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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성공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EU는 성공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Europe's Slow Triumph

요즘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럽연합(EU)에 대한 혐오’ 외에는 공감대가 전혀 없어 보인다. 이번주 더블린 정상회담에서 채택될 유럽헌법부터 살펴보자. 유럽헌법은 오랫동안 싹수가 노랗게 보였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기적이지만 앞으로 있을 개정과 각국의 국민투표에서 과연 온전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영국 외교관들은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에서 세금·사회복지·외교·범세계적 범죄 퇴치 등에 대한 EU 정책의 수정을 주장하고 있다. 크고 작은 유럽국가들이 모두 의석수 할당을 놓고 끊임없이 의견차를 빚고 있다. 일부 유럽인들은 신의 이름(다시 말해 가톨릭의 천주)을 헌법 서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주에는 유럽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언제나처럼 토론 수준도 형편없고 투표율도 낮은 실망스러운 선거였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외국인·EU 행정관·터키인, 그리고 EU 의원들이 받게 될 특전 등을 비난하는 우파들이 강세를 보였다. 평소 차분한 영국에서조차 이번 선거에서 EU 탈퇴를 주장하는 영국독립당이 크게 약진했다.
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가? EU 지도자들은 지난 5월 1일 회원국을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터키의 EU 가입이라는 정치적 화약고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1억명의 이슬람 신자들이 유럽에 통합될 수 있을까? 옹호론자들조차 터키의 정회원 가입에는 회의적이며 설사 가입한다 해도 15∼20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공동 외교정책이라는 유럽 통합의 ‘성배’(聖盃)를 꿈꾸는 사람은 더욱 줄었다. 과연 그럴까?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미디어에서 인기 있는 극단주의 인사들의 유세, 농업 보조금을 둘러싼 외교 분쟁, 신의 이름을 둘러싼 갈등 등은 기삿거리로는 좋지만 금세 잊혀지는 것들이다. 이번주의 유럽헌법안 채택도 오래 진행돼온 일을 하나의 문서로 구체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듯 EU는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하나씩 하나씩 매듭을 지어가며 유럽과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EU는 1백년 전 사회민주 복지국가가 부상한 이래 최초로 완전히 새로운 정치 구조를 갖추고 등장한 독특한 조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U는 회원국 정부들과 하나의 국제 기구 사이의 권력 공유 수단으로서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갖춘, 복잡하지만 효과적인 조직으로 진화해 왔다. 따라서 정책은 고통스러운 합의 과정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다. 25개 회원국의 70%, 집행위원회, 그리고 직접 선거로 선출된 유럽 의회가 한가지 법에 동의했을 때만이 안정된 합의가 얻어진다.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회원국 정부들은 단일 통화를 추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발적 연합’으로만 일을 추진한다.

EU가 무슨 일을 추진할 때 항상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변화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뤄져 결국 혁신으로 이어진다. 지난 50년에 걸친 이런 과정을 통해 관세와 쿼터제가 철폐됐고 각종 규제 장벽과 국경의 출입국 통제가 사라졌다. 이제 유럽의 에어버스사는 미국의 보잉사를 앞서고, 유럽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갈릴레오는 미국이 개발한 GPS를 능가한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하비에르 솔라나 EU 외교안보 담당 집행위원이 동등한 입장일 수 없지만 로버트 죌릭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와 파스칼 라미 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은 통상과 경쟁 정책 분야에서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물론 ‘유럽’은 외교 정책에서 뒤져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EU는 10개국을 회원으로 추가 가입시켰고 현재 몇개국은 가입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는데는 15년이나 걸렸지만 그 결과를 보라. 나라마다 선거에서 유럽인이 된다는 약속 하나만으로 뭉친 연합세력에게 민족주의 세력은 패했다(현재 발칸 반도와 터키에서 같은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0년간 서방 국가들에서 추진된 그 어떤 정책도 이보다 더 민주화, 세계평화 및 안정에 기여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이라크전을 두고 분열됐지만 이제는 선제 개입이 다국적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 아래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이란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실시하도록 종용했다. 게다가 원조·평화유지·국제감시·국제법 문제에서도 미국은 유럽을 능가할 수 없다. 현재 EU가 파견한 부대가 보스니아에서 미군·유엔군을 대체하고 있고, 전세계에서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는 EU군의 규모는 이라크 주둔 미군 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계속 EU를 무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단호한 군사행동, 일방적 기준, 중동의 ‘민주화’에 대한 무모한 낙관주의 같은 미국 방식이 정말 더 나은 것일까? 한 세대 뒤의 역사가들은 이라크전의 실수를 돌이켜보며 구시대 정책의 최후 산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조용한 점진주의는 승리로 판명될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하버드대의 EU 프로그램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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