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경영 : “빨래엔 피죤” 이윤재 ㈜피죤 회장 회고록①…“나의 경영원칙은 개척자 정신”
나의 삶, 나의 경영 : “빨래엔 피죤” 이윤재 ㈜피죤 회장 회고록①…“나의 경영원칙은 개척자 정신”
<글 싣는 순서> 1. “나의 경영원칙은 개척자 정신”(756호) 글> 2. 7남매 막내에서 하루아침에 장남으로 3. 무역회사에서의 첫 출발 4. 가발 무역으로 홀로서다 5. 불혹을 넘긴 창업- 피죤 신화의 탄생 6. 체험마케팅- “빨래엔 피죤하세요” 7. “최초가 성공을 부르지는 않는다” 8. “사업은 결국 사람이다” 9. 웰빙 라이프 파트너- 피죤을 넘어서 10. 위기를 기회로- “경쟁을 체질화하라” 11. 든든한 버팀목- 가족이라는 울타리 12. “아직 山이 높고 바다가 깊다” 가을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은 그 넉넉한 품으로 이즈음 ‘경제고통지수’로 표현되는 불황의 터널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다독이고 있다. 나는 색 바랜 옛날 사진첩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들었다. 젊은 시절 흑백사진 특유의 단정하고 칼칼한 모습이다. 문득 떠올려 본다. 호기로운 장부의 기개 넘치는 인생의 장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로지 올라갈 봉우리만 보고 내달려온 나의 삶은 중간부의 정리가 없다. 칠순이 지난 이제사 숨을 고르고, 사진을 갈피마다 정리하듯 내 인생의 갈래를 편집한다. 용솟음치는 청춘을 고스란히 피죤에 쏟아부은 26년의 대장정이다. 남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나를 바로 보는 데 주력한 경영자의 길이었다. 덩치를 불리기에 급급하거나 사업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해 남의 것을 빼앗아 본 적은 없다. 인신공격과 술수로 남의 공적을 무너뜨린 경우도 없으니 이만하면 정도 경영의 문 안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공 사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따라한다면 아주 유익한(?) ‘실패 교과서’가 될 것이다. 같은 비즈니스라도 시대가 다르면 다른 사업이 되기 때문이다. 경영이라는 큰 흐름의 줄기를 타고 있을 뿐 ‘가지’를 다루는 기술은 완전히 각자의 영역이다. 돌아보면 별로 내세울 것도, 과시할 것도 없는 나의 길이지만, 내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후배 경영인들에게 도전정신과 용기를 주고 싶어서다. 또한 일제 강점기,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혁명의 시대를 두루 거치며 먼저 격랑의 소용돌이를 빠져 나온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한다. 칠순이 돼서 얻은 별명 ‘등소평’ 얼마 전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현지에서는 추모 열기가 한창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틀을 일궜다는 점에서 일견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보와 비견되기도 하는 그는 중국 경제의 가능성이 나날이 커지는 요즘 더 큰 의미가 부각된다. 사실 그는 내게도 다소 특별한 사람이다. 어릴 적 나는 체격이 작아 ‘꼬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칠순을 넘긴 내 별칭은 ‘작은 거인 등소평’. 고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쑥스럽기 그지없는 애칭이다. 사반세기 넘게 경영일선에서 한자리를 지키다 보니, 무수한 사회 전반의 변화와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환경 속에서도 알토란 같은 순수 토종기업을 일궈냈다는 격려일 것이다. ‘오척 단신의 거인’ 덩샤오핑은 외국에 유학생을 가장 많이 보낸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내가 덩샤오핑을 그의 정치·경제적 업적과 무관하게 기억에 새긴 것은 한 인터뷰 기사 때문이다. 12년 전인가, 당시 중국 경제개발 인력의 주축이던 스탠포드대학 라오 교수가 처음 방한했을 때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당시 나는 이경식 전 경제부총리, 진념 전 재정경제부 장관, 김명호 전 한국은행 총재 등과 함께 조찬을 한 적이 있다) “1978년에 뒤늦게 시장을 개방한 중국이지만 언젠가는 한국을 앞지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는 단박에 중국인의 프라이드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 경제에 의존해 발전했는데, 중국과 발전 속도를 같이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한국의 발전 속도를 능가할 수 있을 거란 거침없는 자신감과 함께 미국 현지의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솔직한 기대를 표시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은 유학생들이 선진국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발전의 동력은 교육에서 그 뿌리를 찾지요.”아들을 유학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귀가 솔깃해진 나는 내심 중국 시장의 거대함과 발전 속도보다 국가 지도층에서 인재를 키우는 방식에 더 수긍이 갔다. 당시 침체 일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의 중국으로서는 정책적으로 유학생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가난과 어려움에 익숙해진 그들의 현실은 비참했다. 한달 생활하기도 빠듯한 100달러의 여비를 쪼개 다시 고국으로 송금하기를 반복하며 오직 앞날의 희망만을 부여잡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힘겹게 공부를 마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미국인들과 경쟁했다. 어렵게 공부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조국은 두 개의 국적을 허용해 줬다. 풍요로운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의 뿌리는 잊지 않았던 게 그들이었다. 그 결과로 현재 미국 고위층 요소 요소에 포진한 당시의 유학생들은 이른바 요직의 인물이 돼 ‘영원한 모국’인 중국 발전의 배경을 든든히 채워주고 있다. 후일 나는 이때 받았던 깊은 인상으로 우리나라에 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그날 아침에 직원들을 공항으로 내보냈다. 일종의 성과급제도 같은 것인데 우수직원 해외연수제를 도입한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위대한 지도자 아래서 위대한 인재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에 견준 별칭이 나로서는 분에 넘칠 일이지만, 지난 26년간 흔들림 없는 피죤의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다. 개척자라는 말에 흥분돼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 6명은 ‘당연히’ 빨래엔 피죤을 쓴다. 창업 당시엔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 지금은 각 가정의 필수품이 됐다. 올해 피죤은 의미 있는 상을 하나 받았다. 한국마케팅학회가 선정한 시장선도유지 부문 마케팅 프런티어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간 여러 상을 받아봤지만 무엇보다 나를 잡아끄는 말은 ‘개척자 정신’이다. 사실 제품 개발 자체가 도전이었고, 시장과 소비자라는 의미가 형성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피죤 영업은 그야말로 불굴의 개척정신만이 그 원천이 됐다. 최초란 항상 리스크를 안고 있는 법이다. “이걸로 머리를 감아도 되나요?” 78년 여름, 제품을 출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사무실에 걸려온 고객의 전화 한 통으로 분위기는 온통 썰렁한 침묵 자체였다. 응대하던 직원은 으레 ‘이 제품은 빨래용’이라는 대답을 했지만 나는 그야말로 머리를 감싸쥐어야 했다. 아주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고객들은 제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아니 심지어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물건의 영업이라니. 빨래에 사용하는 제품으로 하필 머리를 감으려 한단 말인가. 기상천외한 질문을 받고 연구원들은 즉시 이론(?)을 실천으로 바꿔봤다. 실제 머리를 감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샴푸를 비롯한 헤어 제품의 인지도가 거의 없었다. 빨래비누 한 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절이었다. 시골 동네 가가호호의 골목길 사이로 흰 연기를 뿜으며 내빼는 소독차의 꽁무니를 머리에서 이가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아이들이 따라다니던 때였으니 말이다. 우리 연구실 한 켠에는 제품의 효능 실험을 위해 사용하던 수십 종의 옷감 대신에 가발이 등장했다. 직접 머리를 감아보는 것으로 모자라 각종 모발의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머리카락을 잘라 팔던 시절이었고, 당연히 가발의 원료는 지금처럼 합성이 아닌 원모제품이었다. 연구원들과 같이 밤을 지새며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대부분 남자이던 연구원들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품으로 머리를 감아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전등갓 아래 윤기가 자르르한 그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나는 보드라운 옷감의 감촉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었던 소비자의 욕구를 어렴풋이 읽어냈다.그것은 분명 문화적 욕구였다. 항상 현재보다 나아지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과 다르지 않은, 그래서 당장의 생활이 고되더라도 미래에는 더 아름답고 세련되기를 원하는 여성들의 원초적 욕구가 피죤으로 머리를 감아보게 한 것이 아닐까? 피죤은 고객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 근원의 소리를 담아낸 제품으로 태어나야 한다. ‘생활용품이면서 동시에 문화용품이 돼야 한다’는 피죤의 위상은 이때 태동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병법」에 ‘상대로 하여금 가까이 오게 하는 방법은 이로움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소비자에게 이익을 돌려주자. 설사 적이라도 아군의 진영을 기웃거릴 것이다. 결국 그 제품의 최종 기착지를 생각해 보면 제품에 덧입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것이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쟁이들의 내공이다. 그렇다고 피죤을 머리세정제로 광고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옷감의 정전기 제거라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함이 요체였고, 머리를 감아도 유해함이 없다는 방증이요, ‘제품 개발도 판매도 고객의 입장에서 사고하라’는 내겐 하나의 지침이 된 경우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본을 강조하는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고객이다. 요즘 안팎으로 응어리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더블딥이니 스태그플래이션이니 하는 무거운 용어를 쓰지 않아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하면 더하지 하는 통탄들이 불거져 나온다. 시대가 냉가슴을 만들고 환경이 부추기는 꼴이다. 기본에 충실해야 위기 극복 한 개인의 인생에서건 혹은 국가라도 위기의 순간이 들이닥친다. 그러나 변함없는 대전제는 누구든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뛰어야만 경기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상식과 기본의 룰이다. 기업 경영에서도 늘 어려운 시기가 오고, 그 고비를 넘길 수 있는가의 시험이 내려진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보면 결론은 역시 기본에 충실한가, 기업과 기업인이 책임을 완수하고 성실하게 살며 투명하게 이끌어가는가가 관건이 된다. 일시적 속임수나 미봉책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환부의 고름은 더 곪아갈 따름이다. 그런 기업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이른바 경영의 룰을 지킨 기업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가는 대열에 서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손익계산서 하나로 기업의 이념마저 대변되는 경영 흐름의 가파른 물줄기 속에서 과연 투명과 신뢰, 성실과 책임 같은 고전 덕목(?)들이 발이나 붙일 수 있을까. 긍정의 내 대답은 아직도 유효하며 소신으로 밀어붙인 그 길이 오랜 세월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그러나 일단의 고지에 올라선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항상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꽁꽁 뭉쳐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싯적 나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부잣집 막내둥이일 뿐이었다. <계속> <이윤재 ㈜피죤 회장 약력>이윤재> 1934년 서울 生 서울고·고려대 상학과 卒 1959∼92년 동안물산 대표이사 1967∼79년 동남합섬 대표이사 1978∼92년 ㈜피죤 대표이사 1992년∼現 ㈜피죤 회장 現 선일로지스틱스 회장 現 중국톈진벽진유한공사 회장 계속>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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