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왕따 당하는 JAPAN
아시아에서 왕따 당하는 JAPAN
A Very Lonely Japan
일본인들은 모든 외국인 방문객으로부터 듣기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편이다. 지난 9월 도쿄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간과한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주최 측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통렬한 결론마저 내렸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진정한 우방이 많지 않다.”
일본인 청중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슈미트는 “과거에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하는 문제만 나오면 일본인들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슈미트의 말에서도 일본인 청중은 그다지 위로를 찾지 못한 듯했다.
일본 언론이 그의 강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은 일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더 지독한 비판에도 익숙해져야 할 듯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또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전쟁 희생자 247만 명을 기리는 곳이다. 중국과 한국은 격렬한 어조로 분노를 표출하고는 항의의 표시로 외교 일정을 취소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한때 일본의 우방이던 나라들마저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진행돼 온 일본의 외교적 고립이 더 깊어질 전망이다.
종전 이후 60년 동안 일본의 전시 행동이 지금처럼 큰 문제가 됐던 적은 없었다. 지난주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전처럼 격렬한 가두시위를 촉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 표명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외부 세계의 인식은 더욱 굳어진다. 게다가 일본은 대다수 이웃 나라와 영토 분쟁을 벌인다. 다른 선진 공업국들에는 없는 일이다.
지난주만 해도 동중국해에서의 석유 시추 문제로 중국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일본 관리들에게 가장 비통한 사건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일이다. 아시아의 주요 나라들 중 일본의 그런 야망을 지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아시아에 투자·원조 차원에서 수십억 달러를 뿌렸는 데도 말이다. 저명한 외교평론가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는 “솔직히 나도 깜짝 놀랐다. 완벽한 실패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일본은 자국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의심과 분노를 어느 정도는 무시했다. 일본이 경제 강대국인 데다 미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 각국의) 그런 적개심이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한다. 시기적으로도 아시아의 지도국이라는 일본의 자부심이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다. 그 결과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맹주의 꿈을 키워 온 일본은 이제 과거의 잘못 때문에 사실상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중국군의 급속한 현대화, 북한의 핵무장, 폭발 잠재력이 큰 각종 영토 분쟁 등 이미 여러 불안정 요인이 발생한 시점에서 아시아로선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1995년 일본의 침략 행위 희생자들에게 사죄함으로써 후대의 모든 공식적 사죄 표현의 황금 기준을 세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이웃 나라들에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고 치료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일본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일본은 전후 평화주의가 뿌리내려 군국주의의 부활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 일본은 전시에 저지른 일을 거듭 사과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도쿄대 스벤 살러 교수에 따르면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일본인은 1931~45년 자국의 군사행동을 ‘침략 전쟁’으로 기술하는 데 동의한다. 또 지난 8월 초 도쿄에서는 전쟁 당시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로 희생된 외국인 여성들을 기리는 박물관이 개관됐다. 그리고 지난 여름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일(8월 15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바로 그 고이즈미가 전쟁 책임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재천명한 연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국민의 상당수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정확한 범위엔 동의하지 않는다. 고이즈미의 8월 15일 연설로 형성된 호의적인 시선도 그의 신사 참배로 여지없이 사라졌다. 일본의 관리나 정치인이 전쟁과 관련된 사과 표명을 할 때마다 또 다른 관리나 정치인은 선동적인 발언을 일삼는다. 지난 1년간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은 위안부 징용에서 일본군의 역할을 축소한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를 여러 차례 찬양했다. 템플대 도쿄 캠퍼스의 제프 킹스턴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일본에는 전쟁 책임에 관한 합의가 없다. 기억에 합의하지 못하면 책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면 화해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왜 이런 문제가 지금 불거져 나오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사실 합의의 부재는 지난 수십 년간 그래 왔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르다. 첫째, 전쟁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는 제도화한 자기 비난을 ‘피학적 경향’(masochism)이라고 거부하며 미국이 부과한 평화주의도 반대한다. 고이즈미를 포함한 젊은 보수파는 일본을 ‘정상적인 국가’로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 공약에는 일본의 좀 더 적극적인 국제적 역할과, 자위대의 엄청난 군사력을 인정하는 평화헌법 개정도 포함된다.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 고집은 일본이 외국의 요구에 굴복할 때 거부감이 커진다는 현상을 반영한다.
외부 환경도 변했다.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경제 선진국이던 시절, 여타 나라들은 전쟁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는 묵시적 동의의 대가로 일본의 경제 원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다년간의 경제적 번영으로 중국과 한국에 자기 주장이 강해진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면서, 역사는 다시 의제에 포함됐다. 지난 9월 한국의 이해찬 총리는 “우리는 일본 정부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돈은 우리도 많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원하는 것은 진실과 정직성, 그리고 양국 간의 건강한 관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중국과 한국 지도자들은 일본 때리기에 나설 국내적 이유도 충분하다. 대중의 지지를 얻는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상당한 경제·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증거는 지난 몇 달간 많이 등장했다. 지난 4월 중국에서 반일 폭동이 발생하자 일본 증시는 급락했다. 일본 기업들은 대중국 투자 전략을 재검토하고, 다수 기업은 벌써 공장을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나라들로 옮겨 간다. 일본 재계 지도자들은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고 고이즈미를 설득해 왔다. 이는 중국 시장이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신호다.
이웃들과의 계속되는 긴장은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도 약화했다. 일본의 전후 외교전략 기조는 ‘부드러운 힘’(soft power)의 과시다. 일본은 외교의 많은 부분을 인권·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력에 대한 외국의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일본은 유엔을 지탱하는 주요 나라이기도 하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은 일본이 유엔 연간 예산의 약 20%를 부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됐다.
현재의 5개 상임이사국 중 4개국보다 많은 금액을 부담하는 셈이다(일본보다 많은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공식 의안이 지난 8월 유엔 총회에 상정됐을 때 아시아 국가 중 공식적 지지 의사를 표명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부탄·몰디브 등 세 나라뿐이었다(인도·브라질·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건도 포함된 이 의안은 실제 표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 실패는 중국의 집중적인 반대 운동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본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데 역사 문제를 즐겨 활용했다. 후나바시는 “결국 중국은 일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듯 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패권 투쟁에 나선 마당에 이는 강력한 이점이다.
일본은 이 수렁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예상대로 일각에선 일본을 비판하는 측에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모토 마사히로(일본전략연구포럼 부회장)를 포함한 전직 관리·군인들의 한 단체는 일본이 중국에 외교적으로 좀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도 역사적 건망증에 걸려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중점을 대중 외교 쪽으로 돌린다. 최근에는 긍정적인 일본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터넷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는 정책 설명을 위해 웹사이트에 외무성 문서의 복사본을 게재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접근법 중 어느 쪽도 지금 가장 필요한 분야에 주력하지 않는 듯하다. 좀 더 폭넓은 화해 정신과 역사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도쿄게이자이(東京經濟)대 부설 국제 역사·화해연구소의 앤드루 호바트는 독일인들이 전후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한 한 가지 이유로 독일인들이 여타 유럽인들과 민간 차원의 접촉을 많이 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접촉은 교회·시민단체부터 노조·학회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이뤄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엄격한 법규정(예컨대 면세 혜택에 관한 까다로운 조건 등)으로 시민단체들의 성장이 저해됐다. 도쿄 소재 와세다(早稻田)대에서 MBA 과정을 공부 중인 중국인 여성 왕진(30)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왕진은 양국의 성난 친구들에게 일본과 중국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 주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매우 슬프다. 일본과 중국이 독일과 프랑스처럼 되기를 바란다. 독일과 프랑스는 훌륭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서로 나쁜 경험이 있었음에도 더 강해졌다.”
도쿄대의 살러가 지적하듯,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화해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미국과 든든한 동맹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이다. 초강대국을 지정학적 파트너로 삼은 만큼 여타 국가들과 사귈 필요를 못 느꼈다. 1950~70년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중 경제적으로 중요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아시아의 모든 나라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맺는다.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릴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새로운 협력정신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 회담의 목적은 유럽연합(EU)을 대충 모방한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n Community) 건설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좀 더 강력한 아시아의 통합을 추구해 왔다. 안보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인 만큼 새로운 지역 협력을 위한 기회가 성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만들려는 일본의 노력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좌절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With HIDEKO TAKAYAMA and
KAY ITOI in Tokyo
장병걸 cbg58@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일본인들은 모든 외국인 방문객으로부터 듣기 좋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는 편이다. 지난 9월 도쿄에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간과한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주최 측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통렬한 결론마저 내렸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진정한 우방이 많지 않다.”
일본인 청중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슈미트는 “과거에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며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하는 문제만 나오면 일본인들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슈미트의 말에서도 일본인 청중은 그다지 위로를 찾지 못한 듯했다.
일본 언론이 그의 강연 내용을 일절 보도하지 않은 일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더 지독한 비판에도 익숙해져야 할 듯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또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전쟁 희생자 247만 명을 기리는 곳이다. 중국과 한국은 격렬한 어조로 분노를 표출하고는 항의의 표시로 외교 일정을 취소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한때 일본의 우방이던 나라들마저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진행돼 온 일본의 외교적 고립이 더 깊어질 전망이다.
종전 이후 60년 동안 일본의 전시 행동이 지금처럼 큰 문제가 됐던 적은 없었다. 지난주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전처럼 격렬한 가두시위를 촉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 표명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외부 세계의 인식은 더욱 굳어진다. 게다가 일본은 대다수 이웃 나라와 영토 분쟁을 벌인다. 다른 선진 공업국들에는 없는 일이다.
지난주만 해도 동중국해에서의 석유 시추 문제로 중국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일본 관리들에게 가장 비통한 사건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일이다. 아시아의 주요 나라들 중 일본의 그런 야망을 지지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이 지난 반세기 동안 아시아에 투자·원조 차원에서 수십억 달러를 뿌렸는 데도 말이다. 저명한 외교평론가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는 “솔직히 나도 깜짝 놀랐다. 완벽한 실패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일본은 자국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의심과 분노를 어느 정도는 무시했다. 일본이 경제 강대국인 데다 미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 각국의) 그런 적개심이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한다. 시기적으로도 아시아의 지도국이라는 일본의 자부심이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다. 그 결과 20세기 내내 동아시아 맹주의 꿈을 키워 온 일본은 이제 과거의 잘못 때문에 사실상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중국군의 급속한 현대화, 북한의 핵무장, 폭발 잠재력이 큰 각종 영토 분쟁 등 이미 여러 불안정 요인이 발생한 시점에서 아시아로선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1995년 일본의 침략 행위 희생자들에게 사죄함으로써 후대의 모든 공식적 사죄 표현의 황금 기준을 세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이웃 나라들에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고 치료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일본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일본은 전후 평화주의가 뿌리내려 군국주의의 부활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 일본은 전시에 저지른 일을 거듭 사과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도쿄대 스벤 살러 교수에 따르면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일본인은 1931~45년 자국의 군사행동을 ‘침략 전쟁’으로 기술하는 데 동의한다. 또 지난 8월 초 도쿄에서는 전쟁 당시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로 희생된 외국인 여성들을 기리는 박물관이 개관됐다. 그리고 지난 여름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일(8월 15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바로 그 고이즈미가 전쟁 책임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재천명한 연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국민의 상당수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정확한 범위엔 동의하지 않는다. 고이즈미의 8월 15일 연설로 형성된 호의적인 시선도 그의 신사 참배로 여지없이 사라졌다. 일본의 관리나 정치인이 전쟁과 관련된 사과 표명을 할 때마다 또 다른 관리나 정치인은 선동적인 발언을 일삼는다. 지난 1년간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문부과학상은 위안부 징용에서 일본군의 역할을 축소한 수정주의 역사 교과서를 여러 차례 찬양했다. 템플대 도쿄 캠퍼스의 제프 킹스턴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일본에는 전쟁 책임에 관한 합의가 없다. 기억에 합의하지 못하면 책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면 화해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왜 이런 문제가 지금 불거져 나오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사실 합의의 부재는 지난 수십 년간 그래 왔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르다. 첫째, 전쟁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는 제도화한 자기 비난을 ‘피학적 경향’(masochism)이라고 거부하며 미국이 부과한 평화주의도 반대한다. 고이즈미를 포함한 젊은 보수파는 일본을 ‘정상적인 국가’로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 공약에는 일본의 좀 더 적극적인 국제적 역할과, 자위대의 엄청난 군사력을 인정하는 평화헌법 개정도 포함된다. 고이즈미의 신사 참배 고집은 일본이 외국의 요구에 굴복할 때 거부감이 커진다는 현상을 반영한다.
외부 환경도 변했다.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경제 선진국이던 시절, 여타 나라들은 전쟁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는 묵시적 동의의 대가로 일본의 경제 원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다년간의 경제적 번영으로 중국과 한국에 자기 주장이 강해진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면서, 역사는 다시 의제에 포함됐다. 지난 9월 한국의 이해찬 총리는 “우리는 일본 정부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돈은 우리도 많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원하는 것은 진실과 정직성, 그리고 양국 간의 건강한 관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중국과 한국 지도자들은 일본 때리기에 나설 국내적 이유도 충분하다. 대중의 지지를 얻는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상당한 경제·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증거는 지난 몇 달간 많이 등장했다. 지난 4월 중국에서 반일 폭동이 발생하자 일본 증시는 급락했다. 일본 기업들은 대중국 투자 전략을 재검토하고, 다수 기업은 벌써 공장을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나라들로 옮겨 간다. 일본 재계 지도자들은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고 고이즈미를 설득해 왔다. 이는 중국 시장이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신호다.
이웃들과의 계속되는 긴장은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도 약화했다. 일본의 전후 외교전략 기조는 ‘부드러운 힘’(soft power)의 과시다. 일본은 외교의 많은 부분을 인권·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력에 대한 외국의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일본은 유엔을 지탱하는 주요 나라이기도 하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은 일본이 유엔 연간 예산의 약 20%를 부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됐다.
현재의 5개 상임이사국 중 4개국보다 많은 금액을 부담하는 셈이다(일본보다 많은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공식 의안이 지난 8월 유엔 총회에 상정됐을 때 아시아 국가 중 공식적 지지 의사를 표명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부탄·몰디브 등 세 나라뿐이었다(인도·브라질·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건도 포함된 이 의안은 실제 표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노력 실패는 중국의 집중적인 반대 운동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본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데 역사 문제를 즐겨 활용했다. 후나바시는 “결국 중국은 일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듯 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패권 투쟁에 나선 마당에 이는 강력한 이점이다.
일본은 이 수렁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예상대로 일각에선 일본을 비판하는 측에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카모토 마사히로(일본전략연구포럼 부회장)를 포함한 전직 관리·군인들의 한 단체는 일본이 중국에 외교적으로 좀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도 역사적 건망증에 걸려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중점을 대중 외교 쪽으로 돌린다. 최근에는 긍정적인 일본 이미지를 선전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터넷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는 정책 설명을 위해 웹사이트에 외무성 문서의 복사본을 게재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접근법 중 어느 쪽도 지금 가장 필요한 분야에 주력하지 않는 듯하다. 좀 더 폭넓은 화해 정신과 역사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도쿄게이자이(東京經濟)대 부설 국제 역사·화해연구소의 앤드루 호바트는 독일인들이 전후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한 한 가지 이유로 독일인들이 여타 유럽인들과 민간 차원의 접촉을 많이 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접촉은 교회·시민단체부터 노조·학회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이뤄졌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엄격한 법규정(예컨대 면세 혜택에 관한 까다로운 조건 등)으로 시민단체들의 성장이 저해됐다. 도쿄 소재 와세다(早稻田)대에서 MBA 과정을 공부 중인 중국인 여성 왕진(30)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왕진은 양국의 성난 친구들에게 일본과 중국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꿔 주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매우 슬프다. 일본과 중국이 독일과 프랑스처럼 되기를 바란다. 독일과 프랑스는 훌륭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서로 나쁜 경험이 있었음에도 더 강해졌다.”
도쿄대의 살러가 지적하듯,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화해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미국과 든든한 동맹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이다. 초강대국을 지정학적 파트너로 삼은 만큼 여타 국가들과 사귈 필요를 못 느꼈다. 1950~70년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중 경제적으로 중요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아시아의 모든 나라와 긴밀한 경제 관계를 맺는다.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릴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새로운 협력정신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 회담의 목적은 유럽연합(EU)을 대충 모방한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n Community) 건설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좀 더 강력한 아시아의 통합을 추구해 왔다. 안보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인 만큼 새로운 지역 협력을 위한 기회가 성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를 만들려는 일본의 노력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좌절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With HIDEKO TAKAYAMA and
KAY ITOI in Tokyo
장병걸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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