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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전문기자의 역사를 알면 경제가 보인다① l 유가의 역사] 최근 고유가 ‘공급 부족 역사’의 줄기

[이재광 전문기자의 역사를 알면 경제가 보인다① l 유가의 역사] 최근 고유가 ‘공급 부족 역사’의 줄기

1974년 1차 오일 쇼크로 주유소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미국 자동차들. 이 상황은 1979년에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재광 전문기자.
유가가 급등하면서 다시 1970년대 상황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유가 상승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자 70년대 1, 2차 오일 쇼크에 이어 세 번째 오일 쇼크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최근 세계 유가의 기준이 되고 있는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값이 연속 최고가를 기록하며 60달러를 넘어섰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수년 내 100달러를 돌파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동산 두바이유 역시 55달러를 돌파해 역시 명목가로는 최고가를 유지하고 있다. 유가 급등의 원인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수급 불균형을 꼽는다. 중국이나 인도 등 구(舊) 대국의 급속한 산업화로 최근 수년 사이 석유 수요는 크게 늘었지만 공급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석유 공급은 수요를 하루 평균 80만 배럴 초과했지만 올 1분기는 거꾸로 수요가 공급을 20만 배럴 초과한 상황”이라며 수급 불균형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더 근본적인 이유를 든다. “석유자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이다. 찾아낼 유정의 수는 한정돼 있고 소비는 늘고 있으니 유가 급등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들은 세계 석유 생산의 정점을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을 2조1000억 배럴로 가정했을 때 정점은 2003년 또는 2004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다. 수요는 커지는데 공급은 늘지 않으니 유가 상승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프린스턴대 지질학과 교수였던 케네스 S. 데페이에스는 “세계의 석유 생산은 21세기 첫 10년 사이 정점에 도달할 테고 원유 생산은 감소해 다시는 증가세로 돌아서지 못할 것”으로 분석했다. 최근 유가 동향과 그 분석을 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진짜 수급 불균형이 원인일까, 석유자원은 고갈되는 것일까, 수급 불균형이 주는 결과는 무엇일까, 언제쯤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70년대 상황은 이 질문에 상당한 힌트를 준다. 일단 70년대 1, 2차 오일 쇼크의 과정을 보자. 73년 10월 6일 터진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했다. 일치단결해 유가를 한꺼번에 70% 인상하고 산유량을 매달 5%씩 감축했다. 여기에 이스라엘 지지국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단행함으로써 미국 등 서방 국가들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73년 1월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원유 값은 74년 11달러65센트로 4.5배나 올랐다. 이후 70년대 후반까지 유가는 11∼15달러 선을 유지했다. 높기는 했어도 그런 대로 안정세를 보이던 유가는 78년 또 한 차례 요동쳤다. 그해 혁명으로 집권한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가 반미·반이스라엘을 외치며 석유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79년 유가는 40달러까지 폭등했다. 실질가격으로 봤을 때 이때가 150년 유가 역사의 피크였다. 이후 83년까지 유가는 30달러대를 유지하며 고유가 체제를 이어갔다. 73∼83년의 10년 사이 유가가 10∼20배나 뛴 것이다.

오일 쇼크가 70년대에 온 까닭 “모든 나라는 지금과 같은 재정 수입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고 개발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희열의 순간에 우리의 기력은 쇠했습니다. … 우리의 가격은 세계시장에 비해 너무 높습니다." 83년 초 OPEC의 한 회의석상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메드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은 이렇게 비통하게 말했다. OPEC의 유가 조정은 더 이상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해 2월 말 영국의 국영 석유회사가 북해산 석유를 배럴당 3달러 내린 30달러로 시장에 내놓자 OPEC가 손을 들고 말았다. OPEC는 세계 유가를 배럴당 34달러 수준에서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해 3월 유가는 29달러로 떨어졌다. 이로써 73년 제4차 중동 전쟁과 79년 이란 혁명에서 비롯된 두 번의 오일 쇼크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혁명 직후 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85년 11월 27달러까지 떨어졌다. 1, 2차 오일 쇼크의 원인 해석은 이제 거의 상식으로 굳어졌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 지원국인 미국을 겨냥해 석유를 무기로 썼다는 것이다. 만일 OPEC가 유가를 조종하지만 않았어도 오일 쇼크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얘기에는 허점이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그 이전에도 ‘석유의 무기화’를 시도했었다는 점이다. 결국 여러 차례의 시도 중 두 차례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0∼60년대만 세 차례의 위기 상황이 있었다. 전후 최초의 위기 상황으로 알려진 것은 51년. 이 해 4월 집권한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다음달 세계에서 세 번째 원유 생산회사인 이란 내 영국계 석유회사 앵글로-이란을 전격 국유화해 버렸다. 56년에도 세계 석유시장을 떨게 만든 대사건이 발생했다. 이집트의 민족주의자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이 해 7월 일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접수해 버린 것이다. 당시 수에즈 운하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석유의 3분의 2가 통과되는 절체절명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이 위기들은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67년 제3차 중동 전쟁이 터졌을 때도 세계 석유시장의 위기감이 고조됐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6일 아랍국 석유장관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들엔 석유 수출을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즉각적인 수출 금지를 명령했다. 다음날부터 중동으로부터의 석유 공급은 무려 60%나 감소했다. 하지만 서방세계는 이 위기 역시 무사히 넘겼다. 50∼60년대 위기와 70년대 위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핵심은 바로 중동 이외 지역에서의 잉여 생산 능력이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의 60년도 보고서에는 “중동에서의 석유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미국은 국내 생산중지 중인 유전들을 개발하면 대처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세계 석유시장의 여유 생산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위기를 막는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67년 미국은 생산 중지 중인 유전을 가동시켜 하루 100만 배럴을 추가로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추가 생산량은 베네수엘라의 추가 생산량 40만 배럴, 이란의 추가 생산량 20만 배럴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향후 20년간 고유가 시대 전망 석유를 처음으로 시추한 1851년 이후 120년 동안 석유는 대체로 여유 생산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일시적인 초과 수요도 없지 않았지만 석유는 대체로 공급 과잉이었다. 수요가 늘어 유가가 뛸 것으로 보이면 새로운 유정이 터져나왔다. 초기에는 미국 내부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대형 유전이 개발됐다. 석유 공급 부족이 우려될 때마다 튀어나온 일부 석유업자나 전문가들의 ‘자원 고갈’ 우려는 매번 ‘우려’로 끝났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석유 소비가 급격히 늘어 석유시장은 수요 초과 상태였다. 49∼72년 미국의 석유 소비량은 3배, 서유럽은 15배, 일본은 무려 137배나 늘었다. 세계 석유 생산량도 5.5배 늘었지만 소비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71년 “미국의 석유 생산 능력은 100% 가동되고 있다”는 텍사스 철도위원회의 발표는 이를 알려주는 상징이 됐다. 석유 생산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유럽은 경악했다. 국무부의 석유전문가 제임스 아킨스는 73년 “이번에는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위기에 대비한다며 석유비상대책팀까지 편성했다. 중동 산유국들 역시 이 사실을 알았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은 석유의 생산 중단이나 감산이 소비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만일 OPEC가 석유 생산을 중단 또는 감산할 경우 미국 등 서방 제국이 입을 피해는 엄청나다”는 내용이었다. 4차 중동 전쟁이 터진 10월 6일 중동 산유국들은 유가를 10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80년대 시장은 또 한 차례 변화를 보였다. 수요가 대폭 줄면서 다시 공급 과잉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70년대 세계 각국이 실시했던 ‘석유 덜 쓰기’ 정책도 주효했지만 무엇보다 유가 상승으로 세계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공장 가동이 주니 석유 소비도 크게 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 2차 오일 쇼크를 경험한 선진국들은 수입선을 다변화했고 국제 석유회사들은 중동 이외의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고유가에 신음하던 선진국들의 고육지책이 10년 만에 서서히 열매를 맺어갔던 것이다. 80년 9월 터진 이란-이라크 전쟁이 이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전쟁 직후 유가는 한때 배럴당 42달러까지 치솟았다. 전쟁 초기 세계 석유시장에서는 하루 400만 배럴의 석유가 공급되지 않았다. OPEC 생산량의 15%, 서방 제국 수요의 8%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3차 오일 쇼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치솟던 유가는 곧 꺼지더니 계속 하향곡선을 그렸다. 86년에는 급기야 OPEC의 가격 카르텔마저 붕괴되며 유가는 대폭락을 기록했다. 86년 7월 유가는 8달러를 밑돌아 바닥에 이르렀다. 이제 80년대 초·중반 시작된 공급 과잉 시대는 끝나고 다시 ‘수요 초과’의 시대가 온 것일까? 대체로 ‘그렇다’는 해석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투기자본의 침투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역사적으로 위기와 함께 유가가 오르면 늘 투기자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IEA는 주요 나라의 정부와 석유회사에 불필요한 구매를 자제할 것을 정식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수요 초과 기간은 언제까지일까? 국제통화기금(IMF)은 “당분간 석유의 수급을 맞추기는 어렵다”며 “세계경제는 앞으로 20년간 고유가에 적응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70년대 수요 초과기의 두 배다. 세계는 지난 70년대 고유가를 어렵게 이겨냈다. 불황을 겪으며 석유 소비를 줄이고 새로운 유정을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유정의 출현을 기대하지만 당분간은 그때의 노력과 고통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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