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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생명은 ‘리얼리티’

게임의 생명은 ‘리얼리티’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은 영화가 아닌 게임이다. 액티비전은 이를 간파했다. 액티비전이 제작한 게임 <스파이더맨2> 는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스파이더맨2〉(Spider-Man 2)처럼 엄청난 열성 팬을 확보한 비디오 게임도 없다. 영화 〈스파이더맨〉 1편은 4억800만 달러를 긁어모았다. 영화 사상 매출 5위다. 〈스파이더맨〉 1편 비디오 게임은 매출 2억5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영화 〈스파이더맨2〉는 올 여름 블록버스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도모 모리와키(Tomo Moriwaki) 등 비디오 게임 제작업체 액티비전(Activision)의 디자이너들은 2002년 후반 속편에 기반한 게임 제작에서 영화 줄거리를 거의 무시했다. 액티비전은 스토리를 구성하는 애니메이션 장면에 게임 개발 예산 800만 달러 중 겨우 4%만 배정했다.

액티비전의 디자이너들은 게이머가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는 데 주력했다. 게이머들은 스파이더맨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게임 개발에서 거의 모든 시간과 비용은 가상세계를 현실세계와 흡사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 투입됐다. 스파이더맨이 빌딩 숲에서 거미줄을 타고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 일어나는 바람의 효과까지 재현했다. 개발진 가운데 3분의 1이나 차지하는 아티스트들은 뉴욕 맨해튼을 3차원 사이버 놀이터로 재창조했다. 배터리 파크에서 할렘에 이르기까지 뉴욕의 도로망이 일정 비례로 재현됐다.

센트럴 파크 ·퀸스버러 ·브리지 ·시청 모두 실물과 똑같다. 해질녘 스파이더맨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있을 때 석양은 숱한 빌딩 창으로 반사돼 붉게 빛나고, 빌딩 밑의 거리에서 1,000여 개 가로등이 점등된다.
게임이 극적이듯 〈스파이더맨2〉에 대한 액티비전의 접근법도 극적이었다. 112억 달러에 이르는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기존 상식을 뒤엎은 것이다. 할리우드가 대박을 노리면서 영화에 기반한 게임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작으로 〈반 헬싱〉 ·<슈렉2> · <리딕:헬리온 최후의 빛〉(the chronicles of riddick)을 들 수 있다. 게임 역시 역동적인 카메라 앵글, 극적인 특수효과, 웅장한 음악을 선보이면서 영화와 진배없다.

영화 줄거리를 단순히 차용한다면 시시한 게임이 되게 마련이다. 지난해 영화를 발판으로 발매된 78개 게임 가운데 〈엔터 더 매트릭스〉(Enter The Matrix)만 게임 판매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엔터 더 매트릭스〉는 영화 〈매트릭스〉를 기초로 제작된 게임이다. 〈엔터 더 매트릭스〉는 출시 초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게임 줄거리를 〈매트릭스〉 감독이 직접 쓰고 특별히 게임 제작용으로 여러 장면도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게이머들은 게임 자체에 별 흥미를 못 느꼈다. 어느 게임 평론가는 〈엔터 더 매트릭스〉에 대해 “막연히 책갩V 쇼겳된춠만화를 바탕으로 평범한 액션만 만들어낸 졸작들 가운데 하나”라고 혹평했다.

게임 〈스파이더맨2〉에서는 훨씬 사실적인 세계가 구현됐다. 그러나 폭력장면으로 ‘13세 미만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모리와키는 “최근 들어서야 사실적인 대형 게임이 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게이머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무엇을 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점에서 과거 게임 환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거나 제한적이었다.
게이머들로 하여금 영화에서나 요구되는 촘촘한 줄거리를 따라 움직이게 만듦으로써 게임의 창조적 자유가 파괴되고 있다. 올해 초반 액티비전은 13~14세 소년들에게 〈스파이더맨2〉 게임을 해보도록 초청했다. 프로그래머들은 게임을 하는 소년들을 지켜봤다. 소년들은 줄거리 속에서 액션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끼워넣은 애니메이션 ‘컷 신’에 이르면 답답하다는 듯 건너뛰었다. 이는 게이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이다.

게임 대본은 영문학을 전공한 액티비전의 한 직원이 썼다. 하지만 그는 영화 대본을 전문적으로 써본 적이 없다. 게임은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간다. 영화 줄거리에 따라 스파이더맨은 아름다운 여자 친구 메리 제인을 악당인 미치광이 핵과학자 닥터 옥토퍼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액티비전은 영화의 장면과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애썼다. 게임 속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영화 〈스파이더맨2〉에 출연한 배우들이 맡았을 정도다.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 ·메리 제인)와 브로드웨이의 베테랑 배우 앨프리드 몰리나(Alfred Molina ·닥터 옥토퍼스)는 더빙할 때 자신들이 맡은 캐릭터가 게임에서 무슨 역으로 등장하는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던스트는 “게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고 실토했다.

던스트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게임 속에 구현된 뉴욕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일정 비율로 뉴욕의 거리를 재현하는 데 애썼다. 그 결과 만화와 영화의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타고 맨해튼 거리 위로 우아하게 건너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빌딩들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이 맞은편 빌딩에 달라붙은 거미줄로 그네타기를 한다면 저점(低點)은 지하철 터널 정도가 될 것이다. 전편 영화와 함께 출시된 〈스파이더맨〉 1편 게임에서는 거미줄을 하늘에 부착하는 편법이 동원됐다. 만화라도 이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스파이더맨2〉 게임에서 도시의 크기를 조절했다. 도로망 척도를 50%로 축소하고 물체와 빌딩의 높이는 그에 맞췄다. 인간의 눈으로는 차이를 감지할 수 없다. 그러나 거리가 좁혀지면서 스파이더맨은 물리학 법칙대로 빠르게 거미줄 그네를 탈 수 있다. 게임 개발자들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충실히 따랐다. 스파이더맨은 빌딩 벽에 냅다 달라붙지 않는다. 가속도 때문에 계속 다리를 움직여 달리거나 밑으로 떨어져야 한다. 〈스파이더맨2〉 게임의 제작자 매튜 파워스(Matthew Powers)는 “가상현실을 실재처럼 보이려면 물리학은 물론 때로 연기와 거울도 동원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가상세계를 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게임 개발자의 능력은 세 가지에 달려 있다. 콘솔 하드웨어의 성능, 디자이너의 기술, 예산이 바로 그것이다. 예산은 〈스파이더맨2〉 같은 게임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액티비전 ·일렉트로닉스 아츠(Electronic Arts) 등 게임 제작업체들은 대작에 1,000만~1,500만 달러를 쏟아부을 수 있다. 하지만 걸림돌이 두 가지 있다.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PS2)는 출시된 지 벌써 4년 됐다. 경쟁 제품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X박스는 PS2보다 조금 늦게 선보였다.

PS2의 메모리는 32MB에 불과하다. X박스는 PS2의 두 배다. 요즘 저가형 PC의 메모리도 256MB다. 그 정도면 〈심스〉(The Sims)처럼 푹 빠져들 수 있는 쌍방향 게임 세계를 구동하기에 충분하다. 시장조사업체 NPD 그룹(NPD Group)은 선풍적인 인기 덕에 〈심스〉 속편들이 지난해 PC 게임 톱10 가운데 4개나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내년 하반기나 2006년에 업그레이드된 콘솔이 등장해야 콘솔 게임은 PC 게임을 앞지를 수 있을 것이다.

액티비전은 당분간 메모리 문제를 비켜가야 한다. 거리를 보행자와 자동차로 채우려면 메모리가 그만큼 필요하다. 파워스의 말마따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액티비전의 케이시 브라벡(Kethy Vrabeck) 사장은 “잘만 만들면 영화에 기반한 게임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면서 “액티비전의 목표는 게임 소매 매출을 영화 입장권 수입과 맞먹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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