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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 주원인은 유전인자

거식증 주원인은 유전인자

No One to Blame 에밀리 크루디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던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어느 가을날 오후, 버지니아주 교외지역. 딸 캐서린이 학예회에서 연극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캐서린은 천금 같은 미소를 가진 가녀린 몸매의 예쁘장한 아이로 언제나 명랑했다. 그러나 최근 아이의 몸무게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엄마는 눈치챘다. “딸아이는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며 에밀리는 계속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곳 어두운 조명의 강당에서 엄마는 더 이상 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서 캐서린은 연약하고 퀭한 눈에 수척해 보였다. 그 순간 에밀리는 딸이 심각한 섭식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캐서린은 열 살이었다. 누가 딸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에밀리와 남편 마크는 22㎏이던 캐서린의 체중이 20㎏으로 줄어감에 따라 갈수록 정신나간 사람처럼 허둥대며 그 후 5주 동안 같은 질문을 되풀이 자문하곤 했다. 학교 연극이 끝난 후 몇 주 동안 캐서린은 혹독한 단식에 들어갔으며 어느 누구도(학교 심리상담 교사, 개인 요법사, 가족 소아과의사, 또는 내로라하는 내과의사) 아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에밀리와 마크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딸에게 제발 먹어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조랑말을 사주겠다며 뇌물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저녁 식사 때면 음식을 두어 숟갈 떠먹는 게 고작이었다. “뭐라도 좀 먹으라고 다그치면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곤 했다”고 에밀리는 돌이켰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소파에서 간신히 일어설 정도로 허약해졌다. 해가 바뀌고 며칠 뒤 에밀리는 캐서린을 차에 싣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곧바로 딸 아이의 팔뚝에 정맥주사가 꽂혔다. 다음주 퇴원한 캐서린은 죽음을 향한 행군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가 한번 더 병원으로 실려간 뒤 크루디스 가족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현재 그들은 그 결정이 딸의 목숨을 살렸다고 믿는다. 지난 2월 그들은 미국의 절반을 가로질러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한 입원 진료소에 딸을 등록시켰다. 섭식장애를 가진 어린 아동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에서도 드문 시설 중 하나다. 에밀리는 아직도 좀 더 일찍 행동에 옮기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 “뻔히 보면서도 이렇게 어린 아이들도 섭식장애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에밀리 크루디스가 직접 목격하면서도 믿지 못했다고 탓할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 거식증이라고도 한다)은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과 체중 증가에 대한 극도의 우려로 규정되는 정신질환이다. 이 질환은 오래전부터 10대와, 성년을 앞둔 젊은 여성들이 걸린다고 여겨졌지 ‘돼지소풍’ 연극 공연을 하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에게 해당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여러 연구원·임상의사, 정신건강 전문의들이 식욕부진증 환자의 최저 연령이 13세에서 9세로 내려가는 현상을 목격했다고 보고한다. 식욕 부진 입원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애리조나주 레뮤다 랜치 요양소의 담당자들은 어린 아동의 부모들로부터 전화가 너무 많이 쇄도하자 지난해 13세 이하 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지금까지 치료 인원은 69명.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섭식장애 프로그램은 6개월 전부터 최저 연령 아동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20명을 치료했으며 그중에는 8세 어린이도 있었다. 보스턴·맨해튼·LA의 초등학교들은 세미나를 열어 부모들이 자녀의 섭식장애 증상을 알아보도록 돕는다. 메리-케이트 올슨이 아역 스타에서 젓가락 같은 어린 숙녀로 변한 모습을 지켜본 부모들은 모두 귀를 바짝 기울인다. 지난 봄 미국 국립 정신건강연구소(NIMH) 회의가 열렸을 때 식욕부진증의 최저 연령층 환자 문제가 공식 의제에서는 비중이 작았지만 복도에서는 모두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고 데이비드 S 로젠은 전했다. 그는 미시간대 임상 교수이자 섭식장애 전문가다. 7년 전에는 “9~10세 아이가 식욕부진증에 걸렸다면 큰 충격을 받아 동료들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나이의 아이들을 늘 본다”고 로젠은 말했다. 발병 연령이 내려가는 이유를 이것이라고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들의 병에 대한 인식 확대가 분명 큰 역할을 한다. 이유야 어쨌든 이 꼬마 환자들은 식욕부진증의 원인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연구와 더불어 이 무서운 질병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치료 방법을 찾아내도록 임상의학계(그리고 가족과 피해자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춘기 소녀들이 생활환경에서 식욕부진증을 ‘얻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주로 백인 부유층 가정의 예민한 성격을 가진 어린 숙녀들이 숨막히는 가정교육, 벅찬 학과 공부, 가혹한 코치들로부터 쏟아지는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통제하는 방법, 그리고 충분히 완벽하지 못한 데 대한 좌절감을 표출하는 한 방편으로 극도의 식사 제한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정신과 의사들은 섭식장애 환자들 사이에서 놀라운 다양성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섭식장애의 피해자들이 더 어려졌을 뿐 아니라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그리고 소년과 중년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그에 따라 의사들은 자신들의 핵심 전제에 의문을 품게 됐다. 식욕부진증이 좋은 환경에서 사는 완벽주의 성향의 소녀들이 걸리는 질병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직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연구가 알 듯 말 듯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이제 의사들은 식욕부진증을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비유한다. 이들은 스트레스나 외상 같은 환경적 요인들로 촉발될지 모르지만 유전자와 두뇌 화학작용의 복잡한 조합에 뿌리를 둔,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질병들이다. 달리 말해 많은 어린이가 압박이 심한 학교 환경, 그리고 잡지와 뮤직 비디오가 조장하는 얄팍한 문화의 영향을 받지만 그들 대다수가 저녁 밥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환경이 “방아쇠를 당긴다”고 노스캐롤라이나대(채펄 힐)의 신시아 불릭 섭식장애 프로그램 국장은 말했다. 그러나 “총을 장전하는” 것은 아동의 잠재된 취약성이다. 부모들의 역할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 유전자가 요인이다. 지난 10년 동안 식욕 부진에 관한 연구 결과 집안 내력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 정신의학 저널에 발표된 2000년의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버지니아 코먼웰스대 연구팀이 2163명의 여성 쌍둥이를 조사한 결과 그들 중 77명이 식욕부진증 증상을 보였다. 과학자들은 식욕부진증을 가진 일란성 쌍둥이 수가 같은 병을 앓는 이란성 쌍둥이에 비교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그 질병에 걸릴 위험의 절반 이상이 개인의 유전자 탓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식욕부진증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돌연변이 중 일부가 존재하는 인간 유전체의 특정 부위가 몇몇 소규모 연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유전자의 위치를 더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현재 NIMH에서 1000만 달러를 들여 5년 계획의 연구가 진행 중이다. 시카고 교외에 사는 중 3생 에이미 넬슨(14)은 자기가 앓고 있는 병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에이미의 몸무게가 39.3㎏에서 피골이 상접한 28.8㎏으로 줄자 부모는 딸을 시카고 교외에 있는 알렉시안 브러더스 행동건강병원의 주간 프로그램에 등록시켰다. 여름이 지나면서 딸의 병세가 호전될 즈음, 에이미의 아버지는 18세 때 “원인 모를” 병으로 죽은 자기 여동생의 일기를 발견했다. 일기장에 여동생은 하루 음식 섭취량을 600칼로리 이내로 제한하면 한 달 안에 4.8㎏을 뺄 수 있다는 계산을 해놓았다. 1980년 일기에서 여동생은 소금·버터·설탕 금지, “바나나 너무 많이 안 먹기” 같은 글들을 써놓았다. “우울증은 집안 내력일 수 있다. 섭식장애도 우울증 같은 것이다. 뇌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에이미는 말한다. 요즈음 에이미는 더 건강해졌고, 체중을 측정하지는 않지만, 37.5㎏ 안팎일 것으로 생각한다. 학교 연극에서 배역도 맡았고, 음식에 대해 까다롭게 굴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도까지 됐다. 과학자들은 식욕부진증 환자들의 뇌 화학성분에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들을 추적해 나간다. 피츠버그대 월터 케이 박사 연구팀은 뇌 스캔을 이용해 식욕부진증 환자들 뇌 속의 세로토닌 활동 수준이 비정상으로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상 수준의 세로토닌은 행복감과 관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해, 호르몬 수준이 이렇게 치솟은 것은 식용부진증 환자의 전형적 특성인 불안, 강박적 사고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케이 박사는 식욕부진증 환자들이 식사 제한을 일종의 자가 처방으로 이용한다고 가정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단식은 세로토닌을 생성하는 필수 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이 뇌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준다. 식욕부진증 환자들은 적게 먹음으로써 뇌 속의 세로토닌 활동을 위축시킨다. 케이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영양실조로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평정심을 얻는다”고 한다. 거의 누구나 먹는 데 문제가 있는 사람 한 명쯤은 알고 있다. 익히 알려진 증세로는 아주 심한 편식, 병적인 다이어트, 몸매에 대한 지나친 집착, 억지로 토하기 등이 있다. 하지만 섭식장애 가운데서도 미국 내 약 250만 명이 앓는다는 식욕부진증은 유별나다. 우선 식욕부진증 환자들은 흔히 망상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신체적인 포만감 때문에 음식을 넘기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굶주림으로 몸이 허약해질 수 있다. 이들은 겨우 몇 입을 억지로 넘길 때도 머릿속에서 꾸짖음 소리를 듣는다. 운동에 억지로 매달리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야위면서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살을 더 빼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볼티모어 교외에 사는 에린 필립스(12)는 상태가 악화되면서 버터를 먹지 않더니 젓가락으로 끼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 고형(固形)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고 에린의 어머니 조앤은 전했다. 두 달 만에 에린의 몸무게는 26.2㎏에서 18.7㎏으로 줄었다. “하루하루 아이가 녹아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고 조앤은 말했다. 딸이 식욕부진증에 걸리기 전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은 무슨 음식이든 먹어야 살고, 그러다 보면 병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못 먹더라”고 조앤은 놀라워 했다(이런 혼란스러움은 당연하다. 식욕부진증 anorexia는 ‘식욕 상실’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식욕 부진은 치명적인 질병이다(이 병은 우울증을 포함한 다른 어떤 정신병보다 치사율이 높다). 식욕부진증 환자 중 호전되는 비율은 절반가량이고, 10% 정도는 목숨을 잃는다. 나머지는 병이 만성화된다. 병의 증상에 대처하려 애쓰는 동안 환자가 먼저 탈진하고, 그 후 부모의 재산이 거덜나고, 학교와 직장에 못 나가게 되며,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된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사는 해나 하트니는 10세 때 식욕부진증으로 처음 입원했다. 8주 뒤 퇴원해 부모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정상 체중을 유지해왔지만 16세가 된 지금, 옛 악령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해나의 어머니 캐트린은 “아이의 병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고 말했다. 성인은 반 기아 상태에서 몇 년을 버틸 수 있지만, 식욕부진증이 13세 미만 어린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사춘기 직전의 어린이들은 체중이 증가해야 한다. 이 중요한 시기에 뼈가 단단하고 길어지며, 발달하는 육체에 피를 공급하기 위해 심장이 튼튼해지고, 두뇌의 질량이 커지면서 새로운 신경 통로를 만들고 불필요한 것은 잘라낸다. 이것은 그 시기에 일어나는 폭발적인 정신적·정서적 발달의 일부다. 섭식장애를 앓는 어린이들이 칼로리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으면 그들의 몸은 에너지를 아끼기 시작한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체온 유지가 어렵게 된다. 몸 안의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가릴 것 없이 모두 저하된다. 스트레스 호르몬 코티졸이 증가해 골격의 강화를 가로막는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지고 뭉텅뭉텅 빠진다. 그들의 육체가 근육 조직을 에너지원으로 소비하기 시작한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음식물 지방에 의존해 성장하는 두뇌가 위축되기 시작한다. 성인 식욕부진증 환자와 달리, 섭식장애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쇠약증상들이 몇 달 이내에 나타난다. 로리 콘웰은 자기 아들의 경우 퇴행증상이 엄청나게 빨리 진행됐다고 전했다. 2004년 여름, 일리노이주 퀸시에 사는 매튜 콘웰(9)은 몸무게 18.3㎏의 건강한 어린이였다. 편식이 심했던 그는 음식물 섭취를 자꾸 줄여 나중에는 땅콩 버터 한 스푼을 바른 당근만 먹었다. 석 달 만에 몸무게가 14.6㎏으로 줄었다. 콘웰 가족은 주치의와 함께 10세 남자아이를 받아줄 병원을 알아냈고, 로리는 아들의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담요에 감싸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는 주(州)를 가로질러 밤새 달렸다. 오마하의 어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매튜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아이가 의식을 잃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로리는 말했다. 사정이 이렇듯 절박한데, 치리오(어린이용 영양식) 다섯 알이면 한끼 식사로 충분하다고 고집을 부릴 만큼 증세가 심각한 아홉 살짜리 영양실조 어린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한단 말인가? 많은 의사들과 환자들은 먼저 부모를 치료과정에 다시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100년 이상 부모들은 식욕부진증 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로 간주돼 왔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힐데 브루크는 1978년에 펴낸 책 ‘황금 우리’(Golden Cage)에서 자기 중심적이고, 차갑고, 애정 없는(또는 위선적이고, 욕심 많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성숙을 방해함으로써 사실상 이 병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30년 전에는 굶으면서 수시로 망상에 사로잡히는 청소년과 어린 숙녀들을 유해한 부모들에게서 심리적으로(때로는 물리적으로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표준 치료법에 포함돼 있었다. 클리블랜드 병원 청소년의료과장인 엘렌 롬 박사는 “우리는 ‘부모절제수술’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부모들이 치료과정에서 배척되기보다는 방관자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의사가 극단적일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취하며 자녀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본다. 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식욕부진증 환자들은 병원에서 정맥주사와 비강관(鼻腔管)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장기 입원치료 센터에서는 식욕부진증 환자에게 음식을 한 입 먹일 때마다 무게를 달고 성분을 측정한다. 개별적인 요법으로는 환자의 강박증과, 치료에 대한 저항의 뿌리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 두 가지 요법을 함께 써서 환자들의 회복을 돕는다. 예일대 섭식장애 클리닉 공동원장인 말린 슈워츠는, 이제 부모들이 자녀의 병 때문에 공개적으로 욕을 먹지는 않게 됐지만, “섭식장애는 부모들이 잘못한 일을 이제 의사들이 바로잡으려는 것이라는 인상”을 의사와 치료사들이 부모에게 심어준다고 말했다. 더 나쁜 점은 이러한 최신 치료법이 많은 어린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원이나 진료소에 장기 입원하는 게 끔찍한 일일 수 있다. 상담요법도 어떤 아이들한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많은 아이의 경우 너무 어려서 효과를 보기 어렵다. 가정에서는 가족 식사시간이 악몽 같아진다. 부모들은 음식에 관해 아이들한테 잔소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터라 입을 꾹 다문다(그러고는 아이들이 음식을 밀쳐내는 것을 대책 없이 바라보며 속상해 한다). 지난 3년 사이, 미국 각지의 일부 저명한 병원과 진료소에서 가족들이 식욕부진증 환자의 회복을 돕는 새 치료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있는 가족 중심 치료법인 모즐리(Maudsley)법은 1980년대 런던의 모즐리 병원에서 개발됐다. 이곳의 의사 두 명은 치료에 저항하는 식욕부진증 환자들이 영양실조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한 뒤 간호사들이 음식을 먹여주면 점차 몸무게가 늘고 자발적으로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지원만 제대로 하면, 가족들도 간호사들이 한 것과 똑같이 식욕부진증 환자들을 먹일 수 있다고 이들은 결론지었다. 오늘날 가족 중심 요법의 방식은 이렇다. 의사·치료사·영양사가 한팀을 이뤄 부모와 아이를 함께 만난다.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을 경우 식욕부진증은 암이나 당뇨병처럼 대단히 심각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 된다는 점을 팀원들이 설명한다. 그리고 음식이 자녀의 치료를 돕는 약이 된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해준다. 팀원들은 화학요법을 처방하는 종양 전문의처럼 가족들에게 환자가 매일 섭취해야 할 칼로리·지방질·탄수화물·섬유질 식단표를 제공하고, 아이의 음식 섭취를 관찰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또한 형제자매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를 배려하는 지원팀이 될지에 대해서도 조언해 준다.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음식 먹이는 방법을 몇 차례 실습해 본 다음, 가족 모두가 집으로 가서 실제로 음식 먹이는 일을 한다. 딸 콜리가 10세 때 식욕부진증과 씨름하기 시작한 미치 마일스는 “딸한테 ‘너는 이것을 싫어할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딸이 “나는 엄마가 시키는 일을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잖아요”라고 답하자 엄마 미치는 “두고 보자꾸나”라고 대답했다. 펜실베이니아주 교외에 있는 마일스의 집에서 먹은 첫 번째 저녁은 마치 전쟁 같았다. 하지만 콜리의 주치의한테서 지금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을 얻은 미치는 물러서지 않았다. 45분간 고함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은 뒤, 콜리는 먹기 시작했다. 이후 20주 동안 콜리는 주간 치료교실에 참석했고, 미치는 치료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콜리가 점차 더 다양한 음식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방법을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11개월 뒤, 콜리는 정상 체중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미치는 이제 더 이상 음식량을 일일이 재거나 딸의 하루 음식 섭취량 일지를 작성하지 않는다. 비판가들은 타인이 결정한 식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른에게는 모즐리의 접근법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또한 일부 어린이에게는 부모의 감독이 오히려 해로울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식욕부진증에 걸린 어린 환자와 그 부모는 이미 일종의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알렉산더 루카스 박사는 말했다. 섭식장애 전문가로 미네소타 메이요 클리닉의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모즐리 방식이 그 싸움을 더욱 심화시켜 “역효과를 낼지도 모른다”며 “체중 문제는 전문가인 의사와 환자인 아이 간에 집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모즐리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가족 중심 치료법이 모두에게 좋지는 않다고 말한다. 폭력, 성적 학대,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등의 문제가 있는 가정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모즐리 병원과 시카고 대학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다수의 연구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치료를 받은 지 5년이 된 환자들 중에서 가족 중심의 치료법을 사용한 환자들은 70% 이상의 회복률을 보인데 비해, 단독으로 혹은 기존 방식을 이용한 환자들은 50%의 회복률을 보였다. 현재 미국 국립보건원은 모즐리 방식에 대한 대규모 연구를 수행 중이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가족 중심 치료법의 성공이 마침내 오래된 누명을 벗겨주리라고 말한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카티니 클리닉은 가족친화적 섭식장애 진료를 수행한다. 의료부장인 줄리 오툴 박사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어른다운 책임을 피하려 식욕부진증에 걸리겠는가? 애들은 그저 애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요즘 오툴은 어린이 중증 환자가 내원하면 우선 부모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애쓴다. “부모에게 이 병은 뇌장애의 일종이라고 말해준다. 식욕부진증은 아이가 선택하는 것도 부모가 그 원인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사기를 북돋워준다.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는 속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 허구성이 밝혀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일러주고 식욕부진증 역시 곧 그렇게 되리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울음을 터뜨리는 부모가 많다고 오툴은 전했다. 얄궂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녀가 식욕부진증에 걸리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저녁 밥상이다. 요즘 아이들은 축구 연습장으로 가는 도중에 자동차 뒷좌석에서 식사를 대충 때우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정해진 시간에 자녀와 함께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부모의 모습은 바람직한 식생활의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식사 자리는 아이의 식습관 변화를 감지하는 기회가 된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로리트 정신병원에서 섭식장애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크레이그 존슨 박사는 요즘 복잡한 신경생물학적 반응을 관찰한다. 그는 가족 중에 식욕부진증 환자가 있는 상태에서 열한 살짜리 딸애가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육상부 가입을 얘기한다면, “아이의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이때 부모가 별 생각 없이 자칫 순진하게 대응하면 몇몇 아이들에게는 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섭식장애에 걸리기 쉬운 아이들은 다이어트와 건강에 대한 매체 정보에 특히 민감하다. 완전히 곧이곧대로 그 정보를 믿을 가능성도 높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이그네이셔스 라우는 11세 때, 키 157㎝에 체중 64㎏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기름과 탄수화물이 살을 찌게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식품성분표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지방과 탄수화물은 일절 먹지 않았다. 6개월 만에 14.5㎏을 빼고 결국은 동네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먹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고 이그네이셔스는 말했다. 일단 회복은 됐지만 그 후로 3년 동안 자꾸 재발했다. “몸무게가 다시 줄고 식품성분표를 읽는 것 같은 옛날 습관이 자꾸 되살아났다”고 이그네이셔스는 말했다. 요즘 그는 건강한 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올해 17세가 된 이그네이셔스는 키 180㎝에 몸무게 81㎏으로 농구를 한다. 다시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에밀리 크루디스는 이제 가족이 전과 달라졌다고 말한다. 캐서린은 오마하 아동병원에서 두 달을 보내면서 점차 체중이 늘었다. 그 기간 중 에밀리는 병원 근처에 머물며 아이의 치료과정에 동참하도록 기획된 주 1회의 치료과정에 참가했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자 에밀리는 아이가 원기를 회복하는 동안 집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올 가을 6학년에 들어간 캐서린은 조랑말 한 필을 사고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말을 타는 등 승마에 아주 열심이다. 몸은 아직도 가냘프지만 삼시 세 끼 식사와 서너 차례의 간식을 챙겨 먹으면서 체중이 정상적으로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을 완전히 놓지 못한다. 캐서린이 배가 고프다고 말하면 에밀리는 만사 제쳐놓고 전채-식사-후식으로 이어지는 3코스 식사를 준비한다. 요전 날 에밀리는 캐서린이 감자에 사우어크림을 바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에밀리는 “나는 속으로 ‘세상에, 그래, 보통 아이들은 다 저렇게 먹어’라고 되뇌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에밀리는 드디어 딸아이가 보통 아이가 돼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With KAREN SPRINGEN, ELLISE PIERCE, JOAN RAYMOND and DIRK JOHNSON 차진우·이정명 jinch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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