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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에 뛰어든 탈북자들… “남한 생활 8년 | 이제야 경제 알 만해”

시장경제에 뛰어든 탈북자들… “남한 생활 8년 | 이제야 경제 알 만해”

전영일(왼쪽) 백두식품 사장과 직원들이 회사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장춘광 교보생명 보험설계사.
전영일 백두식품 대표.
림일 『평양으로 다시 갈까?』 저자.
탈북자들의 시장경제 부적응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온갖 고난을 헤치고 ‘낯선 땅’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1990년대 후반 탈북해 남한 생활 8~9년차가 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에게는 한번 세운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긍정적 사고로 최선을 다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편집자> 1998년 10월 탈북해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 장춘광(34·교보생명 천일영업소)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다. 장씨는 “맑은 날이면 멀리 백두산이 보이는 풍광 좋은 곳”이라고 고향을 소개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향이 있지만 그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고향이 충청도 제천”이라며 인사를 한다. 장씨가 고향을 바꾼 사연은 무엇일까? “몇 년 전입니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데, 함경도 사투리를 듣고 택시기사가 ‘혹시 북한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형제 내팽개치고 혼자 왔느냐’고 다시 묻더군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시 형님 두 분이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판이었는데….” 그 다음부터 장씨의 고향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충북 제천이 됐다. 장씨는 “무조건적인 동정도 부담스럽지만, ‘혼자만 잘 살려고 부모형제 버리고 내려왔다’는 비난 섞인 시선도 치욕적”이라며 “그때 ‘택시 사건’이 있고 나서는 고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제천 말씨는 충청도 특유의 느린 말투에다 인접한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다. 함경도 출신인 장씨로서는 나름대로 ‘꾀’를 낸 것이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탈북자? 장씨의 ‘고향 얘기’는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가 ‘남한 사람’이 돼 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둘씩 남한 사람과 경제를 체험하면서 남한과 익숙해지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장씨의 진짜 ‘남한살이’가 시작된 것은 1999년 2월 28일로, 국가정보원 ‘조사’와 통일부 ‘교육’을 마치고 나서다. 곧바로 취직한 그는 TRW라는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안산공단에 있는 이 회사는 기아자동차에 파워 핸들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 남한 사회에서 만난 사람은 정착 지원금을 노리고 접근한 사기꾼이었다. “성격이 우직했기 때문에 그나마 사기를 당하지 않고 취직할 수 있었지요. 당시 정착 지원금으로 3700만원을 받았는데, ‘월 500만원씩 돈을 벌 수 있다’며 5t 트럭을 사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좋은 기회인데 왜 생판 모르는 저한테 투자하라는 겁니까’하고 넘겼지요. 그러나 주변에는 이런 ‘미끼’를 문 사람이 많아요.” 착실한 봉급쟁이였던 장씨는 2000년 4월 결혼하면서 직장을 옮겨야 했다. 같은 탈북자 출신의 최영옥씨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다 결혼하게 돼 최씨의 인천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안산까지 출퇴근하는 데만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막상 인천으로 옮기기는 했는데 이번엔 직장이 문제였다. 이때 우연히 인천시립도서관 게시판에 붙은 ‘보험설계사 모집 공고’를 보고 보험 영업에 뛰어들게 된다. 오는 8월이면 그가 보험 영업을 한 지 5년째가 된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탈북 남성은 장씨가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하다. “보험 영업이라는 게 우선 신뢰를 줘야 하는데…. 저는 용어 익히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북한에는 손해보험은 있어도 생명보험은 없거든요. 정말이지 두세 달 동안은 머리가 핑핑 돌았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먹고살려면 해야지요.” 고향 친구도, 동창도 없던 장씨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이북5도민회. “한번만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것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제는 건물 꼭대기층에서 1층까지 훑는 ‘빌딩 타기’도 제법 한다. 일주일에 새롭게 받아드는 명함만 서른 장가량. 조기축기회, 향우회, 사이버대학 오프라인 모임 같은 사적인 모임도 여러 개 생겨 아내로부터 “아이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월평균 5∼7건 정도 계약을 올리는데 천일영업소에서 중간 정도 성적이란다. 월수입은 평균 250여만원. 아내인 최씨는 아오지탄광 막장에서 탄을 캐던 광산 노동자 출신이다. 지금은 KT 동작전화국 영업지원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수입은 괜찮은 편이다. 지난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25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했고, 아반떼 승용차도 샀다. “악착같이 저축한 덕분”이란다. 그래도 더 모아야 한단다. 충청도에 500평 정도 땅을 사서 시골 생활을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공해가 많은 서울살이 때문에 안식구가 아토피 증세가 심해요. 나중에는 시골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이러면 진짜 충청도 사람이 되는 거지요.” 장씨는 “저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탈북자들이 돈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보니 남한에서 겪는 경제적 고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 교육이오? 적금 붓기와 자동입출금기 사용법 같은 간단한 금융 교육은 받습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합니다. 중국을 거쳐 나온 사람을 빼고는 북한 주민들은 돈에 대한 개념이 희박합니다. 어떤 탈북자 중에는 정착 지원금을 받아 무작정 싼타페 자동차를 산 경우도 있습니다. 면허증도 없이 덜컥 자동차부터 뽑는 거지요. 경제 행위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지요. 남한살이 7년째인 저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데, 이들은 어떻겠습니까?” 경기도 김포에 있는 백두식품. ‘백두’라는 이름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회사는 탈북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식품회사다. 느릅액을 넣은 냉면과 찐빵이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이다. 웰빙 바람을 타면서 지난해 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 직원 12명이 올린 식품회사 성적표치고는 나쁘지 않다. 올해는 100% 성장한 2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직원도 5명 정도 더 뽑을 생각이다.

“하나로 뭉쳐 사업하자” “웰빙 바람을 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먹어본 음식이지요. 남한에서는 웰빙이 유행하면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입니다. 저희는 느릅나무의 뿌리껍질(근피)을 평안도 양덕에서 연간 40t가량 수입해 씁니다. 몸은 비록 떠나 있지만 비즈니스를 통해 계속 고향을 만나고 있는 셈이지요.” 지금이야 이렇게 휘파람을 불고 있지만 이 회사 전영일(43) 대표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이 패어 있다. 이 회사의 전신은 D식품. 탈북자 10여 명이 의기투합해 “정착금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우리 힘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남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자”며 D사를 세웠다. 마침 전 대표는 북한에서 청진경공업단과대학(남한의 전문대학) 식품과를 나와 식품이라면 자신있는 터였다. ‘북에서 배운 식품 기술을 제대로 활용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기까지 당해 정말 많이 어려웠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시작한 일이지만 3년3개월 동안 월급 한번 제대로 가져간 적이 없었으니까요.” 공장장 겸 영업이사를 지낸 그는 “영업과 기획·재무 등 ‘사업의 ABC’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로지 열정 하나만 갖고 덤빈 일”이었다며 “사업에 실패하면서 비로소 남한 사회가 좀 보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다시 한번”을 외치며 당시 함께 근무한 탈북자 5명과 함께 백두식품을 세웠다. 백두식품은 전 대표를 비롯해 6명의 탈북자가 창립주주이면서 등기이사이자, 생산직원들이다. 지난해 이들은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일요일도, 휴가도 없었다. 전 대표의 표현대로 “뺀질거리지 않고 일만 한 덕분에”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 회사의 주력 제품인 ‘느릅 참냉면’이 제법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처음엔 종교단체를 통해 ‘동정심 섞인 영업’을 하던 것이 이제는 전국에 21개의 지사를 세울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해 50만원이던 월급도 올해는 120만원으로 올렸다. “아직은 투자 단계입니다. 최근 냉면 육수 생산시설을 새롭게 갖췄는데 여기에만 1억원이 들었어요. 다만 보람 있는 것은 은행 대출을 받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투자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연말까지 무차입 경영을 해보는 것이 꿈입니다. 돈을 좀 더 번다면 젊은 친구들 장가도 보내고 자그마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 줘야지요.” 1996년 쿠웨이트 주재 조선광복건설회사에 다니다 현지에서 한국 정부에 망명한 림일(37)씨도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례다. 림씨는 북한에서 사회안전부(남한의 경찰청에 해당)와 대외경제위원회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해 CI 제작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는 최근 자신의 서울살이 에피소드를 담은 『평양으로 다시 갈까?』(맑은소리)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림씨는 남한 생활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남한에 도착하는 순간 그의 이름은 ‘림일’에서 ‘임일’로 바뀌었다는 얘기, 북한에선 보지 못한 ‘아바이 순대’ 얘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남한의 생활경제에 대한 ‘당혹감’이다. “서울 생활을 하던 초기였습니다. 하루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동네 수퍼마켓에서 준 비닐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버렸는데, 이러면 안 된다면서 화를 내는 겁니다. 이때 쓰레기 봉투의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탈북자들에게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주는 ‘꼼꼼한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림씨는 “그래도 남쪽은 기회의 땅”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초심(初心)’이다. “북한을 떠날 때의 마음가짐이라면 안 될 것이 없지요. 목숨을 걸고 한 일인데, 그 다음부터는 모두 ‘기회’지요. 탈북자 선배가 ‘아무런 재산 없이 시작하는 외국인 노동자에 비하면 기본 정착금과 주거 혜택을 받는 탈북자가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요.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열심히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임을 확인했으면 합니다.”
남한살이 어떻게 해야 성공하나

"악착같이 저축한다" 탈북자 유일의 남성 보험설계사. 5년째 한 우물 파면서 고객들에게 신뢰 쌓아. 불필요한 소비 최대한 줄이는 ‘자린고비’ 생활. 무작정 소비부터 하는 게 아니라 저축의 중요성 인식해야.
■ 장춘광 교보생명 보험설계사

"北에서 배운 기술 활용" 전 재산 투자해 탈북자 동료와 식품회사 설립. 우여곡절 겪으면서 현재는 연간 20억원 매출 올리는 냉면 제조업체 CEO로. 북한에서 배운 기술을 남한에서 적극 활용할 것을 권유.
■ 전영일 백두식품 대표

"北 떠날 때 심정으로" 1996년 쿠웨이트 통해 한국으로 망명. 그래픽 디자인 전공해 현재는 CI 프리랜서로 활동. “북한 떠날 때 심정을 생각하면 안 되는 일 없다”고 믿는 긍정적인 자세가 중요하다고.
■ 림일 『평양으로 다시 갈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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