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의 마지막 투쟁
마틴 루터 킹의 마지막 투쟁
King's Final Years 40년 전 겨울, 여덟 살이던 나는 시카고의 노스 사이드에 살았다.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노스 론데일의 웨스트 사이드 빈민촌으로 이사왔다. 이른바 ‘북쪽 흑인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취지였다. 민권운동 자금이 부족했던 킹 목사가 ‘호숫가에 사는 백인 진보파’의 자금을 지원받으려고 한 지역 정치인의 집을 방문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정치인은 자기 집에서 모금 행사를 열기가 꺼려졌다. 개인적으론 킹에게 동정을 느끼지만, 자기가 충성을 바치는 리처드 J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정치인은 내 부모님께 전화를 했고, 기쁘게도 모금 만찬 행사는 결국 우리 집에서 열리게 됐다. 아버지의 일기에 따르면 그날의 모금 실적은 “실망적”이었고, 킹 목사는 우리 집 전화통에 매달려 그날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 위대한 인물의 자필 사인을 얻었고, 우리는 거실에서 수십 명의 손님들과 함께 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었다. 그 해에 있었던 몇 차례의 이런 행사에서 킹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글귀를 휘갈겨 쓰곤 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에 관한 테일러 브랜치의 권위 있는 저서 ‘가나안의 변두리: 1965~68년 킹 목사 시절의 미국’(At Canaan’s Edge: America in the King Years, 1965~68) 3편과 종결편을 읽으면서, 갑자기 옛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사회운동은 1955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흑백차별에 항의하려는 버스 승차 거부 운동)부터 1968년 킹 목사의 죽음(당시 39세)까지 13년간 지속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카고 같은 지역들에서 사는 흑인들의 삶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또 얼마나 적게 변했는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됐다. 그 1960년대의 끝나지 않은 의제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후유증으로 다시 쟁점이 됐다. 워싱턴의 정치인들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역사회를 개선하려 애쓰는 수많은 지방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지난 1월 출간된 브랜치의 책은 킹이 성인군자가 아니라 직관에 의존하고 모순적이며 시달림을 받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모든 모임에 지각하고, 측근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며, 불륜을 저질렀다. 또 심지어 가장 좋아했다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려고 일행을 몰래 빠져나가기도 했다고 그의 여행을 도왔던 한 측근이 말했다. 그러나 킹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뒤에도 자신의 운동을 민권 투쟁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브랜치는 극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영감을 주고 선동적인 그 시대상을 매우 상세하게 전달했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성공적인 시위 행진, 1965년 기념비적 흑인 투표권법의 통과, 이민정책에서의 제3세계 차별 종식(미국의 얼굴을 바꿔놓았다), 숨막히는 불의와의 싸움과 베트남전 악화 사이에서 고뇌한 린든 존슨의 비애, 로널드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으로 상징되는 반(反)진보주의 움직임, 그리고 암살되기 전날 밤 멤피스의 메이슨 템플 교회에서 “여러분과 그곳에 함께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한 킹 목사의 불길한 예언 등등. 하지만 내가 보기에 킹의 인생이 끝날 무렵 핵심적인 사건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1966년의 상당 기간 간헐적으로 시카고에서 거주하며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킹은 그 운동의 ‘행동단계’에 착수하면서 “분노의 포도가 저장된 곳은 시카고”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분출된 분노는 민권운동을 좌절시키고 한 세대를 정치적으로 표류시켰다. 브랜치의 연구는 자유주의의 꿈이 붕괴되기 시작한 해가 1966년이었음을 말해준다. 킹이 이끄는 단체인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는 알 레이비의 제안으로 시카고를 찾았다. 교사이자 지역사회 운동가인 레이비는 인종차별적 교육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SCLC는 시카고 운동을 “최초의 의미 있는 북부 자유운동”이며 투표권이나 공공장소 출입문제가 아닌 경제적 차별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움직임이라고 봤다. “이런 경제적 착취는 슬럼지구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벨기에의 콩고 착취와 다르지 않다.” ‘슬럼을 없애고’ ‘열린 도시’를 만들려는 이런 운동은 특히 인종차별적인 시카고 중산층, 백인들만의 노조, 그리고 부동산 중개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966년 1월 26일 킹은 부인 코레타, 네 자녀와 함께 당시 ‘슬럼데일’로 불렸던 노스 론데일의 사우스 햄린 1550번지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3층으로 이사했다. 과거 중산층 유대인 주거지역이었던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북부로 흘러든 흑인들이 점령했다. 햄린의 건물 입구는 동네 사람들이 화장실로 사용했으며 아파트는 손바닥만 했다. “주방에 가려면 침실을 지나야만 했다”고 코레타는 돌이켰다. 집주인은 새로운 세입자가 누군지 알게 되자(원래는 가명으로 계약했다) 부랴부랴 아파트에 도색을 다시 했지만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북부지역 민권운동이 본격화된 계기는 솔저 필드의 집회와 시청을 향한 가두행진이었다. 킹은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처럼 시청 정문에 14개 요구사항(차별 없는 주택 공급과 백인 일색인 산업의 일자리 개방)을 내걸었다. 처음엔 데일리 시장이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런 문제들이 자신의 취임 전에 생겼으며 이미 10만 채가 넘는 아파트를 수리했다고 주장했다. 여름에 노스 론데일에서 폭동이 일어나자(코레타는 아이들에게 창문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했다), 데일리는 흑인 어린이들이 소화전 분출구를 이용해 더위를 식히도록 하겠다는 등의 하나마나한 양보를 들고 나와 휴전을 모색했다. 킹은 갱단 지도자들, 법무부 당국자들과 한방에서 철야회담을 벌였지만 스토클리 카마이클 같은 새로운 ‘블랙 파워’ 지도자들은 그의 비폭력 주의를 “너무 주일학교 같다”고 폄하했다. 시카고 캠페인은 인종문제를 국가적인 이슈로 인식시키자는 목적이었다. 킹은 흑백 인종이 어울린 시위군중을 이끌고 인종차별이 극심한 마케트 파크 지역에서 시위를 벌여 극적인 효과를 거뒀다. 거기서 돌에 맞은 킹은 “내 평생 미시시피나 앨라배마에서도 그만한 증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전해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에서 앨라배마주 경찰과 맞붙었을 때와 달리, 마케트 파크(그리고 그 뒤 백인 교외 주거지역 키케로)로의 가두행진은 전국적인 대리만족이나 획기적인 법안의 통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택공급 차별을 금지하는 새로운 민권법안이 제출됐지만 의회에서 저지당했다(1969년에 마침내 통과됐다). 북부지역 당국(주 방위군과 시카고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기보다 보호했지만 흑인의 민권운동에 역풍이 일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사실 그 민권투쟁 자체에 다소 진력낸다는 감이 들지 않느냐”고 마이크 월리스는 CBS 뉴스에서 킹에게 물었다. 1965년 킹은 린든 존슨 대통령이 전국 TV방송에서 “우리는 승리하리라”고 공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1966년 중반 데일리의 교묘한 농간으로 킹과 존슨의 관계가 나빠져 두 사람은 다시 만나려 하지 않았다. 데일리는 존슨 대통령에게 “그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베트남 문제에서는 반대 입장에 선다. 뻔뻔한 위선자다”고 말했다. 데일리 자신도 개인적으론 전쟁을 반대했지만 존슨의 전쟁 확대를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데일리는 시카고에서 말은 온건하게 하면서도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 식으로 킹을 능가했다. “데일리가 마틴 루터 킹을 혼냈다”고 그 운동의 더 상급 지도자인 베이어드 러스틴은 말했다. 브랜치는 시카고 캠페인이 완전히 헛수고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거기서 얻어낸 주택공급 차별금지 타협안으로 인종차별이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변화의 물꼬를 텄다. 더욱이 “시카고 운동은 인종문제를 전국적인 이슈로 만들었다”고 브랜치는 썼다. “그 일이 없었다면 킹은 후손들에게 더 지역적으로 국한된 인물로 비치리라.” 그러나 민권운동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던 비폭력이 사실상 효력을 잃게 되는 계기도 됐다. 그 후 40년간 민권운동은 황량한 사막의 시기를 맞았다. 강력한 지도부를 잃고 차별 철폐 투쟁의 선명성도 사라졌다. 카트리나의 사후 처리에서 보이듯 미국 정부는 빈곤 문제에 진지하게 대응하려는 자세를 오래전에 버렸다. “빈민 문제를 방치하는 태도가 수십 년간 이 나라를 허리케인처럼 휩쓸었다”고 론데일 기독교발전공사의 리처드 타운셀 전무는 말했다. 한편 킹이 익히 알고 있던 가족 붕괴의 결과는, 굳이 말하자면 1960년대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헌 등이 예측했던 상황보다 더 심각했다. 그러나 킹 이후의 모든 시기가 그의 말마따나 ‘고난의 시기’(valley moment)였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투표권법은 미국 정치를 바꿔놓았고 흑인 중산층의 성장은 수백만 가구의 삶을 바꿔놓았다. 뉴올리언스가 나빠질 동안 시카고의 상황은 호전됐다. 지금은 리처드 J 데일리의 시절보다 훨씬 더 건강한 도시가 됐다. 1989년 이후 시장을 역임한 그의 아들 리처드 M 데일리와, 아들의 전임자인 시카고 최초의 흑인 시장 해럴드 워싱턴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시카고의 공립학교 체계는 여전히 문제가 많고 끈질기게 인종분리를 고수하지만 지금은 여러 학교가 큰 성공을 거뒀으며 그 밖에도 더 많은 학교가 현실적인 희망을 품게 됐다. 주택도 아직 대체로 동네별로 흑백이 갈리며 영세민과 노동자 계급이 살기에는 값이 비싸다. 그리고 보조금을 받으려는 영세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러나 로버트 테일러 홈스와 카브리니-그린 같은 악명 높은 주택개발 지구는 대체로 철거되고 타운하우스 식의 공영주택들로 대체됐으며 그중 3분의 1이 주민 소유다. 전국적 비영리단체 LISC(Local Initiative Support Corporation)가 이끄는 민관 합동운동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이 의장을 맡는 LISC는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향력이 있다. 1980년 이후 LISC 시카고 지부는 도심개발 사업에 소리없이 1억2000만 달러를 투자해(그리고 추가로 24억 달러를 유치), 저가의 주택 2만1000호, 상업공간 11만2000여 평을 개발했다. 이들에게는 자유 행진의 극적인 요소가 없다. 그러나 기업계와 헌신적인 지역사회 지도자들 간의 탄탄한 유대는 이제 도시 재건의 검증된 방식이 됐다. 사우스 사이드의 마틴 루터 킹 대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절망의 거리였다. 지금은 차를 몰고 지나가면 재건축된 백만 달러짜리 맨션과 번화한 소매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금은 이곳 상황이 훨씬 더 좋아졌다. 하지만 극빈층의 환경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어니스트 게이츠는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한때 폐허가 됐던 웨스트 사이드 인근 지역의 지도자다. 과거 킹이 살았던 노스 론데일은 40년 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햄린 애버뉴에서 모자 달린 파커를 입은 젊은이 네 명이 벽을 향해 손발을 벌린 채 경찰들에게 몸수색 당하는 광경을 보았다. 마약단속인 듯했다. 과거 킹이 거주하던 슬럼지구로 지금은 공터가 된 곳의 거리 맞은편이었다. 18세 이상의 60% 가까이가 어떤 형태로든 형사사건에 연루됐다. 남성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노스 론데일 가구의 40% 이상이 1년에 1만5000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린다(도시 전체 주민의 경우 20%). 은행 계좌를 보유한 가구는 3분의 1 미만이다. 많은 주민이 자멸적인 행동과 ‘갱스타’ 문화를 억누르고 (킹의 말을 빌리자면) “자체적으로 성장”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스 론데일도 변해간다. 아직도 주로 영세민과 흑인이 살지만 1960년 이후 인구가 3분의 2나 줄어 4만1000명에 불과하다. 2000년에야 40년 만에 처음으로 쇼핑 센터가 들어섰으며 비영리단체들이 조금씩 주택을 신축해나간다. 과거 킹이 자주 드나들던 곳 부근, LISC가 후원하는 노스 론데일 취업 네트워크 안에서 전과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력서를 출력하고 일자리를 물색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다수는 심한 부채 문제를 안고 있다. “취업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브렌다 팜스 바버는 말했다.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그는 현지 주민들에게 창업을 지도한다(공터에서 수익사업으로 양봉을 해 1800kg의 꿀도 생산한다). “해결책은 정신건강, 전반적인 건강이다. 금융교육에 큰 구멍이 나 있다.” 시카고의 ‘퍼스트 어카운트’라는 한 프로그램은 현재 ‘은행 미거래자’로 알려진 소외 영세민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계좌를 처음 개설할 때의 예금액은 적지만 대다수가 신용을 쌓아가는 법을 배웠다. 요즘 시카고 사람들은 마틴 루터 킹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노스 론데일의 운동가들은 사우스 햄린 1550번지에 그의 이름으로 시민운동 박물관을 세우고 싶어하지만 아직 그럴 만한 돈이 없다. 시카고 시민들이 행여 그를 기억한다 해도 그가 자신들 속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거의 어디서나 킹은 이제 루스벨트나 워싱턴과 같은 이름뿐이거나, 쇼핑하러 갈 휴일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변두리’ 같은 책들은, “떨치고 일어나 미국이 지닌 신조의 진정한 의미를 그대로 실천하라”는 킹의 외침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서도 강력한 비전으로 남아 있음을 일깨워준다. 아주 오래전 한 여덟 살짜리 소년이 자기 집 거실 벽난로 앞에서 연설하는 킹을 지켜볼 때처럼 그의 외침은 지금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장병걸·차진우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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