 매우 젊고 똑 부러지며 자신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넘치는 듯하다. 그 후 25년 간의 공직 생활을 거치면서도 그런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결국 린든 존슨이 골드워터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캘리포니아의 재계 인사들은 66년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운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상대는 막강한 민주당 현직 주지사 에드먼드 (팻)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은 레이건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최초로 저지른 정치인이었다. 레이건은 영화 ‘누트 로크니, 올 아메리칸’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인 미식축구 코치 조지 ‘기퍼’ 깁의 이미지를 활용하고픈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기퍼’ 레이건은 미국 정계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교외 거주 보수주의자들의 상징인 동시에 그 세력의 결집자였다. 66년 주지사로 선출된 그는 보수주의의 새로운 얼굴이 됐다. 67년 뉴스위크는 ‘레이건, 서부에서 뜨는 별인가’란 표지 제목을 달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예스’였다. 이듬해 그는 주지사 임기를 2년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도 마이애미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을 이길 뻔한 저력을 보였다. 그 후 몇년 간 그는 자신의 전략을 가다듬으며 대권 도전을 준비했다. 많은 정치 제휴 세력들이 그렇듯 레이건의 정치 제휴도 절충주의적이었다. 그는 감세에 관심 있는 부유층 공화당원과 복음파 개신교도, 그리고 60년대의 혼란상에 불만을 품은 전통적 민주당원들을 규합했다. 레이건은 특히 남부에서 흑인들의 평등운동이 지나치다고 느낀 보수파 백인을 공략한 닉슨의 ‘남부전략’을 물려받았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의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주지사 역은 맡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재치있게 응수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똑 부러지게 일처리를 했고, 의사소통에도 능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특유의 엄격한 일처리 방식을 고수해 일명 ‘아야툴라’(이슬람 종교 지도자)로 통하는 민주당의 진보파 의원 윌리 브라운은 레이건에 대해 자신이 함께 일해본 주지사 중 유일하게 제때 일처리를 한 사람으로 회상했다. 76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레이건의 도전을 받은 제럴드 포드는 레이건에 대해, 회의가 끝난 뒤 언론 보도자료에 들어갈 적절한 문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인물로 기억했다.

76년이 되자 그는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일에 지쳤고, 포드 대통령이 소련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팽팽한 접전을 펼친 예비선거에선 포드가 승리했지만 포드는 보수주의자들, 특히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지미 카터에게 매료된 보수파 기독교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레이건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포드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레이건의 정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듯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그는 4년 뒤인 80년이면 69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미 역대 최고령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그 나이에 은퇴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80년 레이건이 카터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사전에 예견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이건은 아이오와주 당원대회에서 조지 부시 1세에게 패했지만 나중에 만회했다. 본 선거 1주일 전인 10월 28일까지도 레이건과 카터는 각종 설문조사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그러던 중 클리블랜드에서 후보 토론회가 개최됐다.

단 한차례 열린 이 토론에서 레이건은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첫번째 공격은 카터가 레이건이 노인·장애인의료보험(메디케어)의 축소를 바란다고 비난하자 레이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분노하기보다 유감스럽다는 어조로 “또 똑같은 얘기를 하시네요”라고 말한 것이다(레이건은 실제로 메디케어의 축소를 원했지만 유권자들이 기억한 것은 그같은 사실이 아니라 레이건의 극적인 몸짓이었다). 토론이 끝날 무렵 레이건은 간단한 두개의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4년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습니까. 미국이 예전만큼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인플레이션과 금리 문제, 이란 인질극 사태에 시달리던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 마지막 주 레이건은 우위를 확보했고 결국 압승을 거뒀다.
레이건은 말 그대로 ‘백악관 체질’이었다. 낸시는 “남편은 대통령직에 크게 만족했다. 공식 행사와 회의에 참석하거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의사결정·책임감·협상 등 대통령직에 수반되는 그 모든 것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들을 믿었다. 예컨대 그는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를 혼동해 나무가 공해를 유발한다고 믿었다. 레이건의 전기를 집필한 루 캐넌에 따르면 콜린 파월 당시 국가 안보보좌관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전세계 국가가 사이 좋게 지내게 된다는 ‘초록색 외계인’론을 레이건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때면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재미있는 발상으로 받아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핵무기 통제권을 가진 대통령이었기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국내 정책은 다수가 실패로 돌아갔다. 레이건은 감세 결정을 내리고도 지출을 줄이지 못해 적자예산을 운용했고, 퇴임시엔 1천5백25억달러의 재정적자를 남겼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그의 재임기간 중 무려 세배 증가했다. 그같은 결과는 90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수뇌부가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가진 회담에서 발표됐다. 그러나 레이건은 이미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덕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88년에 내건 선거공약을 깨고 다시 세금을 올리는 결정을 내려야 했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지지도 함께 잃었다. 국가적으로는 득이 된 이 결정(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를 계기로 클린턴 재임기간 중 호황을 구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이 부시에겐 악재로 작용했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인종과 관용이란 문제에선 상당수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느꼈던 것 같다. 레이건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인종적 특혜, 빈곤층을 위한 지출, 공권력 남용, 홈리스 문제 등에 대한 자신의 불분명한 태도가 무관심이나 심하게는 노골적인 적대심으로까지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에게 비친 레이건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즐겨 말하던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좀 더 신경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고무적인 말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마리오 쿠오모는 ‘빛나는 도시’라는 레이건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용해 그에게 역공을 가했다. 쿠오모는 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 현관과 공식 별장의 베란다에선 모두가 잘 사는 ‘빛나는 도시’밖에 안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빛나는 도시 옆에 또 다른 도시가 있다. 그곳에선 주택융자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 주택융자를 받을 형편조차 안되는 젊은이들이 산다. 또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 자녀들을 위해 키웠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부모들이 산다.” 그것은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레이건이 말하는 미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레이건은 냉전시대 전사의 상징으로 권력을 잡았다. 소련에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편 닉슨·키신저·포드 시대에 대해 회의를 느껴 우주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군사력 강화에 열정적이었던 레이건은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분명히 전하려 했다. 매파 인사들은 이를 반겼지만 비둘기파는 크게 반발했다.
매파와 비둘기파 양 진영은 만일 좀 더 냉철한 시각을 가졌더라면 레이건의 접근방식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명명한 83년 바로 그해, 조지 슐츠 당시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아나톨리 도브리닌 미국 주재 소련 대사를 불러오게 해 비밀회담을 가짐으로써 제2의 데탕트를 가능케 한 조용한 대화 채널을 마련했다. 당시 소련이 굴복하게 된 원인을 두고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레이건의 추종 세력들은 레이건의 단호한 언변과 군사력 증강을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소련은 본질적으로 나약했으므로 80년 카터가 재선에 성공했다 해도 언젠가는 내부적으로 붕괴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진실은 그 중간 어디엔가에 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공산주의와 민주자본주의간의 “오랜 여명의 투쟁”이라고 부른 것에는 많은 것들이 변수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명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어구상(SDI)의 추진 등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적인 외교전을 펼치는 레이건의 양동작전이 소련 전체주의의 멸망을 가속화했을 가능성은 크다. 레이건에겐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개인적 친분도 중요했다(이를 바탕으로 그는 80년대 중반 무장해제를 위한 양국 회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소련의 개혁에 힘썼던 고르바초프도 처음엔 배우 출신의 레이건을 미심쩍어 했지만 나중엔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이같은 냉전적 사고로 인해 재임 기간 중 최대 사건인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터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불법으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해 얻은 수입으로 니카라과 반군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레이건은 아마도 세부사항은 잘 몰랐을 것이다. 세부 사항은 본래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레이건 대통령이 세부사항을 싫어한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백악관이 위법행위를 저지름으로써 통치권에 대한 헌법상의 위기를 불러 왔다. 이란-콘트라 스캔들과 관련해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동기는 순수했을지라도 그가 선택한 수단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황은 절박해졌다. 레이건이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제의하기 위해 하워드 베이커 전 상원의원(테네시주) 집으로 전화하자 베이커의 아내가 전화를 받아 “남편은 손자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간 터라 집에 없는데요, 각하”라고 말하자 레이건은 “내가 그를 위해 더 흥미로운 동물원을 생각해뒀다”고 재치있게 대답했다.

베이커는 도널드 리건의 후임이었다. 사실 낸시 여사에게 해고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리건은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리건은 레이건의 재임 기간 중 출간된 저서를 통해 영부인이 샌프란시스코의 점성가 조앤 퀴글리와의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 대통령의 공식 일정을 짰다고 폭로했다. 낸시 여사는 81년 남편에 대한 저격 사건 이후 점성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변명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살다가 나이가 지긋해서 대통령이 됐고, 스캔들에 연루돼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문제까지 거론되는 마당에 이 사건은 레이건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레이건은 주위의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고르바초프와의 군축 협상 타결과 굳건한 경제에 힘입어 그의 지지도는 88년이 다가오면서 다시 회복됐다. 조지 부시 1세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던 레이건은(80년 대선 당시 포드를 러닝메이트로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88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부통령이었던 부시의 선거운동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4년 뒤인 92년 부시가 세금 인상과 지나치게 중도로 돌아선 듯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보수파로부터 공격을 받자 골수 보수진영 간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레이건이 부시를 러닝메이트로 택한 뒤 “내가 80년 대선 때 크게 실수한 것 같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게 연설문 작성자인 존 포드호레츠의 회고록 내용이다.

1백% 믿을 수는 없지만 레이건은 고향 목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고 수년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은퇴의 즐거움도 비극적으로 짧았다. 9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지겨운 듯 대중들과의 말을 삼가며 이례적으로 지쳐보였다. 그같은 모습은 그가 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당시 보였던 활기찬 태도와는 천양지차였다. 당시 그는 지지자들의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모르자 재치있게 “이러다간 프라임타임대가 다 지나가고 말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2년 후 처음으로 보인, 노인이 된 듯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건망증도 더 심해졌다. 91년 브리태니아호 선상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만찬을 가진 후 그는 카페인 없는 커피를 구하는 데만 정신을 팔아 한동안 만찬장 분위가 어색해졌다(이 장면은 B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촬영했다). 여왕이 “우리도 노력은 한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낸시는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었다. 94년 워싱턴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연설 도중 더듬거린 것이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원인은 알츠하이머병이었다. 94년 11월 5일 레이건은 검은 펜을 들고 국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 선 ‘기퍼’가 보여주는 우아하고 대가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 때가 언제가 되든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는 정녕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영원히 낙관하며 떠날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나를 내 인생의 황혼으로 인도할 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항상 밝은 여명이 미국의 앞날에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내 친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늘 주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그는 벨에어의 세인트 클라우드 드라이브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사무실에도 들르고 샌타 모니카 부둣가도 산책하며 골프도 했다. 나중엔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레이건의 힘과, 생존에 대한 원초적 의지는 놀라웠다. 고관절 골절에서 회복됐고, 버티고 또 버팀으로써 그는 해마다 살아 남았다. 정신이 병에 굴복한지 한참 뒤에도 그의 몸은 생명을 위해 싸웠다.

그는 일생 동안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의 상상력은 크든 적든 수십년간 그를 지탱해준 삶의 원동력이었다. 50년대 7월의 어느날 뉴욕 맨해튼 59번가와 5번가 사이 모퉁이의 셰리-네덜란드 호텔에서 쓴 놀라운 편지에서 레이건은 인생의 고단함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승화시키는 재능을 보여줬다. 그는 배우로 일하기 위해 혼자 뉴욕에 왔고 식사도 혼자 해결해야 했다. 나중에 호텔로 돌아온 그는 낸시에게 자신이 함께 했었으면 하는 저녁에 대해 편지를 썼다.

“비둘기 배설물로 가득한 이 메트로폴리스에는 8백만명이 살지만 갑자기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고 보니 그들에게서도 역겨운 냄새가 나는구려. 시간은 해결책이 아니었소. 이윽고 저녁 시간이 되자 나는 ‘21’로 걸어가 혼자 쓸쓸이 끼니를 때웠소. 자기 연민이 엄습하는 순간 갑자기 당신이 내 테이블로 다가왔소. 그렇지, 당신과 나는 로스트 비프를 들었지… 와인 반병만 주문하고 싶었던 우리에게 선택의 폭은 제한돼 있었지. 그러나 우린 와인 웨이터가 권하는 술을 거절했지… 그리곤 47년산 ‘피숑 롱그빌’을 택했지. 맛은 참 좋았지?”

식사 후 레이건의 상상력은 계속 이어졌다. “우린 황혼 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갔고, 거기서부턴 글로 적으면 안 될 내용인 것 같아. 단지 내가 오늘 아침 나의 대사를 못 외운 상황이라고만 말해두지. 오늘 밤 우린 그냥 호텔에서 식사를 할까 해. 그리고 당신은 내가 잠시라도 공부하도록 놔둬야 해. 사람들은 나와 당신이 3천마일 거리를 이렇게 쉽게 건너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참 자연스럽지 않아? 남자는 심장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당신은 나의 심장이야. 가장 좋은 것이 당신이고 그래서 내게 필요하지. 당신이 없으면 삶도 없어. 그런 삶은 원치도 않아.”

낸시는 50년 이상 그래왔듯 이번주도 그의 옆을 지킬 것이다. 워싱턴에서 의식이 끝나면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의 석양이 비치는 가운데 베를린 장벽 기념물 근처의 언덕에 편안히 묻힐 것이다. 그럼으로써 1911년 겨울 일리노이주의 한 조그만 집에서 시작된 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것이다. 그의 무덤은 미국에서 매일 저녁 태양이 지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선 이미 어둠이 깔릴지라도 대륙 서쪽 끝에서는 여전히 빛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얼마나 레이건다운가. 태양의 마지막 한줄기 빛까지 머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낮을 음미할 수 있다니 말이다.

With ANDREW MURR, ELEANOR CLIFT, TAMARA LIPPER,
KAREN BRESLAU and JENNIFER ORDO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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