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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밖에 선 한국의 자폐아

'울타리' 밖에 선 한국의 자폐아

손형진(가명)군은 레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덟살짜리 소년이다. 레트증후군은 흔히 자폐증이라고 불리는 발달장애와 유사하다. 한 두살까지는 정상에 가깝다. 그러다 서서히 행동능력을 상실하면서 손이나 언어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부모는 손군이 세살이 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인천의 한 사설기관에 맡겼다. 그러나 아이의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원인 모를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답답해진 손군의 부모는 아이가 네살이 되던 2001년 연세대 병원을 찾았다. 그 때 손군의 등에는 어른 손바닥 모양의 시퍼런 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로 자폐증 치료의 권위자인 신의진 교수는 기가 막혔다. 아이가 다녔던 사설기관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위를 따졌다. “아이가 운동을 하지 않고 꾀를 부리는 것 같아 약간 때려줬다. 우리는 충격요법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다. ” 그 책임자는 당당하기만 했다. 자폐증상을 꾀병으로 간주한 이 기관의 무지와 인권경시에 화가 치민 신교수는 “그건 치료가 아니라 범죄”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문제의 책임자는 “우리 고유의 학습법이었을 뿐”이라고 맞받아쳤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자폐증은 비교적 생소한 질병이었다. 최근 자폐아가 등장하는 영화 ‘말아톤’과 TV드라마 ‘부모님 전상서’로 본인과 부모들이 겪는 고통이 비교적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장애등록 기준에 따라 장애인 등록제도를 시행해온 정부조차 2000년도에 들어서야 발달장애를 독립된 장애로 분류했다. 그전까지는 발달장애는 지체장애나 정신지체장애 항목에 포함됐을 뿐이다.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발달장애인은 7천7백여명이다. 남자가 6천4백여명, 여자는 1천3백여명이다. 그러나 실제론 4만명 이상일 것이라는 게 학계와 의료계의 주장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최소한 인구 1천명당 1명은 발달장애를 겪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차별을 꺼려 장애인 등록을 기피했거나, 발달장애인이면서도 2000년 이전의 지체장애 또는 정신지체장애 등록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발달 장애인을 위한 전문 치료 또는 교육 시설은 서울시립아동병원과 국립 서울병원을 제외하곤 전무하다. 각각 2백50명과 6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외래환자도 받고 있다. 그밖의 치료시설로는 대학병원의 소아정신과가 고작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발달장애인들의 치료와 교육을 위해 사설기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들 사설기관이 국가 또는 공인기관으로부터 그 운용프로그램을 검증받을 의무가 없다는 점이다. 설립과정에서도 국가의 승인이나 감독을 요구받지 않는다. 교육인적자원부 특수보건교육과의 권택환씨는 “장애인 사설 치료-교육기관 설립에 관한 기준이나 요건이 따로 없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라지곤 한다”고 했다. 그런 사설기관들이 현재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런 사설 기관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교육-치료법이 제멋대로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사례가 많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설기관들은 발달 장애인에게 ‘혐오 자극’이라는 허울아래 충격요법을 예사로 쓰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손군 같은 폭력의 피해자가 흔치는 않더라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한국자폐학회 회장인 안동현 한양대 정신과 교수는 발달장애를 완치하는 특효약이나 수술방법, 특수교육 방법은 아직까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일부 사설기관은 1백% 완치 가능 운운해가며 절박한 심정의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호주머니를 털기도 한다. 지난해 결성된 서울 발달장애인 부모회 송주한 부회장은 사설기관의 악덕상혼에 피해를 본 부모들을 몇차례 봤다. 그는 “서울 강북구의 모 사설기관은 자폐증 완치에 관한 고가의 책을 수시로 발행하는가 하면, 유사한 교육프로그램을 반복 적용하면서 부모들의 주머니를 털어 왔다”고 말했다. 처음엔 호객행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따라갔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른 뒤 후회하는 학부모들이 많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곳으로는 지방자치단체나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관(전국 1백6개)이 있다. 여기서 장애인 6천여명이 각종 치료를 받고 있다. 발달 장애인들은 이곳에서 언어치료·심리치료·놀이치료·부모애착훈련 등 사회성 훈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발달 장애인들이 모두 얼마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 2년 이상 기다리지 않고는 복지관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말이다. 복지관측도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발달장애인들의 경우 2년이상 교육을 받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김인선 사무관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은 국가가 체계적인 발달장애 진단-치료를 전담하는 전문기관을 설립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로서는 아직까지 그런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김정렬 장애우 권익문제 연구소장은 “발달장애인은 의료와 교육, 보육 이 세가지가 동시에 공급될 때 효과적으로 사회에 적응해나갈 수 있다”며 국가 주도의 통합치료시스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국가주도의 통합치료시스템의 도입이 당장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사설 교육·치료기관이라도 시급히 정비해 나가야한다. 김성애 대구대 유아특수교육과 교수는 “전문적인 교육프로그램이나 적정 시설, 특수교사 자격증을 가진 교사를 갖추지 않은 채 임의로 설치된 사설기관에서 주먹구구식의 유사 의료행위를 하고 있으나 관계 당국의 단속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국도 심각성을 깨달았다. 교육부는 국립특수교육원에 의뢰해 장애인 사설 치료·교육기관 설립기준의 시안을 마련중이다. 아울러 교사의 자격 요건과 시설 기준을 세우고 교육 프로그램의 평가까지 제도화하는 방안을 올해 안에 강구할 예정이다.

서울에는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들의 모임이 10여개 있다. 구청 단위로 정례 모임을 갖고 치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며 집단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 강남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장통모’(장애아 통합교육을 위한 부모모임)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2년 결성된 ‘장통모’는 통합교육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에 나섰다. 이 모임 결성을 주도한 송제연씨는 발달장애아를 둔 40대 학부모다. 송씨는 발달장애인과 같은 특수교육대상 장애아동이 비장애아동(일반아동)과 같은 학교 학급에서 수업을 받고 각종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응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송씨는 “비장애 아동 역시 다양하고 이질적 개성을 가진 장애인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모임 회원들은 통합교육 실현을 위해 교육부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국회를 상대로 관계 법령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부모들의 노력은 최근 들어 빛을 발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이들 학부모의 요구에 호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육부는 통합교육 여건 조성을 위해 오는 2007년까지 특수학급설치 학교당 1명씩, 총 4천명의 특수교육보조원을 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회에서도 지난해 7월 국회의원 58명과 관계 전문가·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연구모임 ‘장애아이 We Can’이 창립식을 가졌다. 이 모임은 2005년도 활동의 초점을 ‘장애아이 보육·교육과 치료를 위한 지원 및 대책’에 맞추기로 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장애학생의 특수교육 수혜율은 58.1%로 집계됐다. 발달장애인들 역시 사정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30% 정도는 부모의 의사에 따라 일반학교에 취학해 있고, 20%정도는 가정이나 병원 또는 복지시설에 머물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말아톤’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부닥치는 현실의 장벽은 대중의 감동만으로는 허물어질 수 없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현직언론인인 김영환(가명)씨의 말이다. “발달장애인의 부모가 가장 많이 울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다. 아이가 취학하면서 비장애인과 격리되거나 차별을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아이가 겪을 불편을 최소화하는 게 발달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의 영원한 숙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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