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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비관 ‘지하철 자살’ 급증 기관사는 노이로제

경제난 비관 ‘지하철 자살’ 급증 기관사는 노이로제

지하철 기관사들은 과로뿐 아니라 자살자 급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만 수십만 가지가 넘는 직업이 있다. 별의별 희한한 직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종일 땅속을 누비고 다니는 직업이 있다. 지하철 기관사. 두더지 인생이 따로 없다. 출퇴근 때 최대 3000명의 승객을 싣고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 기관사의 하루를 체험해 봤다. 9월 초 서울 지하철 3호선 지축기지를 방문했다. 지축 승무사무소 이찬용(57) 소장의 안내로 지하철 현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그런 다음 지축역에서 수서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승객으로만 타다 맨 앞 기관사실에 타니 느낌부터 달랐다. 객실에 있을 때보다 역과 역 사이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역간 거리가 평균 2~3분밖에 안 돼 직선 코스의 경우 다음 역이 훤히 보이는 곳도 있다. 서울시 지하철은 이원화돼 있다. 1~4호선은 서울지하철공사 소속이고, 5~8호선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운영한다. 1~4호선은 승무원이 두 명 탑승한다. 맨 앞 칸에 기관사, 맨 뒤 칸에 차장이 탄다. 기관사는 운전만 한다. 뒤 칸의 차장은 문 개폐와 안내방송 등 운행 보조업무를 한다. 그러나 도시철도공사 소속 지하철은 기관사 한 명이 모든 일을 다한다. 차장이 없다. 5~8호선은 역사 설계부터 차량의 기능까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지하철이다. 이 때문에 도시철도공사의 기관사 비용도 지하철공사의 절반이다.

기관사 60% 자살 사고 경험 기관사의 운전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정거장이 2~3분 거리에 있어 오른손(제동핸들)과 왼손(가속기)을 사용해 운전을 하며 가끔 사령실이나 뒤 칸 차장과 무전교신을 하는 게 전부다. 버스나 트럭 운전보다 훨씬 쉬워 보였다. 레일만 따라가면 되고, 교통혼잡이나 신호등도 없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2003년 도시철도공사 파업 때 ‘지하철 기관사 업무가 얼마나 쉬운데…’라며 기관사 비하 발언을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일반인이 생각해도 매우 쉬워 보였다. 그러나 지하철 기관사들은 섭섭해 한다. 종일 땅속을 누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일반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식사와 제때 해소하지 못하는 생리현상, 위장병·두통 등은 기관사들이 겪는 공통된 어려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갈수록 늘어나는 투신자살에 대한 공포감이다. 한 해 동안 서울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하거나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은 50~60명에 달한다. 서울지하철공사의 경우 지난해 1년 동안 28명이 자살했는데 올해는 8월 말 현재 벌써 21명에 달한다. 도시철도공사도 12건에 이른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투신이 부쩍 늘어났다는 게 공사 측 설명이다.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기관사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종일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운전대 잡기가 겁난다. 지난해 인제대 서울백병원 우종민 교수팀이 기관사 62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기관사의 60%가 운행 중 승객이 선로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등의 사고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사고 경험 기관사의 15% 정도가 심각한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기관사들은 악몽과 환각·과민반응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 요즘은 119 구조대가 신속하게 처리해 주지만 7~8년 전만 해도 기관사가 직접 철로에 내려가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가장 처참한 사고 현장이 철도사고 현장이다. 그야말로 못 볼 꼴을 보는 것이다. 자살 기도는 주로 봄·가을, 그리고 연말연시에 발생한다. 한 번 발생하면 연달아 일어나는 것도 특징이다. 복잡한 역보다 한적한 역에서 기둥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현재 서울지하철공사 소속 기관사 1000여 명 중 60% 이상이 이런 경험이 있다. 어떤 기관사는 무려 17번이나 있다고 한다. 그 기관사의 경찰 신원조회서를 보면 온통 시커멓다. 사건이 날 때마다 기록됐기 때문이다. 과실은 아니지만 일단 경찰에 출두해 조서를 써야 하는 것도 괴로운 일 중 하나다. 기관사 사이에 ‘기관사 생활 하면서 세 번은 채운다’는 징크스도 있다. 이 때문에 기관사들은 역에 진입할 때 잔뜩 긴장한다. 기자도 기관실에 앉아 역에 진입할 때 보니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다. 젊은 층과 학생들은 열차가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선 가까이서 장난 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안전선에 바짝 다가서 신문을 읽는 승객도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기자 역시 역에 진입할 때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기관사의 하루 순수 운전시간은 대략 4시간30분이다. 3호선의 경우 대화~수서 구간을 1.5회 왕복한다. 1왕복하고 휴게실에서 2~3시간 쉬다 다시 편도 운행하고 교대하거나 차량기지에 입고시킨다. 지하철은 오전 5시30분부터 새벽 1시까지 운행된다. 기관사의 근무시간은 불규칙할 수밖에 없다. 저녁·야간·주말은 물론이고 추석 등 명절에도 근무해야 한다. 기관사의 월급은 어느 정도일까. 흔히 지하철공사 직원은 급여가 높고, 특히 기관사는 일반 직원에 비해 임금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일반 시민은 “월급도 많이 받는 철밥통 공사 직원들이 툭하면 파업을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20년 정도 근무한 기관사의 연봉이 대기업 부장급 정도로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체력단련비·열차승무수당·초과근무수당 등 제 수당이 포함돼 있다. 한 기관사는 “총액만 놓고 보지 말고 일의 강도나 불규칙한 근무형태를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서울지하철공사 소속 직원은 1만 명. 이중 승무원(기관사+차장)은 20% 정도인데 순수 기관사는 1000명 정도로 기관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빚이 많은 지하철공사는 최근 8년 동안 직원을 채용하지 않았다. 지하철공사 기관사는 공사 설립 초기 몇 년은 철도청 출신들로 채우다 자체 인력을 교육해 투입해 왔다. 6개월 교육과 3000㎞ 실습 후 투입한다. 기관사 양성에 관한 법률이 올해에야 제정돼 내년부터는 건설교통부 장관의 정식 면허증이 발급된다. 지난 8년 동안 신규 채용이 이뤄지지 않아 기관사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서울지하철공사 기관사 1000명 중 30대 기관사는 고작 20여 명이다. 나머지는 40~50대다. 40대 중반 이후가 거의 대부분이어서 젊은 피 수혈이 절실하다.

30대 기관사 20명뿐 이찬용 지축 승무사무소 소장은 “지축 승무사무소의 경우 40대 중반 기관사가 막내”라면서 “후배를 받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기관사가 많다”고 말했다. 가끔 ‘철도 기관사 박 아무개가 짧은 기간에 100만㎞ 무사고를 달성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대단한 업적이고 당연히 축하받아야 할 경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관사들은 ‘축하할 일이 절대 아니다’라는 반응이다. 얼마나 열악한 환경(기관사 부족이 심각한 상황)에서 혹사당했으면 단기간에 그런 대기록을 달성했겠느냐는 자조적인 푸념이다. 기관사들은 “철도 선진국의 경우 이런 기록달성이 별 의미가 없고, 그리 자주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무사고 달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안전운행을 할 수 있는 안전교육과 노후차량 정비 등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지하철공사 구간인 1~4호선 중 국철 구간이 많은 1호선과 4호선은 그래도 노후 차량이 어느 정도 교체됐다. 그러나 순수 지하철 구간을 달리는 2호선은 노후화가 심각하다. 3호선도 교체할 차량이 많다. 그러나 량당 100억원에 달하는 지하철 차량을 이른 시일 안에 교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낡은 전동차와 불규칙한 근무형태, 만성적인 기관사 부족, 투신자살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지하철 기관사들은 ‘오늘도 무사히’를 빌며 땅속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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