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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주의자의 ‘원칙’ 도마에 오른다

원칙주의자의 ‘원칙’ 도마에 오른다

1970년대 이래 관주도 사회개혁 운동의 상징이었던 새마을기가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건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데는 1996년 10월 서울시의 결정이 촉발제가 됐다. 당시 서울시는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서울시청과 산하 본부 및 사업소 게양대에서 새마을기를 퇴장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재직했던 이해찬 총리 지명자는 “새마을 운동의 의미가 퇴색하고 시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마을기를 게양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서울시의 이같은 결정은 타 시·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기초 자치단체들에 파급됐다.

그 후 1998년 DJ 정부가 출범하면서 초대 교육부 장관에 이해찬 총리 지명자가 임명됐다. 보수 논조를 대변하는 ‘한국논단’의 이도형 발행인은 그해 7월호에서 다음과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 “새마을기는 ‘근면·자조·자주’의 정신으로 ‘가난으로부터 해방’을 기하자는 ‘박정희 정신’의 산물이었다. 이해찬 당시 정무부시장은 그런 의미와 상징을 없앤 셈이다. 운동권 출신 이해찬씨는 생각했던 것처럼 ‘역시’하고 수긍할 만했다. 그 이해찬씨가 이번에는 새 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됐다. 이번에도 ‘혹시’하는 의심이 부쩍든다”고 구구절절 경계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그런 이해찬 열린우리당 의원이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 후보에 지명됐다. 그는 보수세력들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좌절이나 굴절도 겪지 않고 승승장구해왔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뉴스위크 한국판의 질문에 이도형 발행인은 “이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응은 어땠을까. 박대표는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정몽준 의원의 연대 제의를 끝내 물리쳤다.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가 정의원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하는 게 매우 못마땅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신’의 산물인 새마을기를 전국 지자체에서 사라지게 한 이지명자가 지난 6월 9일 한나라당 당사를 찾았다.

박대표는 웃으며 “나라의 큰 일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이니 국회에서 잘 검증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을 뿐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 야당인 민주당의 한화갑 대표는 “(이지명자는) 5선 의원으로 준비된 총리”라고 평가했고, 김학원 자민련 대표도 “나라가 어려운 만큼 국익에 최우선을 둬 달라.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조차 반란표가 우려되던 김혁규 전 경남지사와는 달리 이지명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노골적인 반대 그룹이 없는 상황에서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지명자가 피할 수 없는 혹독한 검증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 출신으로 한나라당측 인사청문특위 위원인 이군현 의원은 “총리로서의 국정 총괄 능력과 도덕성, 그리고 교육부 장관 재임 당시의 교육정책 등을 철저히 검증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선교 한나라당 대변인 역시 “교육부 장관 시절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긴 인물을 총리 후보에 지명한 것은 의외”라며 이지명자의 공과를 철저히 따지겠다고 벼르는 모습이다.
이지명자의 품성과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특히 교육부 장관 재직시 단행한 교육개혁 정책의 공과를 둘러싸고서는 ‘탁월한 교육개혁가’에서 ‘교육 붕괴의 원흉’까지 찬반 양론이 팽팽할 정도다. 총리 지명 소식이 알려진 직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일제히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은 교사들에게 그가 ‘비토인물’임을 실감케 했다.

이지명자는 교육부 장관 재임 시절 교원 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단축하면서 교원들의 반발과 만성적인 교원 부족 현상을 가져왔다. 또 ‘촌지 거절 교사 우대 제도’는 교사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안겼다. 그러나 강제적인 야간 자습을 없앤 것이나 전교조 합법화, 교사 체벌 금지 등은 많은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는 “국민의 정부에서 이해찬 장관 말고는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소신을 높게 평가했다. 교육부 관리들도 워낙 방대하고 민감한 교육개혁 정책을 이지명자만큼 과감하게 추진한 인물도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교육계의 현실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채 교원 정년을 졸속적으로 단축한 것이나, 교원들을 교육의 주체로 내세우지 못하고 갈등을 빚은 것은 되풀이돼서는 안 될 시행착오다. 한나라당 등 야당의 주요 공략 포인트도 이 부분에 모아지고 있다. 총리로서의 자질과 국정 수행 능력을 중점적으로 파헤치는데 개혁의 기조 등 과거의 정책적 오류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듯이 정책에 대한 평가는 관점과 가중치 부여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로 총리 인준을 일사불란하게 거부하기엔 명분이 떨어진다.

‘정치인 이해찬’에 대한 논쟁도 뜨거울 전망이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 이후 내리 5선을 했다. 기획력이 탁월해 14대 대선에서부터 16대 대선까지 대선기획단에서 기획 업무를 도맡아했다. 부당한 사안에 대해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가려야 할 정도로 원칙이 분명하고 성격이 대쪽이지만, 이는 역으로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나라당은 ‘이해찬’이라는 상품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넘어서 국무총리직에도 합당한가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가 2002년 8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면제 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쪽에서 대정부 질문 때 떠들어달라고 요청했다”며 이른바 ‘병풍 유도’발언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지명자는 국민의 정부 시절 소장파 정풍 운동에 부정적 견해를 밝혀 석연치 않은 뒷맛을 남겼고, 교육부 장관 시절 자녀의 과외 문제가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원칙’의 정치인이라는 대목에 의구심이 가는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공격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지명자가 동료 의원, 관련 업체 임원들과 함께 국정감사를 앞둔 시점에서 정보화촉진기금을 배정받아 해외 시찰에 나선 것도 정치인의 윤리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2001년 8월 당시 민주당의 이해찬 정책위의장과 김효석 의원,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원철희 자민련 의원 등 국회·정부·통신 관련 업체 관계자 20여명은 해외 정보기술(IT) 시찰단을 2개조로 나눠 각각 12박 13일, 14박 15일 일정으로 미국과 유럽 각국을 다녀왔다. 이들 의원의 해외 시찰에는 교육부 차관보, 총리실 심의관, 우정사업본부 실장, 과기부 국장 등의 공무원과 한국통신 부사장 및 SK텔레콤·KTF·LG텔레콤의 상무가 동행했다. 이지명자는 이한구 의원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때 사용된 경비 1억9천만원은 정보통신부의 정보화촉진기금에서 지출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통신 등 민간 업체 임원들의 경비 역시 국가에서 부담했을 가능성이다. 한국통신·KTF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는 8월 중 임원들의 해외 출장 경비가 잡혀 있지 않았다는 게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 정통부는 정보화촉진기본법에 따라 공직자 해외 대학 단기 연수 과정에 6억5천만원의 예산을 책정했으며, 이들 시찰단을 위해 ‘IT 인력 양성 최고 정책 결정 관계자 해외 연수사업’ 명목으로 예산을 추가 배정했다.

김효석 민주당 의원은 “각 정당의 정책위의장단, 정부·업체에서 IT 정책 수립을 주관하는 인사들이 팀을 만들어 IT 선진국 시찰에 나선 것은 의미있는 행사로 탓할 바 아니다”면서도 “그때 정통부의 정보화기금이 아니라 국회 예산으로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은 해외 시찰단에 당시 여당의 정책위의장인 이지명자가 참여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출장 경비를 정통부에서 부담하게 된 경위와 민간 업체 참여 동기, 현지에서의 활동 등을 집중적으로 따질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인사청문회에서는 교육정보화 사업과 관련해 여지껏 업계에서 음성적으로만 제기되던 정경유착설도 한번 걸러질 공산이 크다. 한나라당은 이지명자의 교육부 장관 시절 추진된 ‘초·중등학교 종합정보관리시스템(CS)’ 사업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중에 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1천4백70억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돼온 이 사업이 한번도 실용화되지 않은 채 용도폐기됐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입찰을 통해 교육부와 CS 서브에 들어갈 소프트웨어 공급 계약을 맺은 특정 업체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는 주장에 대해 한나라당이 검증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업계의 사정을 잘 아는 복수의 관계자들은 “교육부 내에서 특정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맥과 지연이 CS 사업에 개입됐을 개연성이 있다”며 구체적 인물과 해당 학교를 거명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공급한 해당 업체에서는 “그런 루머는 있어 왔으나 사실과는 무관하다”면서 “경쟁에 뒤처진 업체에서 그런 푸념을 늘어놓을 수는 있다”고 일축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 사안이 불거진다면 교육부와 관련 업체에는 한바탕 소용돌이가 불가피해진다.

정작 한나라당 등 야권이 심각하게 보는 대목은 이지명자의 인성과 스타일이다. 강성으로 분류되는 노대통령을 보좌해 내각을 총괄하면서 국민 통합을 일궈낼 경륜과 능력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현 정권의 경제 정책 사령탑인 이헌재 경제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과도 악연 아닌 악연을 맺고 있다.
2000년 5월 국회 귀빈식당에서는 당시 여당인 민주당과 재경부간 당정회의가 열렸다. 당쪽 대표이던 이해찬 정책위의장이 당시 이헌재 부총리 등 재경부 간부들을 ‘실패한 관료’로 매섭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살벌한 풍경이 펼쳐졌다. 당시는 증시·환율·금리 등 경제 분야에 대한 총체적 불안감이 조성될 즈음이었다. 이지명자는 회의에서 “환란을 당하고도 금융시장 불안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며 “당신들은 우수한 관료라는 생각을 버려라”고 호통쳤다.

이지명자는 이어 “정부가 혼선을 빚으면 당은 당론을 모을 수 없다”면서 “나를 ‘물’로 보지 마라. 내가 있는 한 당은 그럴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날 이부총리는 이지명자의 질책이 끝나자 짤막하게 “죄송하다”고 답변했다. 이부총리는 회의가 끝날 즈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이로부터 5개월 뒤인 10월에는 같은 당정회의에서 진념 재경부 장관이 이지명자를 비롯한 당측 인사들을 향해 “나는 괜찮지만 공무원들을 데려다 질책만 하려면 앞으로 회의에 안나오겠다”고 언성을 높이는 등 당정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인사청문특위 위원인 김재원 한나라당 의원은 “그 사건의 주역이자 지금도 개성이 강한 이지명자와 이 부총리가 팀워크를 잘 이뤄낼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다섯번에 걸쳐 총선을 치른 이지명자가 수많은 정적으로부터 온갖 형태의 공격을 받아왔음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도 그의 지구당이 있는 서울 관악을 선거구에서는 ‘이지명자의 형제가 책방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모 경찰서 의경의 뺨을 때렸다’, ‘고교 동문 선배인 경찰 고위 관리를 면전에서 무안을 줬다’는 등의 소문들이 떠돌고 있다.

우선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털어봐도 나올 게 없으리라는 게 이지명자 측의 확고한 입장이다. 1989년부터 이지명자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해 온 임현주 관악구의회 의원은 재산 관련 소문에 대해 “선거철만 되면 나오는 단골 메뉴”라며 “그게 사실이라면 진작에 언론에 기사화되든지 상대방이 공개석상에서 폭로했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지명자가 경륜과 내공을 바탕으로 관문을 능숙하게 통과할지, 예기치 않은 복병에 난파될지 결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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