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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북방 외교’ 천명에 소련 기자 접근

[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북방 외교’ 천명에 소련 기자 접근


88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맡아 추진… 스칼라피노 교수에 도움 요청
북방 외교를 천명한 노태우 정부는 소련이 망할 수 있다는 역사의 격변을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88년은 중국이든 소련이든 ‘문을 연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런 때 정재문 대양산업 회장(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대선에 실패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위로하면서 소련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YS께서 소련이든 중국이든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카면 방문을 해보고 싶다는 속마음을 저한테 나타내신 셈이거든요? 저의 의원 외교 활동은 그때부터 시동이 걸린 셈이지요. 근데 막상 중국을 먼저 방문한다고 했을 때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식 초청장을 받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도 전혀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총재님한테 얘기를 꺼낸 것이지요.”

▶정재문 의원.

정 의원은 공산권 접촉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해왔지 그 방법은 고민하지 못한 상태였다. 난감했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게 미국의 어느 대학이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보낸다는 정보였다. “꼭 정식으로 초청을 받아야 된다, 그카시면 제가 다녔던 U. C. 버클리의 스칼라피노(Scalapino) 교수님한테 방법이 있는지 상의해 보겠습니다.”(정재문) “정 의원이 그 유명한 교수를 아나?”(YS) “모교 은사 아닙니까. 극동과 소련 문제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시지요.” YS의 표정이 밝아졌겠네요. “예. 마치 대선 패배의 한을 북방 외교로 달래야겠다는 그런 생각인지 갑자기 목소리에 생기가 도는 겁니다, 하하. 워낙 판단이 빠른 양반이지만 공산권 문을 열면 이게 정치적으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까지 생각을 하시는 거지요. 그니까 대번에 다그쳐요, 빨리 갔다오라고. 하하하. ” “정 위원장. 내일 바로 미국 갔다 오지 그래!”(YS) “하이구…. 미국이 어데 부산서 기장쯤 됩니까.”(정재문) 정 의원은 일주일 후 미국으로 떠난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의 정치전문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일본·중국·소련 등 극동지역 문제를 꿰뚫고 있는 석학이었다. 정 의원과는 돈독한 관계였다.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 전문을 보내 축하해줄 만큼 아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가 베이징대학의 초청장 문제를 협의해 주실 수 없는지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더니 잠시 생각하시더니 부정적이에요. ‘베이징대학? 총장은 알지. 그러나 야당의 총재고, 더구나 대통령 후보였는데 대학의 초청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나. 차라리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보는 것이 어떻겠나’고 하시는 겁니다.” 스칼라피노는 뭔가를 생각하고는 “모스크바의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정 의원은 깜짝 놀랐다. 소련 얘기가 나온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IMEMO는 1000명이 넘는 박사급 연구원들이 세계 경제와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소련 최고의 전략연구소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을 만큼 굉장한 파워도 가지고 있었다. 스칼라피노는 IMEMO의 프리마코프 소장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여기서 방향이 급선회한 것이다. 일단 중국의 문을 열어보기로 했으니까 스칼라피노의 조언대로 88년 8월 18일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회(전국인민대표대회) 완리 의장에게 YS의 서신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스칼라피노가 한국을 방문했다.

스칼라피노와의 만남이 소련 방문을 강하게 추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근데 생각을 해보면 총재님한테 중국은 가볍게 말씀드렸던 것이고, 제가 처음부터 구상해왔던 곳은 소련이란 말입니다. 소련부터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다른 연유가 있었거든요. 당시 저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정치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드골은 58년 유럽의 소련 위성국가들에 대해서 ‘긴장 완화, 협상 그리고 협력’이라는 접근법으로 다가서겠다고 밝힌 적이 있어요. 이게 지금의 소련에 적용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굉장한 변화를 예상해 볼 수 있단 말입니다.” 그의 말은 희한하게 맞아떨어졌다. 정 의원이 국회에 진출한 85년 4월 11일보다 딱 한 달 먼저 등장한 고르바초프(85년 3월 11일 집권) 서기장이 집권 후 10여 개월 만에 공산당대회에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천명하더니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을 통해 한국을 포함한 대(對) 아시아 화해정책을 표방했다.
“脫냉전시대에 동참” 고르비의 경고 “와아…. 흥분이 되는 거지요. ‘고르바초프의 신사고(新思考)’라고 하는 게 그건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선언을 마치 행동강령처럼 전 세계에 약속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계가 충격받은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노벨 평화상도 받았고. 하여간 개혁과 개방 선언은 1917년 11월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 노선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고, 동시에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경제를 이행하겠다는 명백한 선언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감동과 충격이 저한테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관심이 줄곧 있어왔던 거지요.” 개혁과 개방 선언은 드골이 언급한 접근법보다 일찍 찾아왔고, 결과적으로 유럽의 위성국가들뿐 아니라 중국·베트남·쿠바·북한 등도 탈 냉전시대에 동참해야 한다는 고르바초프의 경고이기도 했다. 물론 고르바초프의 메시지는 그 다음에도 계속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연설 이후 그는 한반도 정책에 대한 방향 전환이며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통해 한반도 관계 변화를 언급했다.
YS 연설들은 노태우 “다녀오시라” “조선반도에서 위험한 긴장은 청산돼야 하며, 남조선과도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우리는 남조선과 경제적 관계를 조절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외무부도 고르바초프 연설에 대한 진의를 파악하고 분석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우리 정부는 양국 간의 외교관계를 점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칼라피노 교수도 정 의원의 주장에 공감했기 때문에 IMEMO 소장을 소개하겠다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시작은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모스크바에 잠입한 것은 89년 3월이에요. 1년 정도 공백이 생기는데, 그 사이에 총선이 있었거든요. 저로서도 지역구 출마가 되니까 중요했고 YS께서도 정치적인 시험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신경을 썼거든요? 정치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은 소련을 마음속에만 두고 기회를 엿보고 있은 거지요.”

▶1991년 6월 김영삼(YS) 민주당 총재를 방문한 미 캘리포니아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악수를 하고 있다. 스칼라피노는 YS가 북방 외교를 펼치는 데 막후 역할을 했다.

총선이 또 변화를 몰고 온다. 88년 4월의 국회의원 선거는 YS에게 있어 새로운 분기점이었다. 선거가 시작되자 해운대 호텔에서 보였던 초순한 모습은 말끔히 씻겨졌고 수십만 인파가 모인 유세장을 뜨겁게 달구는 능력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16년 만에 부활한 소선거구제에서 통일민주당이 59석을 얻었으니 YS는 얼굴은 살린 셈이었다. YS는 정계 은퇴 발언을 해명하고 부산에서 당선됐다. 정 의원도 13대 때는 부산진구에서 당선됐다. 그 후 그는 한 지역구에서 내리 5선을 했다. 13대 국회가 개원되자 YS는 소련 문제를 염두에 두고 정 의원을 국제위원장에 임명한다. 이 또한 소련과 인연이 될 조짐이었다. 그때 에피소드다. “정 의원, 틀니(의치) 안 해도 되나?”(YS) “갑자기 틀니는 왜요?”(정재문) “선거 한 번 치르면 쌩잇빨이 다 흔들린다 아니가. 처음 해봤을 긴데 괘안나?” “그러면 총재님은 전부 틀니겠네요.” “다 빠지니까 새로 나오데.” 한바탕 웃었지만 새 이로 악물고 가겠다는 의지 같았다. “정 의원, 당의 국제위원장 맡아주야 되겠어.” “저보다 유능한 의원님들이 있잖습니까.” “(잔뜩 찡그리며) 누가 있노. 위원장 자리를 준다카면 뭐든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 있더나. 못하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기 정치꾼이라. 정 의원이 맡아서 해.” 그 다음 한마디가 핵심이었다. “큰일 한 번 해야 돼. 국회 일은 국회 일이고.” 소련을 열라는 암시였다. 88년 6월 30일, 제140회 임시국회가 열리자 YS는 마치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이 대표 연설을 통해 공산권 외교를 강력히 피력했다. 정 의원이 건의했던 공산권 외교에 대해 YS가 줄곧 생각을 해왔다는 얘기였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스크바든, 베이징이든, 평양이든 어느 곳이라도 찾아갈 용의가 있습니다!” 취재에 열중하던 국내외 기자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긴급히 송고하러 나가는 기자도 보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비추어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공산권 발언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연설 직후다. 국회 개원 축하 만찬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이 YS의 연설에 대해 줄곧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좋은 말씀이 많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연설에서 하신 것처럼 한 번 다녀오도록 하시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북방 외교는 외무부 아닌 청와대가 주도 여기서 노 대통령은 예전에 서독이 사용했던 ‘북방 외교’라는 용어를 처음 공개적으로 꺼냈다. 물론 이전까지는 ‘대(對) 공산권 외교’라고 했고 ‘북방 외교’도 반드시 공산권 외교만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 외교에 첫 시동을 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전두환 정부에서 시작됐다. 내막이 있다. 한국 외교의 수치이기도 하겠으나 추진이 이상했다. 북방 외교는 외무부가 아닌 청와대가, 전문 외교관도 아닌 국가안전기획부 내에 극비로 조직된 ‘남북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고위급 실무회담 특보팀’이 주도하고 있었다. 특보팀의 책임자는 박철언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었다. 전두환 정부 때인 85년 3월이었다. 어쨌든 노 대통령의 격려에 YS는 매우 고무됐다. “평양에서 들었으면 이기 무슨 소린가 하고 흠칫했을 깁니다. 모스크바든, 베이징이든 갈 용의가 있다고 그캤으니…. 모스크바나, 베이징이나 김일성이한테는 저네들 운동장 아닙니까, 하하. 그런데 밖에서는 남북한 당사자 니들끼리 대화를 해라 그라지만 결국은 주변 강대국들이 협력을 해주어야 되는 거지요. 그래서 앞으로 주변국들하고 협력하고, 남북한 간에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서 서로 신뢰를 쌓고, 법적으로도 뒷받침이 되게 우리가 개선해 나가야 되지 않겠나, 이래 생각됩니다.” YS의 말은 문법을 무시하고 앞뒤를 잘 꿰어 맞춰가며 들어야 이해가 쉽다. 다행히 노 대통령은 잘 알아들었는지 한 번 더 ‘좋은 말씀’이라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긍정적이었다면 정 의원의 행보가 수월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지요. 정치권이라는 건 분위기하고 막상 행동에 옮기는 거하고는 영 다릅니다. 오히려 경계심이 더 많아지지요. 그래서 솔직히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총재께서 워낙 정치적인 감각과 찬스에 빠른 사람이고, 그래서 대표 연설로 선수를 치고 나온 건 북방 외교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인데 여당이나 핵심 참모들이 좋게 생각합니까. 그래서 모스크바든, 베이징이든 가보자고 한 건 내가 꺼냈지만 오히려 저는 움직이는 게 더 노출이 되고 돌파구를 찾기가 더 어려웠는데, 하여간 뒤에 얘기를 하겠지만 생각지도 않게 소련이 먼저 접근을 해오는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그게 총재께서 사회당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어나는데요, 외신기자구락부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소련 언론이 아슬아슬하게 접근을 해오는 거 있지요?” 지금까지 공개된 소련과 한국의 최초의 정치적인 접촉은 일본 도쿄에서 YS와 소련의 시사주간지 「노보예 브레먀」의 주일 특파원인 ‘블라디미르 옵샤니코프’의 만남이라고 기록돼 있다. 정 의원은 이때를 설명하는 것이다.
YS “소·중 문 열어 봐라” “그게 88년 8월 16일입니다. 마침 한국에서는 올림픽이 열리게 돼 있었고, 더욱이 김 총재를 초청한 곳이 일본 사회당이니까 외신기자들이 총재의 연설 내용에 상당한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특히 국회 대표 연설에서 모스크바·베이징·평양도 갈 수 있다고 천명했기 때문에 과연 총재가 말을 하게 될지 기자들에게는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근데 바로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소련에서 특파원이던 옵샤니코프라는 기자가 아주 기술적으로 접근해오는 거예요. 소련 특파원이라고 하면 짐작을 하겠지만 KGB나 외교부 같은 곳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노보예 브레먀는 영문으로 ‘뉴 타임스’이다. 소련 최대의 정치 주간지로서 전 세계에 10개 국어로 번역이 돼 60만 부가 발행된다. 옵샤니코프 기자는 중견 언론인으로 87년에 중국 자오쯔양(趙紫陽) 총리와 단독 인터뷰를 했고 YS를 만나기 두 달 전에는 김일성을 단독 인터뷰한 베테랑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까 옵샤니코프는 「노보예 브레먀」의 편집장이면서 소련의 중요 정치 포스트에 있는 ‘이그나텐코’의 깊숙한 오른팔인 겁니다. 이그나텐코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언론·국제 관계를 지도하는 상임위원입니다. 또 고르바초프가 쿠바·런던·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선발대장으로 파견된 핵심 참모란 말입니다. 한때는 고르바초프의 공보수석 비서관을 지냈고 ‘프라우다’ 부사장과 ‘타스통신’ 사장을 역임하고 말이지요.”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내막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면 외신기자클럽 연설에서 나온 주요 핵심은 어떤 것이었고 소련 특파원의 기술적인 질문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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