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걸 8인의 자화상
How I Got There
오프라 윈프리미디어 기업인
나는 미국 대중과 함께 성장했으며 지금의 성공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음을 누구나 안다. 첫발을 내디딜 때 내 목표는 그냥 직장을 잡는 일이었다. 19세였으며 TV에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직장의 연봉은 1만 달러였다. ‘내 나이만큼 벌기’를 원했으며 22세 때 2만2000달러를 받았다.
볼티모어의 TV 방송국 화장실에서 친구 게일과 함께 펄쩍펄쩍 뛰며 “야호, 40세가 되면 4만 달러를 번다니 상상이나 하겠니”라며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나 자신의 프로를 맡은 후 내가 뭔가 좋은 일을 위해 힘이 될 세력기반을 지녔다고 깨달았다. 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행동하며 세상에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세상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리라고.
그 프로가 성공한 이유는 내가 항상 진실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과 희망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고통과 희망의 핵심을 이해한다. 수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누구나 모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이해와 공감은 정말 내게 날개를 달아줬다. 내가 어느 누구와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존경심과 존엄성을 유지하며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사생활에서의 행동, 방송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내용에 관해 상당히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118개국의 수백만 명이 내 말에 귀기울이며 그들은 모두 내가 한 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송을 할 때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 지상에서 누렸던 시간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더 적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 수명을 50년 더 연장시켜 주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인식이 박진감과 끊임없는 자극을 준다.
성공은 자신의 인격을 들여다보는 확대경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더 강해지게 된다.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진짜 이점은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대신 중요한 문제에 더 신경을 쏟게 해준다는 점이다. 인간성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나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지상에서의 내 존재를 어떻게 활용할까. 내 정신적 에너지를 인격과 어떻게 일치시키고, 영혼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인격을 어떻게 활용할까. 답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귀착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성장을 이뤄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을 편히 느끼지 못한다면 움직임·말·행동·존재가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만난 여성 지도자들은 모두 남자들보다 더 직관적인 지도력을 지녔다. 나는 거의 전적으로 직관에 의존한다. 사업상 단 한 번 틀린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본능을 따르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다. 때로는 말 그대로 기도를 하지만 때로는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려 여전히 느낌이 같은지를 본다. 의구심이 생기면 보통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의구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아주 정말로 거기에 철저히 맞춰져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만큼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고 언제나 여성들에게 말한다. 속이 빈 채로 활동하면 자신이나 가족 또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휴식 없이 너무 오래 일만 하면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휘발유가 바닥난 엔진과 같다. 활기차고 명료하며 청중들과 교감을 유지할 만한 신체적 능력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게는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강아지와 함께 숲 속을 산책할 시간 말이다. 참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도 그렇다. 내 우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 그것은 내게 필수적이다.
지금은 남아공에서 하게 될 일 때문에 크게 들떠 있다. 나는 수백만 소녀들의 앞날을 바꿀 것이다. 그들에게 교육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로, 시골로, 잊혀진 곳으로 찾아가 세상의 탁월한 지도자가 될 잠재력을 지닌 소녀들을 찾아낼 계획이다. 리더십 아카데미를 세울 작정이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소녀와 여성들의 미래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뒤바꿀 힘은 그것뿐이다.
매일 내 방송과 잡지를 통해 수백만 명에게 생각을 전달할 연단을 가졌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하는 일에서 영감을 얻는다. 최근 우리 프로그램 중 시청자들에게 아동 학대범들의 추적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48시간도 안 돼 우리가 소개했던 남자들 중 두 명을 붙잡았다. 아동 학대 피해자였던 나를 비롯한 수백만 명에게 그것은 의미가 컸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자신의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을 때 메아리가 울린다. 주제가 학교든 책이든 그냥 아이디어든 상관없다. 그게 바로 재미 아닌가. 그게 바로 진정한 삶의 의미다. 당당하고 충만한 삶 말이다.
베라 왕 패션 디자이너
내가 속하고 싶은 세계가 있었지만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최신 유행에 무척 민감했다. 덕분에 나는 패션을 사랑하며 자랐다. 세라 로렌스 칼리지 3~4학년 때는 파리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살다 보면 패션을 외면할 수 없다. 난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바닥 청소도 좋고 봉투에 침 바르는 일이라도 좋았다. 그저 패션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여름방학 때는 뉴욕 매디슨가의 이브생로랑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때 보그지 편집자 프랜시스 패티키 스타인을 만났다. 스타인은 학교를 졸업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취직했다. 스타인은 내게 특별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그 출근 첫날 이브생로랑을 입고, 손톱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였는데 그것이 당시 파리 젊은 여성들의 유행이었다. 편집 간부들이 나를 보고 말했다. “지저분한 일을 하게 될 테니 집에 가서 갈아입고 와요.” 나는 청바지로 갈아입고 왔다. 내 꿈이 이뤄졌다.
보그에 다니면 보게 되는 것이 많고 나만 알게 되는 일도 있어 아주 매력적인 직장이다. 뭐라 설명할 수도 없는 세계다. 원래 1~2년 다니다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16년을 다녔다. 그러는 동안 보그 역대 최연소 간부 가운데 하나가 됐다. 스물세 살에 부장이 됐고, 이어 파리에서 내는 아메리칸 보그의 유럽 편집인이 됐다.
내겐 전부터 어떤 안목이 있는데 보그에서 그 안목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안목이란 뭔가 낡은 것을 새롭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패션에서는 시도하지 않은 일이 없다. 요컨대 패션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새로움을 부여하느냐가 관건이다. 다시 말해, 와이셔츠는 어디까지나 와이셔츠지만 어떻게 입느냐? 그것이 편집자가 항상 추구하는 목표다. 한정된 순간에 패션의 마술을 포착해야 하는 사진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마흔 살이 다 됐을 때 결혼을 하고 내 사업을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아예 신부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발판을 마련해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가게 임대료를 내고 자신만의 호흡으로 성장하도록 해줄 그 무엇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신부복이었다.
처음에는 겁이 났다. 랠프 로렌의 디자인 책임자로 일하면서 제품을 만들어 제때 매장에 공급해 판매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직접 봤다. 재능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닌지라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때를 맞추는 일도 중요하다. 고객의 관심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언론의 눈을 끄는 매력도 갖춰야 한다. 가게 임대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집세를 어찌 감당할지 막막해 이것이 바로 사형집행장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단번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손님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사업을 일궈나갔다.
이제는 전부터 늘 이 일을 해온 듯한 느낌이 든다. 때로는 딸들이 사무실에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아이들은 오전 6시45분에 학교에 가고 그 시간에 나는 보통 잠을 잔다. 밤에 집에 돌아오면 자지 않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앉아 밤 11시부터 2시까지 디자인을 한다. 나만의 창작력이 샘솟는 시간이다. 낮에는 손님들 상대하느라 바쁘다. 우리 바깥양반은 남편으로나 애 아빠로 모두 100점 만점의 배우자다. 자기 일에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직업이 없다면 나 같은 부인을 참고 견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카페인 음료를 마시지 않지만 밤에 칵테일은 좋아한다. 사과 마티니를 좋아한다.
여자는 지휘방식이 남자와 다르다. 나는 직원들과 많은 것을 함께 나누려고 애쓴다. 사업의 고통,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내게 의존하는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등 모든 것을 느낀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항상 그런 점을 고려한다. 예술과 상업이란 종종 상충하는 개념이다. 최신 디자인이라고 반드시 잘 팔리지는 않기 때문에 절충이 필요하다. 균형을 찾아야 한다. 몹시 어려운 일이다.
캐런 휴스 미 국무부 홍보외교 담당 차관
여성들이 조언을 요청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기본 원칙을 명확히 하라는 얘기다. 하루 10시간만 일하고 싶은데 업무 특성상 15시간 일해야 한다면 그 직장을 택하기는 곤란하다. 내가 백악관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논의했던 문제 중 하나가 근로시간이었다. 전화기를 들어 대통령 당선자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열심히 장시간 일할 생각이지만 동시에 가정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일자리는 중요하다. 내 인생의 태반, 생계 유지를 위해 일자리는 필요했다. 그러나 직업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내 책무는 가족과, 내가 갖기로 선택한 아이다. 내 일자리가 그런 책무 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점이 있다.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 그 말에 귀기울이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주인을 만나야 한다. 주지사에서 대통령이 된 나의 상사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나와 같았다. 함께 일하게 된 뒤로 그분은 엄마나 아빠는 가정을 꾸려가는 일이 첫째 임무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근무처마다 내게 많은 융통성을 부여하고 많은 기회를 준 상사를 만났으니 큰 복이라 하겠다. 대통령 선거유세 때 아들을 데리고 다니라고 허락한 일이 그 일례다.
익히 상상할 수 있지만,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은 워낙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에 가까운 측근이 와서 “그런데 제 애를 데려와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시 주지사는 고맙게도 즉석에서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선거유세에 아들을 데리고 다닌 일은 내 평생의 이력에서 가장 보람된 체험이었다. 고위직 여성의 입장에서 우리 가족만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남의 가족을 개의치 않았다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자기 가족을 최우선시해도 좋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나는 매주 한 번꼴로 오후에 좀 일찍 퇴근하는 ‘주중의 짬’을 얻어내려 애썼다. 어느 기자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사를 썼다. 나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이 같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신호가 되겠다 싶었다.
워싱턴에 갈 때는 대통령 보좌진의 일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이 워싱턴 생활이 싫다고 해서 텍사스로 되돌아가겠다고 결심했고 그 바람에 사람들은 나를 지도자로, 특히 직장과 가정의 균형 문제에 대한 지도자로 생각하게 됐나 보다. 오스틴에서는 어느 주부가 길 가는 나를 막고 자기 딸에게 소개하면서 말했다. “제 딸이 커서 댁처럼 되기를 원해요.” 그런 기대에 걸맞게 살아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백악관을 떠난 뒤로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텍사스 집에 살면서 밥상을 차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밥상을 잘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의는 다했다. 보통 때보다 열심히 했다.
우리 아들이 대학 진학한 뒤에는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해 봤다. 그런데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홍보외교 일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내가 아직 백악관에서 근무할 때 시작했던 일이다. 9·11 이후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와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었다. 나는 하반기에 아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에나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시기를 앞당겼다.
취임식 참석차 워싱턴에 갔을 때 아들과 아침식사를 함께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말했다. “엄마가 하셔야 될 것 같아요.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문제잖아요. 또 우리 세대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아이의 세대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셰일라 백스터 육군 준장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부모님이다. 우리 다섯 남매에게 강력한 신앙심을 주입했다. 프랭클린은 작은 읍이라 우리는 사촌끼리 모두 알고 지내며 자랐다. 나는 농구에 재능을 보였다. 남자 사촌형제들이 농구를 가르쳐줬다. 사내아이들 틈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흑백 차별이 폐지된 뒤 1972년 고등학교 축제에서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여왕에 뽑혔다. 한 친구가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해냈다. 그 남학생은 “우리가 단 한 사람만 선택하면 내년에 이길 수 있어. 셰일라를 후보로 밀자”고 말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개표 결과가 믿기지 않았던지 집계를 두 번이나 했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버지니아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체육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사촌 샌드라 백스터가 포트 브래그에서 근무하는 대위와 결혼했다. 우리는 부대로 그를 보러 갔는데 그때 영감을 얻었다. 부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ROTC에 들어가기로 했다. 여학생은 몇 안 됐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선택이었다. 학군단장 조나 매키 대령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라서 장교를 육성할 줄 알았다.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고 지금도 그 점에 대해 감사 드린다. 처음 육군에 들어갔을 때는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주둔하는 부대의 소위였다.
우리 대대장은 로버트 볼스 중령이었다. 어느 날 나를 불렀다. “백스터 소위, 20년 계획을 제출하게.” 내 대답은 이랬다. “대대장님, 전 20분 뒤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볼스 중령의 말은 내 미래를 생각해보게끔 했다. 그에게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대장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의무대 대대장이 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5년, 10년, 15년, 20년으로 5년씩 끊어서 계획을 세우지. 우선 귀관을 한국에 보내겠어.” 1년 반 뒤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텍사스주의 포트 샘 휴스턴에 가서 나의 또 다른 스승인 리처드 어손 준장을 만났다. 그분은 늘 “백스터, 내 생각에 자넨 이 길이 좋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나는 대위에 진급한 뒤로 그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나의 신앙 배경이다. 독일에 주둔하던 1988년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오전 2시였는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다음날 군목께 말씀드렸더니 훈련 프로그램에 넣어줬다. 그리스도신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에서 전도사 자격증을 받았다. 제대하면 신학교에 가서 학위를 밟을 생각이다.
나는 현재 매디건 육군병원의 사령관이다. 주변 6개 주의 보건을 책임지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의 건강도 관리한다. 우리는 매주 병상을 순회하며 병사들과 대화한다.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말한다. “그저 임무 수행 중 다쳤을 뿐이며 돌아가서 전우들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동생 나딘과 다른 형제들은 늘 나를 도와줬다. 장군 진급은 대단한 일이었다. 워싱턴 DC의 위민스 메모리얼 병원에서 행사를 열었다. 오빠·동생·삼촌·고모 등 가족이 모두 왔다. 우리 아버지는 2차대전 때 보병으로 참전했고, 삼촌 두 분도 복무했다. 오빠 한 분이 공군에서, 사촌 셋이 공군에서, 사촌 하나가 해병대에서, 사촌 둘이 해군에서 복무했다. 현재는 질녀 하나가 이라크에 가 있다. 그 애가 무척 자랑스럽다.
베라 루빈 천문학자
내 직업은 여성에 관한 통념과는 맞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여성의 직업이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워싱턴 DC에서 성장했고, 당시에는 침실 창문으로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잠자기보다는 별 관찰이 더 즐거웠다. 관찰 내용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천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마리아 미첼의 전기를 읽었다. 1847년에 혜성을 발견한 여성 천문학자다.
그때쯤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바사 대학을 지원했다. 마리아 미첼이 그곳에서 가르쳤다는 사실도 지원 동기의 일부였다. 3년 뒤 바사 대학을 졸업하고 밥과 결혼했다. 우리 부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남편은 코넬 대학에서 물리학·화학·수학을 공부했다. 처음 그이를 만났을 때 리처드 파인먼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코넬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나의 우상이었다. 그이는 파인먼 교수 밑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어찌 그이와 결혼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코넬에서 천문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남편이 이미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과에는 여성 급우가 없었고, 물리학과에도 한두 명뿐이었다. 과제물에 대한 도움은 주로 남편에게서 받았다. 은하계들이 서로 연관돼 움직이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은하계 움직임을 석사학위 주제로 삼았다. 나의 연구 결과는, 전반적인 우주 팽창과 더불어 거대한 은하계 집단들이 서로 연관돼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다. 학과장은 내 논문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천문학회에 제출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또 나의 첫 아이가 생후 몇 주밖에 안 되는 만큼 논문 제출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학회 회원이 아니므로 어차피 내 이름으로 논문을 제출하지는 못한다며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내 논문 발표는 간단했다. 나는 학회 안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후 내 연구 결과가 옳을 리 없다는 식의 논의가 많이 등장했다. 나는 그 천문학자들이 편견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한 점잖은 천문학자는 내게 더 많은 자료가 확보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 머리기사 제목은 ‘젊은 어머니가 천지창조의 중심지를 발견하다’, 혹은 그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는 남편의 일자리 때문에 워싱턴 DC로 이사했다. 하지만 나는 천문학 공부를 하지 못하게 돼서 언짢았다. 그래서 조지타운 대학에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기로 결심했다. 당시 물리학자 조지 개모프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다. 그를 만나 은하계 분포의 규칙성에 관해 토론했다. 조지타운 대학은 개모프를 나의 논문 지도교수로 인정해줬다. 내 석사학위 논문처럼 박사학위 논문도 저명한 천문학 학술지에서 발표를 거부당했다. 그 일에 대해 나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개모프 교수는 내게 엽서를 보냈다. 거기에는 “내가 뭐랬소”라고 쓰여 있었다.
1965년 워싱턴 카네기 연구소의 지자기(地磁氣)과에서 일자리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매일 오전 3시에 퇴근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자 카네기 연구소 측은 내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받는 급여의 3분의 2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연구소에는 여성 연구원이 근무한 적이 없었다. 10년 뒤 나는 상근직 급여를 달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는 관철됐다. 나는 “그래도 퇴근 시간은 여전히 오전 3시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 켄트 포드와 함께 은하계 별들의 속도와 은하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면서 25년을 보냈다. 포드는 연구소 동료로 은하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측정하는 천체 망원경을 개발했다. 나는 밤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면서 누군가 우리의 은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봤다.
천체 관측은 한 번에 6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긴 겨울밤에도 두 차례밖에 관측하지 못했다. 매우 지루하고 위치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하는 작업이었다. 관측소 바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약 20분마다 손전등으로 비춰봐야 할 정도였다. 천체를 관찰할 때면 떠오르는 태양과 경주를 하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관측소가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지만 밤마다 많은 것을 배운다.
켄트 포드와 나는 은하계 안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은하계 안의 대다수 암흑물질이 눈에 안 보이며 방사선도 방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암흑물질의 정체를 조만간 알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것이 30년 전이었다. 인내심도 바닥났다. 하지만 암흑물질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 안에서 여성 지위 문제에 대한 나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학계의 상황은 경제계보다 훨씬 열악하다. 여성 과학자 수는 참담할 정도로 적다. 이것은 젊은 여성들이 나서야 할 전투다. 30년 전 우리는 그 전투가 곧 끝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남녀 평등은 암흑물질만큼이나 아련한 문제다.
앤 스위니 TV 방송사 사장
어릴 때 나의 가정은 철저히 아이들 중심으로 움직였다. 만사가 자녀의 교육과 기회에 연결됐다. 남녀의 차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라고, 또 앞날에 등장하는 장애물은 모두 내게서 비롯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늘 격려와 인정을 받는 느낌을 가졌다. 밖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집에서는 터놓고 얘기했다.
한때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도 한 친구가 배역 책임자였다. 그는 내게 광고방송 오디션을 받게 해줬다. 오디션이 끝난 뒤 그의 사무실에 갔는데 바닥에 얼굴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사진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TV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역을 맡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매일 그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일들을 맡았지만, 그 일들을 전에 해봤거나 성공했기 때문에 맡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을 원했고 즐겼다.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겁나고 불가능해 보이면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고, 그러면 결국 만족을 얻는다. 해본 적이 없고 하는 방법도 모르던 일을 시도해 보는 데서 성패와 상관없이 큰 만족을 느낀다.
18개월 전 새로 맡은 직책이 그토록 매혹적으로 느껴진 이유도 그것이다. 그 세계는 공중파 방송, 유선 방송, 세계적인 디즈니 채널, Soap.net, ABC패밀리, TV 만화 등 온갖 매체가 갖춰진 세계였다. 거기에 어떤 변화를 가미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회사를 위해 그 세계를 더욱 강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도전은 나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면 나는 그것에 완전히 몰입한다.
마린 알솝 지휘자
말을 배우기도 전에 음악을 듣던 일이 생각난다. 부모님은 매일 음악 연습을 했다. 어머니가 자주 첼로로 연주하던 모든 연습곡들을 노래로 들려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중에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실내악을 연주하던 모습도 있다. 나중에 부모님이 뉴욕 시립 발레단에서 일하게 됐을 때는 발레를 구경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항상 음악을 들었고, 그것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일곱 살 때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위한 메도마운트 여름 캠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드의 대학 예비 프로그램에도 등록했다. 바이올린의 좋은 점은 악기와의 접촉 방식, 다시 말해 바이올린을 붙잡는 방식이었다. 바이올린은 다른 악기와 협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좋았다. 메도마운트에서는 현악 4중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드에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면서 황홀감을 느꼈다. 오케스트라의 인간적 측면을 사랑했다. 무남독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집단의 일원이 되는 데 이끌렸다.
아홉 살 때는 지휘자가 되는 꿈에 사로잡혔다. 청소년 합주단에 들어갔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자였다. 그를 보고는 나의 천직도 지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번스타인의 카리스마가 작용하긴 했지만, 다른 측면들도 있었다. 특히 큰 집단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 말이다. 내가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내내 팀장이 되곤 했다. 사람들을 조직해 뭔가를 이룩해내는 데서 스릴을 느꼈다.
줄리아드 졸업 후 나만의 소우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악 4중주단, 피아노 3중주단, 현악 합주단을 차례로 조직해 이끌었고 나중엔 스윙 밴드도 만들었다. 이렇게 뭔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1970년대 말, 우디 허먼 밴드에서 활동하던 사람을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음악을 만들어줬다. 당시 우리는 스윙 음악이 뭔지도 몰랐다. 줄리아드 학생이던 우리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우리는 그가 작곡한 스윙 음악을 마치 모차르트 곡처럼 연주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도 절친한 사이다. 우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그가 웃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놓았더라면 재미있었을 텐데!
각종 연주회에서 공연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경음악과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수입이 괜찮았는데 몽땅 저축했다. 나만의 오케스트라단 ‘콘코디아’를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지휘자가 되는 일의 어려움은 혼자서는 연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오케스트라단의 동료가 많이 도와줬다. 건설적 비판도 많았다. 지휘란 곧 신체 언어다. 특정 몸짓을 여성이 할 때와 남성이 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가장 힘든 일은 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금관악기부에서 큰 소리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몸짓이 너무 크면 욕을 먹는다. 여성은 너무 거칠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탱글우드의 오디션을 받기 전에 다섯 번이나 오디션을 신청했었다. 1988년 마침내 오디션을 받았을 때 구름 위로 올라간 느낌이었다. 어느 날 탱글우드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귀하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지휘하도록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좋아 기절할 뻔했다. 번스타인이 지휘자 교실로 왔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더니 “마린은 어디 있지?”라고 물었다. 구름이 걷히면서 하느님이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번스타인은 교사 이상의 존재였다. 사람들의 정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나의 본질적 특성에 관해 내게 얘기해줬다. 한번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리허설이 있었다.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지휘는 괜찮은데, 왠지 감동이 없어”라고 말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해보자”고 했다. 그는 지휘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 돼라, 음악 자체가 돼라고 말했다. 휴식이 끝난 뒤 다시 돌아갔을 때 정말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사지를 받은 듯 편안했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해보는 거야! 지휘 중간에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바로 그거야!”라고 속삭였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날아갈 듯한 느낌이었다.
탱글우드는 내게 기회를 여러 번 줬다. 일단 오디션을 받게 되자 일자리도 얻었다. 지휘자 과정에 입문한 목적은 유명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휘자가 된 이유는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에게서도 열정을 느낀다. 때로는 그렇게 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 만큼 연주자들이 나를 못마땅해 한다는 언론 보도는 의외였다. 아마 소수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연주 방식에 대한 고유의 권한을 박탈당했다고 느낀 듯했다. 내게는 볼티모어 심포니의 결점을 고치고 연주자들을 바른 길로 이끌 책임이 있다. 갈등을 넘어 모든 단원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예술적 의제를 설정해야겠다.
마리아 오테로 비정부기구(NGO)최고책임자
나는 남미 볼리비아의 라파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제는 나 자신을 라틴계 여성으로 여기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열두 살 무렵 변호사인 아버지는 미주개발은행(IADA)으로부터 근무 제의를 받았다. 그러자 부모님은 우리에게 온 가족이 워싱턴 DC로 이사한다고 말했다. 처음 워싱턴으로 왔을 때는 힘들었다. 부모님이 비교적 조그만 집을 구하는 바람에 방이란 방은 모두 침실로 변했다. 조부모님과 숙부 두 분도 우리를 따라 워싱턴으로 오셨다. 마치 라파스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교 시절 대부분을 필사적으로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보냈다.
메릴랜드대 2학년 때 낭만파 시에 푹 빠지면서 문학교수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당시 중남미에선 정치적 격동이 몰아쳤다. 오빠는 내게 정치 의식을 일깨워줬다. 조지 워싱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오빠는 갈수록 정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체성 위기도 겪었다. 나는 과연 볼리비아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그 문제로 씨름하다 결국 문학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간 쓰던 학위 논문도, 문학박사 학위도 포기하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관심을 훨씬 더 끄는 뭔가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백지 상태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알고 싶어 볼리비아로 돌아가 2년간 살았다. 성인이 돼 볼리비아에서 살며 미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대학원에서 경제학 공부에 매진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었다. 볼리비아인인 동시에 미국인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데는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됐다.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할 무렵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훌륭한 교수님들을 모시고 공부하며 중남미에 대해 많이 배웠다.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한 나는 여성들이 스스로 힘을 길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끔 돕는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는 기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ACCION International’이란 곳을 발견했다. 주로 가난한 여성 사업가들에게 소액의 자금을 지원해 창업을 도와주는 세계적인 금융기관 모임이다.
ACCION은 나의 꿈을 실현해 주었다. 이 무렵 나는 결혼한 지 이미 5년이 됐고, 어린 두 아들을 두었다. 남편 조 엘드리지는 평생을 인권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80년대 중반을 중미에서 보내는 데 마음이 솔깃했다. 당시 각각 세 살과 한 살이었던 두 아들 저스틴과 데이비드는 나의 영향으로 스페인어 구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미로 떠났다. 나는 ACCION에서 일하는 대출 담당자들이 모는 스쿠터의 뒷자리에 탄 채 언덕으로, 빈민촌으로 달리며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곳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우리 부부는 세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그 사이 우리에겐 딸 아나가 생겼다).
ACCION 회장이자 나의 정신적 스승인 빌 버리스는 내게 워싱턴에 사무실을 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 후 수년간 나는 ACCION에서 2인자로 일했다. 그러나 우리는 워낙 워싱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내가 회장이 되겠다는 열망은 결코 없었다. 게다가 ACCION은 본부가 보스턴에 있다. 얼마 후 이사회에서 나를 회장으로 지명한 뒤 주거지를 보스턴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10대였던 아이들은 결사반대였다. 그래서 나는 회장직을 워싱턴에서 수행하면 어떻겠느냐고 역제의했다. 이사회는 고맙게도 내게 그렇게 하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여성이란 점은 훌륭한 관리자가 되기에 유리하다. 여성들은 서로 격려하고, 버팀목이 돼준다. 나는 업무를 팀별로 처리하는 수평적 조직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같은 방식이 내가 여자 형제나 다른 여성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공동운명체니까 말이다.
With BARBARA KANTROWITZ, HOLLY PETERSON, and PAT WINGERT (위 뉴스위크 기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오프라 윈프리미디어 기업인
나는 미국 대중과 함께 성장했으며 지금의 성공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음을 누구나 안다. 첫발을 내디딜 때 내 목표는 그냥 직장을 잡는 일이었다. 19세였으며 TV에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직장의 연봉은 1만 달러였다. ‘내 나이만큼 벌기’를 원했으며 22세 때 2만2000달러를 받았다.
볼티모어의 TV 방송국 화장실에서 친구 게일과 함께 펄쩍펄쩍 뛰며 “야호, 40세가 되면 4만 달러를 번다니 상상이나 하겠니”라며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나 자신의 프로를 맡은 후 내가 뭔가 좋은 일을 위해 힘이 될 세력기반을 지녔다고 깨달았다. 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행동하며 세상에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세상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리라고.
그 프로가 성공한 이유는 내가 항상 진실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과 희망을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고통과 희망의 핵심을 이해한다. 수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누구나 모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이해와 공감은 정말 내게 날개를 달아줬다. 내가 어느 누구와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존경심과 존엄성을 유지하며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 사생활에서의 행동, 방송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내용에 관해 상당히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118개국의 수백만 명이 내 말에 귀기울이며 그들은 모두 내가 한 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송을 할 때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 지상에서 누렸던 시간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더 적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 수명을 50년 더 연장시켜 주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인식이 박진감과 끊임없는 자극을 준다.
성공은 자신의 인격을 들여다보는 확대경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더 강해지게 된다.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진짜 이점은 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대신 중요한 문제에 더 신경을 쏟게 해준다는 점이다. 인간성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나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지상에서의 내 존재를 어떻게 활용할까. 내 정신적 에너지를 인격과 어떻게 일치시키고, 영혼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인격을 어떻게 활용할까. 답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귀착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성장을 이뤄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을 편히 느끼지 못한다면 움직임·말·행동·존재가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만난 여성 지도자들은 모두 남자들보다 더 직관적인 지도력을 지녔다. 나는 거의 전적으로 직관에 의존한다. 사업상 단 한 번 틀린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본능을 따르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다. 때로는 말 그대로 기도를 하지만 때로는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려 여전히 느낌이 같은지를 본다. 의구심이 생기면 보통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의구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아주 정말로 거기에 철저히 맞춰져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만큼 자신을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고 언제나 여성들에게 말한다. 속이 빈 채로 활동하면 자신이나 가족 또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휴식 없이 너무 오래 일만 하면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휘발유가 바닥난 엔진과 같다. 활기차고 명료하며 청중들과 교감을 유지할 만한 신체적 능력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게는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강아지와 함께 숲 속을 산책할 시간 말이다. 참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도 그렇다. 내 우물을 다시 채워야 한다. 그것은 내게 필수적이다.
지금은 남아공에서 하게 될 일 때문에 크게 들떠 있다. 나는 수백만 소녀들의 앞날을 바꿀 것이다. 그들에게 교육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로, 시골로, 잊혀진 곳으로 찾아가 세상의 탁월한 지도자가 될 잠재력을 지닌 소녀들을 찾아낼 계획이다. 리더십 아카데미를 세울 작정이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소녀와 여성들의 미래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뒤바꿀 힘은 그것뿐이다.
매일 내 방송과 잡지를 통해 수백만 명에게 생각을 전달할 연단을 가졌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하는 일에서 영감을 얻는다. 최근 우리 프로그램 중 시청자들에게 아동 학대범들의 추적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48시간도 안 돼 우리가 소개했던 남자들 중 두 명을 붙잡았다. 아동 학대 피해자였던 나를 비롯한 수백만 명에게 그것은 의미가 컸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자신의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을 때 메아리가 울린다. 주제가 학교든 책이든 그냥 아이디어든 상관없다. 그게 바로 재미 아닌가. 그게 바로 진정한 삶의 의미다. 당당하고 충만한 삶 말이다.
베라 왕 패션 디자이너
내가 속하고 싶은 세계가 있었지만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최신 유행에 무척 민감했다. 덕분에 나는 패션을 사랑하며 자랐다. 세라 로렌스 칼리지 3~4학년 때는 파리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살다 보면 패션을 외면할 수 없다. 난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바닥 청소도 좋고 봉투에 침 바르는 일이라도 좋았다. 그저 패션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여름방학 때는 뉴욕 매디슨가의 이브생로랑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때 보그지 편집자 프랜시스 패티키 스타인을 만났다. 스타인은 학교를 졸업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취직했다. 스타인은 내게 특별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그 출근 첫날 이브생로랑을 입고, 손톱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였는데 그것이 당시 파리 젊은 여성들의 유행이었다. 편집 간부들이 나를 보고 말했다. “지저분한 일을 하게 될 테니 집에 가서 갈아입고 와요.” 나는 청바지로 갈아입고 왔다. 내 꿈이 이뤄졌다.
보그에 다니면 보게 되는 것이 많고 나만 알게 되는 일도 있어 아주 매력적인 직장이다. 뭐라 설명할 수도 없는 세계다. 원래 1~2년 다니다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16년을 다녔다. 그러는 동안 보그 역대 최연소 간부 가운데 하나가 됐다. 스물세 살에 부장이 됐고, 이어 파리에서 내는 아메리칸 보그의 유럽 편집인이 됐다.
내겐 전부터 어떤 안목이 있는데 보그에서 그 안목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고 생각한다. 안목이란 뭔가 낡은 것을 새롭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패션에서는 시도하지 않은 일이 없다. 요컨대 패션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새로움을 부여하느냐가 관건이다. 다시 말해, 와이셔츠는 어디까지나 와이셔츠지만 어떻게 입느냐? 그것이 편집자가 항상 추구하는 목표다. 한정된 순간에 패션의 마술을 포착해야 하는 사진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마흔 살이 다 됐을 때 결혼을 하고 내 사업을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아예 신부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발판을 마련해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가게 임대료를 내고 자신만의 호흡으로 성장하도록 해줄 그 무엇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신부복이었다.
처음에는 겁이 났다. 랠프 로렌의 디자인 책임자로 일하면서 제품을 만들어 제때 매장에 공급해 판매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직접 봤다. 재능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닌지라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때를 맞추는 일도 중요하다. 고객의 관심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언론의 눈을 끄는 매력도 갖춰야 한다. 가게 임대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집세를 어찌 감당할지 막막해 이것이 바로 사형집행장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단번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손님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사업을 일궈나갔다.
이제는 전부터 늘 이 일을 해온 듯한 느낌이 든다. 때로는 딸들이 사무실에 와서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아이들은 오전 6시45분에 학교에 가고 그 시간에 나는 보통 잠을 잔다. 밤에 집에 돌아오면 자지 않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앉아 밤 11시부터 2시까지 디자인을 한다. 나만의 창작력이 샘솟는 시간이다. 낮에는 손님들 상대하느라 바쁘다. 우리 바깥양반은 남편으로나 애 아빠로 모두 100점 만점의 배우자다. 자기 일에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직업이 없다면 나 같은 부인을 참고 견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카페인 음료를 마시지 않지만 밤에 칵테일은 좋아한다. 사과 마티니를 좋아한다.
여자는 지휘방식이 남자와 다르다. 나는 직원들과 많은 것을 함께 나누려고 애쓴다. 사업의 고통,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내게 의존하는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등 모든 것을 느낀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항상 그런 점을 고려한다. 예술과 상업이란 종종 상충하는 개념이다. 최신 디자인이라고 반드시 잘 팔리지는 않기 때문에 절충이 필요하다. 균형을 찾아야 한다. 몹시 어려운 일이다.
캐런 휴스 미 국무부 홍보외교 담당 차관
여성들이 조언을 요청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기본 원칙을 명확히 하라는 얘기다. 하루 10시간만 일하고 싶은데 업무 특성상 15시간 일해야 한다면 그 직장을 택하기는 곤란하다. 내가 백악관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논의했던 문제 중 하나가 근로시간이었다. 전화기를 들어 대통령 당선자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열심히 장시간 일할 생각이지만 동시에 가정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일자리는 중요하다. 내 인생의 태반, 생계 유지를 위해 일자리는 필요했다. 그러나 직업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내 책무는 가족과, 내가 갖기로 선택한 아이다. 내 일자리가 그런 책무 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점이 있다.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 그 말에 귀기울이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주인을 만나야 한다. 주지사에서 대통령이 된 나의 상사는 가족에 대한 생각이 나와 같았다. 함께 일하게 된 뒤로 그분은 엄마나 아빠는 가정을 꾸려가는 일이 첫째 임무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근무처마다 내게 많은 융통성을 부여하고 많은 기회를 준 상사를 만났으니 큰 복이라 하겠다. 대통령 선거유세 때 아들을 데리고 다니라고 허락한 일이 그 일례다.
익히 상상할 수 있지만,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은 워낙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에 가까운 측근이 와서 “그런데 제 애를 데려와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시 주지사는 고맙게도 즉석에서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선거유세에 아들을 데리고 다닌 일은 내 평생의 이력에서 가장 보람된 체험이었다. 고위직 여성의 입장에서 우리 가족만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남의 가족을 개의치 않았다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자기 가족을 최우선시해도 좋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나는 매주 한 번꼴로 오후에 좀 일찍 퇴근하는 ‘주중의 짬’을 얻어내려 애썼다. 어느 기자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사를 썼다. 나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이 같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신호가 되겠다 싶었다.
워싱턴에 갈 때는 대통령 보좌진의 일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이 워싱턴 생활이 싫다고 해서 텍사스로 되돌아가겠다고 결심했고 그 바람에 사람들은 나를 지도자로, 특히 직장과 가정의 균형 문제에 대한 지도자로 생각하게 됐나 보다. 오스틴에서는 어느 주부가 길 가는 나를 막고 자기 딸에게 소개하면서 말했다. “제 딸이 커서 댁처럼 되기를 원해요.” 그런 기대에 걸맞게 살아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백악관을 떠난 뒤로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텍사스 집에 살면서 밥상을 차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밥상을 잘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의는 다했다. 보통 때보다 열심히 했다.
우리 아들이 대학 진학한 뒤에는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해 봤다. 그런데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홍보외교 일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내가 아직 백악관에서 근무할 때 시작했던 일이다. 9·11 이후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와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었다. 나는 하반기에 아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에나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시기를 앞당겼다.
취임식 참석차 워싱턴에 갔을 때 아들과 아침식사를 함께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녀석은 말했다. “엄마가 하셔야 될 것 같아요.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문제잖아요. 또 우리 세대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아이의 세대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셰일라 백스터 육군 준장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부모님이다. 우리 다섯 남매에게 강력한 신앙심을 주입했다. 프랭클린은 작은 읍이라 우리는 사촌끼리 모두 알고 지내며 자랐다. 나는 농구에 재능을 보였다. 남자 사촌형제들이 농구를 가르쳐줬다. 사내아이들 틈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흑백 차별이 폐지된 뒤 1972년 고등학교 축제에서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여왕에 뽑혔다. 한 친구가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해냈다. 그 남학생은 “우리가 단 한 사람만 선택하면 내년에 이길 수 있어. 셰일라를 후보로 밀자”고 말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개표 결과가 믿기지 않았던지 집계를 두 번이나 했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버지니아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체육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사촌 샌드라 백스터가 포트 브래그에서 근무하는 대위와 결혼했다. 우리는 부대로 그를 보러 갔는데 그때 영감을 얻었다. 부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ROTC에 들어가기로 했다. 여학생은 몇 안 됐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선택이었다. 학군단장 조나 매키 대령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라서 장교를 육성할 줄 알았다.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고 지금도 그 점에 대해 감사 드린다. 처음 육군에 들어갔을 때는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주둔하는 부대의 소위였다.
우리 대대장은 로버트 볼스 중령이었다. 어느 날 나를 불렀다. “백스터 소위, 20년 계획을 제출하게.” 내 대답은 이랬다. “대대장님, 전 20분 뒤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볼스 중령의 말은 내 미래를 생각해보게끔 했다. 그에게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대장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의무대 대대장이 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5년, 10년, 15년, 20년으로 5년씩 끊어서 계획을 세우지. 우선 귀관을 한국에 보내겠어.” 1년 반 뒤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텍사스주의 포트 샘 휴스턴에 가서 나의 또 다른 스승인 리처드 어손 준장을 만났다. 그분은 늘 “백스터, 내 생각에 자넨 이 길이 좋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나는 대위에 진급한 뒤로 그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나의 신앙 배경이다. 독일에 주둔하던 1988년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오전 2시였는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다음날 군목께 말씀드렸더니 훈련 프로그램에 넣어줬다. 그리스도신 교회(Church of God in Christ)에서 전도사 자격증을 받았다. 제대하면 신학교에 가서 학위를 밟을 생각이다.
나는 현재 매디건 육군병원의 사령관이다. 주변 6개 주의 보건을 책임지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의 건강도 관리한다. 우리는 매주 병상을 순회하며 병사들과 대화한다.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말한다. “그저 임무 수행 중 다쳤을 뿐이며 돌아가서 전우들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동생 나딘과 다른 형제들은 늘 나를 도와줬다. 장군 진급은 대단한 일이었다. 워싱턴 DC의 위민스 메모리얼 병원에서 행사를 열었다. 오빠·동생·삼촌·고모 등 가족이 모두 왔다. 우리 아버지는 2차대전 때 보병으로 참전했고, 삼촌 두 분도 복무했다. 오빠 한 분이 공군에서, 사촌 셋이 공군에서, 사촌 하나가 해병대에서, 사촌 둘이 해군에서 복무했다. 현재는 질녀 하나가 이라크에 가 있다. 그 애가 무척 자랑스럽다.
베라 루빈 천문학자
내 직업은 여성에 관한 통념과는 맞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여성의 직업이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워싱턴 DC에서 성장했고, 당시에는 침실 창문으로 별들을 볼 수 있었다. 잠자기보다는 별 관찰이 더 즐거웠다. 관찰 내용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천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마리아 미첼의 전기를 읽었다. 1847년에 혜성을 발견한 여성 천문학자다.
그때쯤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바사 대학을 지원했다. 마리아 미첼이 그곳에서 가르쳤다는 사실도 지원 동기의 일부였다. 3년 뒤 바사 대학을 졸업하고 밥과 결혼했다. 우리 부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남편은 코넬 대학에서 물리학·화학·수학을 공부했다. 처음 그이를 만났을 때 리처드 파인먼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코넬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나의 우상이었다. 그이는 파인먼 교수 밑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어찌 그이와 결혼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코넬에서 천문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남편이 이미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과에는 여성 급우가 없었고, 물리학과에도 한두 명뿐이었다. 과제물에 대한 도움은 주로 남편에게서 받았다. 은하계들이 서로 연관돼 움직이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은하계 움직임을 석사학위 주제로 삼았다. 나의 연구 결과는, 전반적인 우주 팽창과 더불어 거대한 은하계 집단들이 서로 연관돼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다. 학과장은 내 논문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천문학회에 제출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또 나의 첫 아이가 생후 몇 주밖에 안 되는 만큼 논문 제출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학회 회원이 아니므로 어차피 내 이름으로 논문을 제출하지는 못한다며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내 논문 발표는 간단했다. 나는 학회 안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후 내 연구 결과가 옳을 리 없다는 식의 논의가 많이 등장했다. 나는 그 천문학자들이 편견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한 점잖은 천문학자는 내게 더 많은 자료가 확보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 머리기사 제목은 ‘젊은 어머니가 천지창조의 중심지를 발견하다’, 혹은 그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는 남편의 일자리 때문에 워싱턴 DC로 이사했다. 하지만 나는 천문학 공부를 하지 못하게 돼서 언짢았다. 그래서 조지타운 대학에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기로 결심했다. 당시 물리학자 조지 개모프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다. 그를 만나 은하계 분포의 규칙성에 관해 토론했다. 조지타운 대학은 개모프를 나의 논문 지도교수로 인정해줬다. 내 석사학위 논문처럼 박사학위 논문도 저명한 천문학 학술지에서 발표를 거부당했다. 그 일에 대해 나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개모프 교수는 내게 엽서를 보냈다. 거기에는 “내가 뭐랬소”라고 쓰여 있었다.
1965년 워싱턴 카네기 연구소의 지자기(地磁氣)과에서 일자리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매일 오전 3시에 퇴근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자 카네기 연구소 측은 내가 조지타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받는 급여의 3분의 2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연구소에는 여성 연구원이 근무한 적이 없었다. 10년 뒤 나는 상근직 급여를 달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는 관철됐다. 나는 “그래도 퇴근 시간은 여전히 오전 3시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 켄트 포드와 함께 은하계 별들의 속도와 은하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면서 25년을 보냈다. 포드는 연구소 동료로 은하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측정하는 천체 망원경을 개발했다. 나는 밤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면서 누군가 우리의 은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봤다.
천체 관측은 한 번에 6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긴 겨울밤에도 두 차례밖에 관측하지 못했다. 매우 지루하고 위치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하는 작업이었다. 관측소 바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약 20분마다 손전등으로 비춰봐야 할 정도였다. 천체를 관찰할 때면 떠오르는 태양과 경주를 하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관측소가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지만 밤마다 많은 것을 배운다.
켄트 포드와 나는 은하계 안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은하계 안의 대다수 암흑물질이 눈에 안 보이며 방사선도 방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암흑물질의 정체를 조만간 알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것이 30년 전이었다. 인내심도 바닥났다. 하지만 암흑물질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 안에서 여성 지위 문제에 대한 나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학계의 상황은 경제계보다 훨씬 열악하다. 여성 과학자 수는 참담할 정도로 적다. 이것은 젊은 여성들이 나서야 할 전투다. 30년 전 우리는 그 전투가 곧 끝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남녀 평등은 암흑물질만큼이나 아련한 문제다.
앤 스위니 TV 방송사 사장
어릴 때 나의 가정은 철저히 아이들 중심으로 움직였다. 만사가 자녀의 교육과 기회에 연결됐다. 남녀의 차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라고, 또 앞날에 등장하는 장애물은 모두 내게서 비롯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늘 격려와 인정을 받는 느낌을 가졌다. 밖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집에서는 터놓고 얘기했다.
한때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도 한 친구가 배역 책임자였다. 그는 내게 광고방송 오디션을 받게 해줬다. 오디션이 끝난 뒤 그의 사무실에 갔는데 바닥에 얼굴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사진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TV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역을 맡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매일 그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일들을 맡았지만, 그 일들을 전에 해봤거나 성공했기 때문에 맡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을 원했고 즐겼다.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겁나고 불가능해 보이면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고, 그러면 결국 만족을 얻는다. 해본 적이 없고 하는 방법도 모르던 일을 시도해 보는 데서 성패와 상관없이 큰 만족을 느낀다.
18개월 전 새로 맡은 직책이 그토록 매혹적으로 느껴진 이유도 그것이다. 그 세계는 공중파 방송, 유선 방송, 세계적인 디즈니 채널, Soap.net, ABC패밀리, TV 만화 등 온갖 매체가 갖춰진 세계였다. 거기에 어떤 변화를 가미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회사를 위해 그 세계를 더욱 강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도전은 나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면 나는 그것에 완전히 몰입한다.
마린 알솝 지휘자
말을 배우기도 전에 음악을 듣던 일이 생각난다. 부모님은 매일 음악 연습을 했다. 어머니가 자주 첼로로 연주하던 모든 연습곡들을 노래로 들려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중에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실내악을 연주하던 모습도 있다. 나중에 부모님이 뉴욕 시립 발레단에서 일하게 됐을 때는 발레를 구경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항상 음악을 들었고, 그것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일곱 살 때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위한 메도마운트 여름 캠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드의 대학 예비 프로그램에도 등록했다. 바이올린의 좋은 점은 악기와의 접촉 방식, 다시 말해 바이올린을 붙잡는 방식이었다. 바이올린은 다른 악기와 협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좋았다. 메도마운트에서는 현악 4중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줄리아드에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면서 황홀감을 느꼈다. 오케스트라의 인간적 측면을 사랑했다. 무남독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집단의 일원이 되는 데 이끌렸다.
아홉 살 때는 지휘자가 되는 꿈에 사로잡혔다. 청소년 합주단에 들어갔는데,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자였다. 그를 보고는 나의 천직도 지휘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번스타인의 카리스마가 작용하긴 했지만, 다른 측면들도 있었다. 특히 큰 집단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 말이다. 내가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내내 팀장이 되곤 했다. 사람들을 조직해 뭔가를 이룩해내는 데서 스릴을 느꼈다.
줄리아드 졸업 후 나만의 소우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악 4중주단, 피아노 3중주단, 현악 합주단을 차례로 조직해 이끌었고 나중엔 스윙 밴드도 만들었다. 이렇게 뭔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1970년대 말, 우디 허먼 밴드에서 활동하던 사람을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음악을 만들어줬다. 당시 우리는 스윙 음악이 뭔지도 몰랐다. 줄리아드 학생이던 우리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우리는 그가 작곡한 스윙 음악을 마치 모차르트 곡처럼 연주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도 절친한 사이다. 우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그가 웃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놓았더라면 재미있었을 텐데!
각종 연주회에서 공연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경음악과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수입이 괜찮았는데 몽땅 저축했다. 나만의 오케스트라단 ‘콘코디아’를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지휘자가 되는 일의 어려움은 혼자서는 연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오케스트라단의 동료가 많이 도와줬다. 건설적 비판도 많았다. 지휘란 곧 신체 언어다. 특정 몸짓을 여성이 할 때와 남성이 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가장 힘든 일은 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금관악기부에서 큰 소리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몸짓이 너무 크면 욕을 먹는다. 여성은 너무 거칠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탱글우드의 오디션을 받기 전에 다섯 번이나 오디션을 신청했었다. 1988년 마침내 오디션을 받았을 때 구름 위로 올라간 느낌이었다. 어느 날 탱글우드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귀하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지휘하도록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좋아 기절할 뻔했다. 번스타인이 지휘자 교실로 왔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더니 “마린은 어디 있지?”라고 물었다. 구름이 걷히면서 하느님이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번스타인은 교사 이상의 존재였다. 사람들의 정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나의 본질적 특성에 관해 내게 얘기해줬다. 한번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리허설이 있었다.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지휘는 괜찮은데, 왠지 감동이 없어”라고 말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해보자”고 했다. 그는 지휘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이 돼라, 음악 자체가 돼라고 말했다. 휴식이 끝난 뒤 다시 돌아갔을 때 정말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사지를 받은 듯 편안했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해보는 거야! 지휘 중간에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바로 그거야!”라고 속삭였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날아갈 듯한 느낌이었다.
탱글우드는 내게 기회를 여러 번 줬다. 일단 오디션을 받게 되자 일자리도 얻었다. 지휘자 과정에 입문한 목적은 유명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휘자가 된 이유는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에게서도 열정을 느낀다. 때로는 그렇게 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 만큼 연주자들이 나를 못마땅해 한다는 언론 보도는 의외였다. 아마 소수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연주 방식에 대한 고유의 권한을 박탈당했다고 느낀 듯했다. 내게는 볼티모어 심포니의 결점을 고치고 연주자들을 바른 길로 이끌 책임이 있다. 갈등을 넘어 모든 단원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예술적 의제를 설정해야겠다.
마리아 오테로 비정부기구(NGO)최고책임자
나는 남미 볼리비아의 라파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제는 나 자신을 라틴계 여성으로 여기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열두 살 무렵 변호사인 아버지는 미주개발은행(IADA)으로부터 근무 제의를 받았다. 그러자 부모님은 우리에게 온 가족이 워싱턴 DC로 이사한다고 말했다. 처음 워싱턴으로 왔을 때는 힘들었다. 부모님이 비교적 조그만 집을 구하는 바람에 방이란 방은 모두 침실로 변했다. 조부모님과 숙부 두 분도 우리를 따라 워싱턴으로 오셨다. 마치 라파스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교 시절 대부분을 필사적으로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보냈다.
메릴랜드대 2학년 때 낭만파 시에 푹 빠지면서 문학교수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당시 중남미에선 정치적 격동이 몰아쳤다. 오빠는 내게 정치 의식을 일깨워줬다. 조지 워싱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오빠는 갈수록 정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체성 위기도 겪었다. 나는 과연 볼리비아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그 문제로 씨름하다 결국 문학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간 쓰던 학위 논문도, 문학박사 학위도 포기하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관심을 훨씬 더 끄는 뭔가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백지 상태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알고 싶어 볼리비아로 돌아가 2년간 살았다. 성인이 돼 볼리비아에서 살며 미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대학원에서 경제학 공부에 매진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었다. 볼리비아인인 동시에 미국인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데는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됐다.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할 무렵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훌륭한 교수님들을 모시고 공부하며 중남미에 대해 많이 배웠다.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한 나는 여성들이 스스로 힘을 길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끔 돕는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는 기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ACCION International’이란 곳을 발견했다. 주로 가난한 여성 사업가들에게 소액의 자금을 지원해 창업을 도와주는 세계적인 금융기관 모임이다.
ACCION은 나의 꿈을 실현해 주었다. 이 무렵 나는 결혼한 지 이미 5년이 됐고, 어린 두 아들을 두었다. 남편 조 엘드리지는 평생을 인권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80년대 중반을 중미에서 보내는 데 마음이 솔깃했다. 당시 각각 세 살과 한 살이었던 두 아들 저스틴과 데이비드는 나의 영향으로 스페인어 구사가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중미로 떠났다. 나는 ACCION에서 일하는 대출 담당자들이 모는 스쿠터의 뒷자리에 탄 채 언덕으로, 빈민촌으로 달리며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곳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우리 부부는 세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그 사이 우리에겐 딸 아나가 생겼다).
ACCION 회장이자 나의 정신적 스승인 빌 버리스는 내게 워싱턴에 사무실을 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 후 수년간 나는 ACCION에서 2인자로 일했다. 그러나 우리는 워낙 워싱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내가 회장이 되겠다는 열망은 결코 없었다. 게다가 ACCION은 본부가 보스턴에 있다. 얼마 후 이사회에서 나를 회장으로 지명한 뒤 주거지를 보스턴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10대였던 아이들은 결사반대였다. 그래서 나는 회장직을 워싱턴에서 수행하면 어떻겠느냐고 역제의했다. 이사회는 고맙게도 내게 그렇게 하도록 편의를 제공했다.
여성이란 점은 훌륭한 관리자가 되기에 유리하다. 여성들은 서로 격려하고, 버팀목이 돼준다. 나는 업무를 팀별로 처리하는 수평적 조직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같은 방식이 내가 여자 형제나 다른 여성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공동운명체니까 말이다.
With BARBARA KANTROWITZ, HOLLY PETERSON, and PAT WINGERT (위 뉴스위크 기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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