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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은 기업들 뭐가 다른가… 재운·관운 만나면 기업운‘활짝’

운 좋은 기업들 뭐가 다른가… 재운·관운 만나면 기업운‘활짝’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울산 현대조선소를 방문해 정주영 회장의 안내를 받고 있다.
경제 기자를 오래 했지만 기업에게 운(運)이 작용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다만 기업이 견뎌온 세월의 변화무쌍함은 여러 차례 지켜봤다. 언제나 세월은 무정하고 그 변화는 비정(非情)한 법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월은 반드시 시류(時流)를 몰고 온다. 그 시기에 지나치게 과민한지 또는 둔감한지에 따라 성패가 엇갈리게 된다. 시류를 정확히 읽어내는 지혜와 적응하는 처신이 필요했겠지만 그러고도 설명이 안 되는 부문이 있다면 이를 운(運)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경제 제일주의 시대는 관운 지난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이란 배고픈 국민에게 밥 먹여 주려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태산준령이라도 돌파하려는 야생마와 같은 기업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업인을 애국자로 떠받들고 기업 성과에 따라 명예와 권위를 매겨줬다. 이 시절 기업인들은 타고난 역학적 재운(財運)보다는 근면과 성실로 사업보국(事業報國)하려는 열정이나 충성도가 평가돼야만 했다. 매년 기록경신을 숭상하던 그 시절, 기업은 수출과 건설입국(立國) 성과를 확대 생산하기 위해 대형주의와 제일주의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단(船團)경영으로 성급하게 몸집을 불려 문어발이란 지탄을 받게 됐다. 당초 창업 1세가 기업을 시작한 것은 가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생존경제였다. 그러다가 정부 주도 경제개발기를 맞아 근면과 절약정신을 창업자본으로 애국과 충성에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이 기업인이었다. 다만 기록 경신이 치열해지면서 반칙과 편법의 유혹을 받게 되고 정경유착기에는 허겁지겁 무치(無恥)경영에 빠지기도 했다. 그 시절 노조나 시민단체는 눈치 볼 것 없었다. 투명경영이나 윤리경영이란 글로벌시대 자본주의 강대국의 논리로서 요즘에야 나왔다. 정부가 외자도입 지불보증을 해 주고 관치금융 배분해주고 KOTRA가 해외시장을 개척해 주던 시절, 대형 사업종목의 실수요자도 정부 기준에 의해 선정됐다. 그러므로 당시 재운이란 관청 로비에 의한 신뢰와 처신을 겸비하는 것이 상책이자 관운과의 만남이었다. 수출산업이나 중화학공업 등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 곧 국책사업이었기에 정부가 적부심사를 전담했다. 그래서 매월 경제동향보고회의, 수출진흥확대회의, 방위산업진흥회의 등에 초청받아 특출한 사업성과가 발표되거나 감동적인 수출 사례가 보고되면 승승장구의 길이 열렸었다.

‘멎어 있으면 그냥 두지 않는다’ 경제개발기의 신흥기업과 몰락기업들을 지켜보면서 ‘기업이 멎어 있으면 세월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체로 기업 수명이 30여년이라지만 이 같은 평균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진 사례가 많았다. 수출과 건설 등에서 눈부신 애국적 실적을 쌓아올린 신진자동차·동명목재·국제상사·한일합섬·동아건설 등의 불운을 꼽자면 안타깝다. 완전 몰락은 아니라도 창업주의 명예가 여지없이 훼손된 대우·현대·쌍용 등 일류기업들의 경우는 차라리 서글픈 이야기다. 이를 개인 기업인들의 운세라고 단정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멀리 일제로부터 경제개발기까지 명문 토종기업사를 기록하려다 역부족으로 몰락한 화신산업이나 잠시 신흥기업으로 반짝 빛을 냈던 명성·율산·한보 등은 또 다른 측면의 시운을 탓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건 누굴 탓하기 이전에 변화를 거역한 기업은 ‘세월이 그냥 두지 않았다’고 해석함이 옳은 것이다. 시운이나 시류를 탓한다면 최신 용어로 ‘코드’를 뜻하겠지만 기업이 시대를 역류하거나 정치적, 사회적 환경변화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생존을 위한 처신은 능력일지언정 운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과(前科) 사면 없는 팔자 소관 대체로 치부(致富)에 성공하고 나라의 훈장을 받은 기업이 쉽게 망한 사례를 보면 자신은 우국충정에 불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정한 세월이 그를 버린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기업인들은 전과자들의 세계에서살고 있다. 기업인들의 전과는 개전의 정과 상관없이 사면되는 법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기업을 경영하자면 조세법, 공정법을 비롯해 노동법, 환경법은 물론 국민정서법이나 시민단체법을 위반하게 되니 모조리 범법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도 기업인들은 8·15 이래 유죄인으로 출발했으니 이를 운명이라 할지 팔자라 할지 알 수 없다. 8·15 해방 뒤 반민특위의 구속 제1호가 일제 하의 조선제일의 갑부인 화신 박흥식(朴興植)사장이었다. 그로부터 유명 기업인일수록 검찰과 형무소를 자주 출입했다. 5·16 정부가 경제개발에 착수코자 기업인들을 찾아보니 일본으로 도피했거나 마포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자유당 정부 하의 기업인들이란 몽땅 탈세와 부정축재자로 단죄돼야 할 처지였다. 이를 기업인 개개인의 부도덕으로 볼 것인지 잘못된 세월의 형벌이라고 해야 할지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올챙이 기자 시절 세칭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 유력 기업인이 구속되고 한국비료를 건설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발표를 직접 들었다. 그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밀수재벌이란 지탄이 서슴없이 나온다. 권력형 범죄나 국사범들도 잠시 구속됐다 풀려나면 사면 복권돼 높은 벼슬도 하고 권력도 행사하는 경우와는 딴판이다. 반면에 기업인들은 반민특위로부터 부정축재와 정경유착의 죄인으로 오늘날까지 전과자 신세를 면치 못할 뿐더러 정치·사회적 사면을 못 받는 팔자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다. 사카린 밀수사건 이후 기업인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방식의 회장제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형무소 가는 경우만은 피해야겠다는 계산으로 도장은 사장에게 맡기고 오너는 회장으로 결재 없는 통치자 역할로 위험을 회피키로 한 것이다. 그뒤 회장제가 유행하자 다시 왕회장이나 명예회장제로 안전지대를 더욱 넓혀 오늘에 이른다. 따지고 보면 기업인 팔자는 태생적 운명이다. 해방 이후 6·25와 4·19, 5·16 등 모든 격변을 다 치르고 민주화된 지금에도 각종 경제법과 시민법 등에 의해 다시 범죄인으로 꼽히고 있으니 팔자소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라가 오늘만큼 발전한 것은 분명 기업성과의 축적이고 보면 기업인들이란 ‘전과 있는 유공자’가 아닌가.

교주 잃은 야생마들의 실족 기업인들의 운세가 급격히 기운 것은 교주나 사범과 같은 기댈 언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0·26의 국변으로 경제 제일주의 대통령이 가고 인기주의 민주화 권력이 들어서면서 사업보국이나 구국충정의 기업인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옥훈련 같은 강 드라이버를 구사했지만 기업인들은 “대통령은 우리 편”이라면서 좋아했다. 특히 야생마 기질이 있는 기업인일수록 박 대통령 방식을 교범처럼 실행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통령 유고’는 청천벽력이었고 신앙을 잃고 도전의욕을 상실할 지경이 됐다. 방황하면 야생마는 실족하기 쉬운 법이다. 훈련된 강선수일수록 코치나 감독의 잔소리와 채찍이 사라지면 맥이 풀리게 돼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정주영 회장 운세는 정상에 오를 시점에 좌절을 만난 경우다. 생전의 정 회장은 “박통이 다 좋았는데 배 만들라고 야단치는 것이 싫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토목공사하고 자동차 국산화하겠다는 기업인에게 난데없이 “조선사업을 아느냐”고 물으니 “전혀 모른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는 조선사업을 해야만 했고 오늘의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남겼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사시의 비상탈출이나 식량도입 등을 고려해 무엇보다 조선사업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 회장이 조선에 관심이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산업은행 등을 통해 압력을 행사한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정 회장의 뚝심과 야성만이 험난한 파도를 꺽고 조선공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계 최대 걸작품인 현대중공업을 남긴 것은 최고 권력자가 ‘맡겨준 시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6공화국과 불편해져 직접 정치하려다 좌절하고 YS에게 당하고 DJ정부 들어 대북사업의 환상에 젖어 불운을 자초했으니 박 대통령이 없는 시절 야생마의 시류거역이 잘못이었다고 여겨진다.

무모한 돌진은 운세도 못 지켜줘 지금은 해외에서 유랑하는 처지지만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시류를 예측하고 섬유수출 쿼터를 확보해 재벌성을 구축하고 인재를 끌어모아 세계경영의 틀을 마련하는 데까지는 성공한 모델이다. 김 회장은 박 대통령이 ‘밥 먹여 주는 정치’를 시작할 때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내다보고 스웨터 수출확대로 섬유쿼터를 가장 많이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수출유공의 공적으로 숱한 기업인수로 재벌성을 쌓고 인재집단으로 세계경영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사라진 뒤 이를 유지하기 벅차 분식회계 등으로 위기관리를 하려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정치권의 버림으로 비운을 맞게 됐다. 결국 김 회장도 막강한 교주의 배경이 없어진 뒤에 시류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재계의 본류 가운데 성공한 모델로는 경남 함안 동향 출신의 영남 3인방을 꼽을 수 있다. LG 구인회·삼성 이병철·효성 조홍제 씨 등 세 분은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이며 때론 사업상 얼굴을 붉히고 다툰 사이다. 이들의 사업은 시운을 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엄격한 내부규율이 과욕, 과속을 단속하고 적당한 수준의 처세로 최악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는 운세를 관리하고 시운에 적응했다는 뜻이다. 연고권 때문에 적산 기업을 인수한 두산·SK·한화 등의 사업운은 고비가 있었지만 2세들이 제2의 창업으로 면모를 일신했으니 기업승계의 운을 누린다고 볼 수 있다. 최종건 SK 창업주는 과로로 일찍 타계했지만 동생 최종현 회장이 미국서 화학을 전공한 안목이 있어 기생집에서 일제 한복 치맛감을 보고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 혼방의 여성복지 깔깔이를 개발, 오늘의 그룹을 축성할 수 있었다. 두산은 창업 이래 줄곧 상인정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신봉해 왔고, 한화는 격변기를 맞을 때마다 국가시책에 고분고분했던 창업주의 정신을 따라 권력에 순응코자 했다. 피난상인으로 백절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대한생명의 최성모씨는 신앙심이 돈독한 2세에게 잘 물려줬지만 신규 사업의 불운이 겹쳐 63빌딩마저 잃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또 피난민의 절치부심으로 대성한 대한전선의 설경동씨는 금성사·삼성전자와 격돌하다 주저 앉았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죽기살기식의 결전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과잉 집념은 운세도 지켜 줄 수 없다는 교훈인 셈이다.

소문과 평판이 운세보다 무서워 다방면의 만능 보스로 통하던 김성곤씨의 쌍용그룹이 기운 것은 정치에 참여했던 악운이 2세에까지 승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동차에 심취해 꿈의 왕자 스타일을 보여준 김석원 회장이 정치권에 들어가 크게 성공 못하고 그룹이 IMF 풍파에 좌초했으니 잘못 선택한 액운이었다. 소문과 평판이 역학적인 운세보다 무섭고 결정적이라고 믿는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회장은 능히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대부로 추앙받을 만했다. 그러나 여인의 치마폭에 너무 빠졌다는 소문이 많았다. 말년에는 외화도피 혐의로 구속되고 아들의 고발을 받고 자식을 패륜아로 규정했으니 차마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부자 간 추태가 연출될 때 부친에게 “전 재산 헌납하시고 명예나 회복하십시오”라고 애원하던 그의 4남은 지금 훌륭한 사업가로 성장했으니 그나마 자식복을 남겼다.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이나 박용학 대농회장도 여인편력 소문이 안 좋았다. 리비아 대수로공사로 명문기업이 된 동아건설은 파산하고 대한농산그룹도 남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김철호 기아산업 창업주는 자전거로 시작해 3륜자동차와 브리사 승용차까지 바퀴 두 개에서 세 개를 거쳐 네 개로 성공한 분이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비라는 의미로 3000리 자전거를 만들고 아시아를 우뚝 세우자는 뜻으로 기아(起亞)라는 상호를 택한 우국충정에 불타 있었다. 김 회장 사후에도 김선홍이란 특출한 전문경영인이 크게 육성했지만 기아는 지금 현대차 계열로 편입됐다. 그의 운세는 자동차 바퀴 네 개가 한계였던가 싶다.

분수를 지켜 액운을 멀리 자유당 재벌로 기억되는 중앙산업 조성철 사장은 이승만 박사의 신임을 받고 당시 건설 5인조가 누리고 있던 지명입찰제를 경쟁입찰제로 바꿔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다 몰락했다. 조 사장은 5·16 뒤 마포형무소를 거쳐 초기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으로 잠시 재기했었지만 끝내 기득권 세력의 협공으로 해외를 유랑하다 일본에서 사망했다. 조 사장은 스스로를 극우(極友)라고 호칭할 만큼 매사에 극단적으로 대처하다 스스로 운세를 버렸다고 지적된다. 암울한 일제를 견딘 몇 안 되는 기업인들은 천운(天運)과 조상은덕으로 사업했노라고 회고한다. 도무지 기업을 할 수 없는 풍토지만 배고픈 식민지 국민의 서러움을 덜고 자주독립의 꿈으로 기업을 할 수 있었으니 하늘이 돌봐줬었을 것으로 믿는다.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이나 인촌 김성수의 경방 창업정신이 바로 구국충정이었다. 일제에게는 조선독립운동과 관련 없는 민생경제에 전념한다는 구실로 인허가 절차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업 내부에는 ‘건강한 국민이 아니면 독립할 수 없다’는 정신과 ‘경제자립 없이는 독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자주 이념이 살아 있었다. 친일 기업인 1호로 꼽힌 화신의 박흥식 사장에게는 ‘조선인으로 일본인을 능가하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야망이 있었지만 총독부와 관계가 깊어 비행기를 헌납하는 친일을 마다할 수 없었다. 반면에 경주 최부자 최준씨는 친일과 배일을 함께하는 두 개의 얼굴로 1만석을 지켜냈다. 총독부가 주는 감투는 친동생이 받게 하고 밤이면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에게 독립자금을 건네 줬다. 최부자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1만석을 넘기지 말라’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말라’ ‘아랫사람에게 모질게 하지 말라’는 가훈을 철저히 지켜냈다. 그러니까 낮엔 친일하고 밤엔 배일하는 두 얼굴에 1만석 이상의 탐욕을 경계한 최부자의 경우 분수를 지켜 액운을 멀리한 셈이다. 대체로 기업인들이 겪어온 험난한 세월이 타고난 운세였는지 어쩐지 우리네가 알 수 없다. 경제 기자의 안목으로는 운명이자 팔자이며 일종의 풍토병이었다고 생각한다. 악덕 규정 풍토병 오래간다. 이는 정치와 사회발전에 앞서 경제가 먼저 발전해 이 때문에 경제인이 유공자로 떠 받혀지는 경우가 용납될 수 없다는 정치환경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기업인들은 아무리 공적이 쌓여도 오래 전의 ‘사면 안 된 전과’ 때문에 국가유공자 반열로 올라설 수 없는 상황이다. 청문회라도 열리면 부동산 투기나 아들의 병역미필로 쫓겨나는 공직자들의 허물과 비교도 안 되는 자료가 쏟아질 판이다. 최근 정치적으로는 ‘기업이 곧 국가’라는 극찬까지 나오고 있지만 기업인들은 자신의 신분상 제약을 잊지 말고 분수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세월이다. 정부는 IMF 이후 국내 기업의 구조조정 시장에 토종자본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막아놓고 외자계 펀드들에게 독식 밥상을 차려 주었다가 뒤늦게 ‘뼈아픈 교훈’이라고 후회한다. 그러나 정부는 후회한다고 했지만 국민정서법이나 시민단체법이 국내자본은 악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한 전과가 사면되지 않는 기업인들에게 눈치와 처신이 상책이다. 이런 경영풍토에 역학자들은 기업운을 어떻게 진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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