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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형제의 난’
‘아들 사랑에 무너진 형제 경영’

두산, ‘형제의 난’
‘아들 사랑에 무너진 형제 경영’

두산사태가 각종 음해와 비리가 양산되는 등 점입가경이다. 이 과정에서 속속 폭로되는 오너 일가의 비리는 국내 최고(最古)인 10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그룹에 대한 신뢰를 끝없이 떨어뜨리고 있다. ‘가족경영’의 전통을 지키며 장수해온 두산의 오너들 사이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지난 7월 18일. 두산은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신임 그룹 회장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계에서는 두산의 ‘가족 경영’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는 것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불과 3일 뒤인 21일 박용오 전 회장 측이 박용성 신임 회장 측의 비자금 조성 등 비리 의혹을 담은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형제 간의 갈등은 본격화됐다.

박 회장 측은 즉각 박 전 회장의 진정 내용을 반박함과 동시에 그룹 명예회장 직을 박탈하고 가문에서 파문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두산 측은 또 박 전 회장 재직 시절 두산산업개발 분식회계 사실을 고백했고, 박 전 회장 측은 이에 맞서 회삿돈으로 오너들이 대출 이자를 대납했다고 폭로하는 등 형제 간의 골은 갈수록 깊어가는 양상이다.

‘박용오 조연, 박경원 주연?’

박용오 전 회장이 그룹경영의 의혹을 제기하는 투서를 검찰에 제출하고, 회삿돈으로 오너 일가의 대출 이자를 대납한 사실을 폭로한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다. 두산 관계자들도 사건이 터지자 박 전 회장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자신의 발등을 찍어가며 검찰에 투서를 했다는 점도 의문이다. 박 전 회장이 제기한 문제들은 그가 그룹경영을 총괄할 때 벌어진 것이었다.

특히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두산 대표이사를 맡았던 시점이어서 투서 내용에 따라 책임을 비켜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회사 측이 오너들의 대출 이자를 대납한 사건도 자신과 자신의 두 아들이 모두 포함된 ‘자살 테러’ 수준이었다. 박 전 회장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낙천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폭탄을 들고 두산을 향해 뛰어가게 된 속내는 뭘까.

박용오 전 회장의 장남 경원 씨는 사건이 터진 후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와의 인터뷰에서 “박용성-용만 삼촌들이 저지른 비자금 사태가 이미 덮을 수 없는 상황까지 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박용성-용만 형제의 최측근은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을 거꾸로 “지난해 6월 부인과 사별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박 전 회장을 장남인 경원 씨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형제의 난’ 핵심 인물로 지목된 박경원 전신전자 부회장은 두산가 4세 가운데 유일하게 ‘두산 명함’이 없다. 2002년 그룹을 떠나 벤처업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박 부회장은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두산건설(현 두산산업개발)에 입사해 99년 두산건설에서 임원으로 승진했다.

박경원 씨가 벤처 투자에 나선 것은 2000년 벤처 붐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경원 씨는 조지워싱턴대 MBA 시절 만난 쌍용가의 막내 김석동(전 굿모닝증권 사장)곀祁옴?허용수 씨 등과 함께 케이아이티비를 2002년 초에 인수했다. 케이아이티비를 통해 잇츠티비도 인수했다.

케이아이티비는 셋톱박스 제조, 잇츠티비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다. 두산 측은 “처음에는 자금조달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케이아이티비는 이후 찾아온 정보기술(IT) 경기의 불황과 셋톱박스 사업의 쇠퇴로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3자에게 다시 매각되고 만다. 잇츠티비도 지난해 매출은 6억원에 그쳤고 손실규모는 100억원을 넘어섰다. 결국 경원 씨의 벤처 투자는 실패를 맛본 셈이다.

2002년 초 두산을 완전히 박차고 나갔던 경원 씨는 그 해 3월 단독으로 50억원을 들여 CCTV 제조업체인 전신전자를 인수했다. 전신전자는 종업원 60여 명 규모의 중소기업이다. 전신전자는 2002년 12억원, 2003년 5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으며, 지난해에 7억원의 흑자로 반전됐다. 경원 씨의 독립 과정은 전체 두산가에서 박용오 전 회장 일가의 지분만 대폭 줄어들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지난 8월 10일 현재 박두병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 일가는 ㈜두산과 두산산업개발 지분 등 334억원어치의 두산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다. 3남인 박용성 두산 회장 일가와 4남인 박용현 서울대 의대 교수 일가, 5남인 박용만 두산 부회장 일가는 각각 215억원어치의 지분을 갖고 있다. 32년 전 두산의 고(故) 박두병 초대회장으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남을 제외한 3남?남?남 일가의 지분평가액이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차남인 박용오 전 두산 회장 일가는 다르다. 박 전 회장이 소유한 ㈜두산 지분(1.7%)의 평가액이 59억원에 불과하다. 박 전 회장의 장남인 경원 씨는 두산 관련 지분이 아예 없고, 차남인 중원 씨가 50억원어치가량의 두산산업개발 등 두산 관계사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경원 씨가 보유한 전신전자 지분 평가액은 28억원가량. 이들 가족의 주식을 모두 합쳐도 137억원으로 나머지 형제 일가보다 78억원 정도 적다.

박 전 회장 일가의 지분 평가액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도 2001년 박경원 씨가 벤처 투자에 열을 올릴 때와 맞물린다. 박 전 회장은 2001년 2월 16일 두산 지분을 팔기 시작해 그 해 말까지 총 28억원어치를 팔았다. 두산 오너 일가 가운데 박 전 회장만이 그 해에 지분을 매각했다. 박 전 회장이 주식을 판 이듬해인 2002년 3월 경원 씨가 50억원을 들여 코스닥 등록기업인 전신전자의 지분을 취득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현재 경원 씨가 가지고 있는 전신전자의 지분 평가액도 2002년 50억원에 인수한 것과 비교하면 절반가량 감소했다. 반면 이 기간 동안 다른 형제 일가들은 두산산업개발의 주가상승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지분 평가액이 늘어갔다. 두산산업개발은 두산건설과 고려산업개발 합병 당시 주당 2,060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7월엔 주당 7,000원대로 치솟았다가, 최근 두산 사태 이후 6,000원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특히 두산산업개발의 대주주는 대부분 오너 일가의 ‘원(原)’자 돌림 4세들이다. 이들이 가진 두산산업개발 지분은 집안 장손이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인 박정원(62억8,000만원) 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20억~40억원대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4세들의 며느리까지 ‘골고루’ 나눠 갖고 있는 두산산업개발 지분을 경원 씨만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박경원 씨 측근은 “박경원-중원 두 형제는 지분 배분에서도 불이익을 받았다”고 했다. 박 전 회장 역시 두산 지분이 4세들에게 본격 이동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가장 힘든 시절 회사를 맡아 10년 가까이 그룹 회장으로 일했던 박 전 회장으로서는 가족들이 박용곤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데다 자신은 이렇다 할 경영상의 지분도 없는 데 대해 서운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또 ‘공동소유, 공동경영’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장손인 조카 정원 씨를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으로 추대하자 더욱 화가 났을 수도 있다.

박경원 씨와 삼촌 박용만 부회장 간에는 미묘한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용만 부회장은 경원 씨가 독립할 당시 두산의 전략기획실 사장이었다. 두산 오너 일가 중 한 명은 “경원 씨는 삼촌 박용만 부회장이 아버지(박용오) 밑에서 두산의 ‘전략가’로서 갖은 M&A를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한 데 반해 자신은 중소기업 사장에 머물렀고, 자신의 사업이 어려울 때 외면받았던 것에 대한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룹의 실무를 맡고 있는 박용만 부회장의 태도도 박 전 회장의 화를 돋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용만 부회장은 오너 일가지만 그룹의 전문경영인 역할을 해왔다. 평소 4세인 조카들에게 선친의 유지에 따라 ‘공동소유, 공동경영’에 어긋나는 한치의 행동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못박아 두던 차였다. 두산 관계자는 “박용오 전 회장이 수차례 두산산업개발을 요구했지만 박용성-용만 형제가 박용곤 ‘큰형님’을 찾아가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원 부회장으로서는 아버지인 박 전 회장 외에는 동조 세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두산의 핵심 정보를 다루고 있는 경영전략본부는 오래 전부터 박용만 부회장이 통제해왔기 때문에 ‘이탈세력’이 없다.
박용오-경원 부자 대신 검찰에 진정서를 낸 사람은 춘천CC의 손병춘 전 상무다. 두산건설의 중장비 기사 출신인 그가 이례적으로 상무에까지 오른 것은 박용오 전 회장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실제 박 전 회장은 얼마 전부터 회사보다는 두산에서 운영하는 춘천골프장을 더 자주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의 골프 실력은 한때 핸디 6을 칠 정도로 수준급이다. 지금도 핸디 12 정도는 치는 실력을 자랑한다. 반면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은 골프를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일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박용오 씨의 폭로가 있은 다음날 박용성 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박 전 회장을 두고 “춘천CC(컨트리클럽)에만 있었던 사람이 도대체 뭘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다.

공동경영 공동소유 시스템의 오류

두산 일가족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가족모임을 갖는다. 오너 4세들끼리는 분기별로 따로 한 번씩 모인다. 4세 모임은 현재 박정원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지난 7월 17일 저녁에는 급박하게 가족모임이 열렸다. 박용곤 명예회장은 “둘째(박용오 전 회장) 나이가 70세이고, 그룹 회장을 10년가량 했다”며 “이제 셋째(박용성 회장)가 할 차례”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용오 전 회장은 “그러면 두산산업개발을 달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에 앞서 다른 형제들은 박용오 전 회장이 10년가량 회장직을 수행하며 ‘사심’을 보이고 있다고 우려하던 차였다. 다른 가족들이 난색을 표하자 박 전 회장은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두산은 누구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재산권의 행사대상이 아니다. 재산권 행사는 소유한 주식을 시장에 팔아서 현금화하는것 뿐이다. (설령 넘겨준다고 하더라도) 박용오 씨 지분으로 볼 때 두산산업개발을 사유화하는 것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기업 재산을 형제간 합의에 의해 한 사람의 전유물로 전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의 반발은 예상밖으로 강했다. 10년 동안 그룹 회장직을 수행한 박 전 회장은 그룹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가족회의에서도 이런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결론은 되풀이됐다.
‘만약 두산산업개발을 넘겨주거나 다른 타협점을 제시한다면 제2, 제3의 박용오가 나온다. 그러면 그것은 재산 문제가 아니라 선친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100년 넘은 기업 정신의 퇴보다. 그러니 어떤 희생이 따르고, 우리의 과거 문제가 다 드러나 몰매를 맞더라도 미래를 희생시키는 타협은 할 수 없다.’

박 전 회장이 첫 번째 폭로한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서는 박용성-용만 형제 측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용오 전 회장 역시 화해의 악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용성-용만 형제 측에서 날아온 것은 박 전 회장 시절 이뤄진 ‘분식회계 고백’이었다. 박 전 회장은 ‘비장의 무기’였던 회삿돈으로 오너들이 대출이자를 대납했다고 폭로했다. 두산 관계자는 물론 오너 일가들도 설마 그 정도까지 터트릴 줄은 몰랐다.

타협은 불가능했을까. 박용성-용만 형제의 측근은 “목적을 가지고 하는 공격이라 화해가 불가능했다. 그 쪽에서 먼저 의도적으로 대화를 끊었다. 어느 정도 상처를 줘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밝혔다. 반면 박용오 전 회장 측은 “대화를 박용성-용만 형제가 끊었다”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의 반발은 경영권을 3세에서 4세로 넘기는 작업이 본격화하는 초기에 발생했다. 한진그룹 등 다른 그룹들이 계열분리를 통해 형제 간 분할구도를 사전에 마련한 것과 달리 ‘공동소유, 공동경영’이란 원칙에 지나치게 매달린 결과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오너들의 모럴해저드 바뀌어야

두산 측은 “이번 사건은 박 전 회장의 장남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빚어낸 사건이지 공동 경영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현재까지 폭로된 대로 분식회계 후 배당금 지급, 오너 일가의 이자금 대납 등 오너들의 모럴해저드가 결국은 박용오-경원 부자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은 부인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구조조정 기간이 너무 길어 두산이 내부 정비 시기를 놓친 게 화근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두산은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인 1995년부터 구조조정을 시작했다”며 “수많은 회사를 구조조정하고 M&A하는 과정에서 두산으로서는 내부 잡음이 생겨도 해결하기보다는 숨기는 데 급급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산은 효자 사업군이었던 코카콜라 ·코닥 등은 물론 OB맥주 지분도 팔면서 구조조정을 했다. 그 뒤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 대우종합기계 등을 인수해 중후장대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로 두산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다.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는 박용성 두산 회장 역시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형제 간의 분쟁이 그치지 않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과거 두산은 페놀 사건 이후 미래지향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들었다. 지금은 그 이상의 위기에 처해 있다. 폭로된 내용의 잘잘못은 검찰이 따져야 할 문제지만, 이번 폭로로 입게 된 주주들의 피해를 책임지고, 이미 싸늘해진 민심을 회복하는 것은 두산 오너 일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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