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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산업시설에 ‘지진 경보’

동해안 산업시설에 ‘지진 경보’

어떨 때는 이 나라에 원자력 발전소만 있는 것 같아요. 정작 지진에 취약한 시설은 나몰라라 하면서 그나마 사전 준비가 철저한 원전만 집중적으로 때려대거든요. 원전이 동네북은 아니잖아요.” 정부 내 원전 관계자들이 갖는 불만이다. 이들이 보기에 무차별적인 지진의 공격에 피해를 입기 쉬운 쪽은 원전이 아니라 오히려 내진설계가 허술한 산업시설일 수도 있다. 국내에 처음 내진설계가 도입된 때는 1972년이다. 국민의 안전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원전시설에 대해서는 건설 초기부터 내진설계가 도입됐다. 산업시설 등 일반 구조물에 내진설계가 의무화된 때는 고작 1988년이다.

한반도의 등뼈를 끼고 있는 동해안 일대에서 강한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울진과 월성·고리 등 영남권 해안에 줄지어 있는 원전 12기가 정상 가동되는지, 지진 피해로부터 안전한지 우선 살펴봐야 마음을 놓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원전에 사소한 이상징후라도 발견되면 국민들의 ‘안전의식’은 매서운 채찍으로 돌변한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국립방재연구소의 정길호 박사는 “원전의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원전은 내진설계와 시공·운영단계별로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라며 “오히려 내진설계 도입 전에 건설된 산업시설, 각종 국가 기간시설들이 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최근 들어 발생하는 지진의 강도와 빈도는 예년과 비교해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5월 29일 경북 울진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5.2의 지진은 1978년 속리산 지진과 함께 남한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지진으로 기록됐다. 또 기상청은 9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20회에 달하던 지진이 90년대 후반부터 40회로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지진 증가에 대해 기상청의 우덕모 지진담당관은 첨단 관측장비 도입과 관측망 증설이 지진 관측 능력을 제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증가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진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는 이희일 박사는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닌 것으로 점차 드러나고 있어 국가 차원의 재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박사는 지난 5월 울진에서 발생한 지진이 서울 인근에서 발생했다면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독일 포츠담 지구물리연구소의 최승찬 박사 역시 “한반도는 주변 네가지 지각이 몰리는 힘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며 “이들 힘 가운데 한쪽의 힘이 강해지거나 약해지면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한반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포항-울산-온산으로 이어지는 남동 임해 공업지역에는 주요 산업시설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포항에는 포스코라는 세계적인 철강회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울산·온산지역에도 삼성석유화학·S-OIL·이수화학 등 석유화학시설들이 가동중에 있다.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측은 “이들 간판 기업은 진도 5에서 6 이상의 강진을 이겨낼 수 있는 내진설계 기준에 따라 건설됐다”고 밝혔으나 “석유 비축시설·저장시설과는 달리 석유 정제시설은 따로 규정된 내진설계 기준이 없다”고 덧붙였다.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태는 더 심각하다. 울산·온산공단 등에 입주해 가동 중인 근로자 5인 이상의 2천3백여 업체 중 절반 이상인 1천3백여 업체의 공장이 지은 지 20년을 넘어서고 있다. 또 울산·온산 공업단지 내 1백여 석유화학 공장에는 1천7백여기의 탱크에 인화성이 강한 유류와 화학물질·가스 등이 2억여t이나 저장돼 있다. 이들 공단의 지하에 매설된 고압 가스관로의 상당수도 15년 이상된 노후 관로라는 게 현지의 분석이다. 울산공단이 건설에 들어간 시점은 1962년.

일반 구조물에 내진설계가 의무화된 1988년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을 수밖에 없어 이들 시설의 안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시의 경우만 봐도 1988년 내진설계 의무화가 도입되기 전에 건축이 허가된 대형 건물(16층 이상 또는 연면적 3만평방m 이상) 2백80여개 중 내진설계가 된 건물은 63빌딩·LG트윈빌딩 등 4개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일반적으로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에 있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대형 산업시설에 대한 구조해석 및 설계 자동화 통합 솔루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마이다스IT사의 최원호 구조기술팀장(공학박사)은 원전 못지않게 이들 산업시설의 안전성 확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석유·가스와 관련된 각종 산업시설은 시설물별로 내진설계 기준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 한마디로 들쭉날쭉하기 짝이 없다.

나아가 현재 시행되고 있는 내진설계 기준만으로는 완벽한 안전을 담보하기엔 역부족이다. 석유 저장시설의 경우 저장 탱크에 들어가는 내용물과 탱크의 상호 작용 및 성능 등을 고려한 내진설계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세부적인 내진설계 기준이 없는 관계로 건축법에 규정된 일반 건축물의 지진하중(내진설계 기준)에 따르게 된다(현재 석유시설 및 화학물질 저장시설은 내부 물질이 방출됐을 때 시민들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구조물이나 유독성 물질을 보관하는 건축물로 분류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건축물의 내진설계가 적용된다).

성능에 기초한 내진설계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하중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가스·전력·상하수도·교통·통신 등 여타 특수 시설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특수 산업시설의 구조물은 일반 건축물에 대한 내진설계 기준과는 별도로 그 성분과 특성에 따른 내진설계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 국립방재연구소는 1998년부터 관련 보고서 등에서 “지진 설계 선진국의 차세대 설계 규범은 구조물의 성능에 기초한 내진설계 규범의 확립”이라고 강조해왔다. 이에 정부 차원에서도 논의는 광범위하게 진행돼왔으나 2004년 6월 현재까지도 제도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활성단층의 존재 여부도 동해안 산업시설의 안전성을 위협하는 변수다. 활성단층은 휴화산과 같이 살아 있는 단층으로 언제든지 대규모 지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층을 말한다. 1983년 양산단층의 활성 가능성을 제기했던 이기화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는 “지난 5월 진도 5.2의 강진이 일어났던 울진 해상도 양산단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활성단층 논쟁에 불을 붙였다. 부산에서 양산·울진·경주·포항에 이르는 양산단층이 언젠가는 지각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원전이나 산업시설이 활성단층 위에 세워졌다면 안전성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는 16대 국회에서도 뜨거운 쟁점이었다. 2001년 6월 당시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의 윤영탁 의원은 한반도 경상분지 내에 발달하고 있는 양산단층대, 울산단층대 및 포항∼울산간 단층대에서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제4기 단층들이 다수 발견됐다는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다. 이들 중 일부 단층은 우리나라가 원전 건설시 준용하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가 활성단층으로 규정하는 대상에 포함되는 단층들이어서 민감한 파장을 일으켰다. 게다가 정부가 동해안 일대 활성단층의 존재를 은폐하려든다는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사태는 복잡하게 꼬였던 사안이다.

당시 과기부와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측은 “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원전 건설을 위한 부지 조사를 실시했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최범영 박사는 2003년 11월 국무총리실에 제출한 ‘한반도 지구조 변화 연구’보고서에서 “양산단층의 재활성된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나, 제4기 단층 작용의 징후를 입증할 만큼 커다란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며 활성단층 판별이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측 입장과는 다소 다른 뉘앙스로 해석될 수 있어 차후 연구 결과가 주목된다. 만약 양산단층대를 따라 새로 발견된 단층이 활성인 것으로 판명될 경우 울산공단의 안전성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이들 산업시설이 피해에 노출될 경우 후유증은 심각하다. 석유시설·가스시설·전력시설 등 산업시설은 다른 구조물과의 상호 연관성 및 의존성이 높아 지진 발생 또는 지각 변동시 인명살상 등 1차 피해로만 그치지 않는다. 화재·가스 폭발·통신 두절·교통 마비 등 2차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산업시설의 피해는 건물·다리 붕괴가 주는 사회적 충격과 혼란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안으로 기존 산업시설에 대한 내진 성능 향상을 요구하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지진하중을 고려하지 않거나 일반 구조물의 내진설계를 인용한 기존 시설물의 내진 성능을 적정 기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김재관 서울대 교수(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는 “기존 시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지진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진단한 뒤 필요한 보강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며 “강구조물은 연결부 또는 배관부에 대한 보강으로도 충분한 만큼 큰 비용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양대 지진연구소장인 김소구 교수 역시 “지금이 동해안의 화학 산업시설을 포함한 주요 시설과 내진설계 법령을 재검토하고 업그레이드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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