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추억] 이승만은 “남궁이가 해냈구나” 극찬
1952년 10월 21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1만t급 대형선이 출항한다. 고려호. 국적 대한민국. 당시만 해도 1만t급 대형선을 갖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 다섯 곳 뿐이었다. 수출용 고철 1600t을 싣고 부산항을 떠나 미국 포틀랜드항으로 향하는 고려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은 서른여덟 살 젊은이의 등을 연방 두드리며 감격을 연발했다. “남궁이가 해냈구나.” 남궁련(南宮鍊). 그는 한국 해운사(史)에 이렇게 이름 석 자를 올렸다. 그는 1949년 극동해운을 설립하고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일본 배 ‘가즈우라마루호’를 인양해 수리에 들어갔다. 수리에 필요한 돈 70만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외환대부로 받아냈다. 이 대통령이 ‘M. S. (Motor Ship) Korea’를 ‘Miss Korea’로 잘못 읽어 ‘미스코리아호’로 더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1만t급 대형선은 고(故) 남궁련 회장의 삶을 ‘바다’로 옮겨놨던 것이다. 그는 1968년 인생에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파산 직전이던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기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찾아왔다. 대만으로부터 250t급 참치어선 20척을 낙찰받은 것이다. 이어 세계 최대 정유회사인 미국의 걸프오일로부터 2만t급 유조선 6척을 수주했다. 석유제품선을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때였지만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선주를 설득했고, 마침내 한국 조선업계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그는 이후 100만t급 선박 건조를 할 수 있는 옥포조선소 건설을 위해 사력을 다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이루지 못하는 아픔도 겪었다. 조선 경기가 불황에 빠지고, 무리한 건설비 투입으로 결국 옥포조선소 건설 프로젝트는 1976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손으로 넘어갔다. 조선공사 경영권도 차남인 호씨에게 넘겼다. 조선공사는 80년대 말 한진그룹으로 인수됐다. 그의 해운왕 꿈은 다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고 남궁련 회장의 도전은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의 조선 강국이 되는 기틀이 됐음에 틀림없다. 8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이듬해 일본인 부인이었던 와다에이 여사가 별세한 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고미술을 수집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국가에 기증한 국보급 한국 문화재도 상당수다. 고인은 경기도 양주(현 서울 도봉구 방학동) 출생으로 일본 니혼(日本)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광복 이전에는 일본, 만주, 중국 등에서 비누 등 원자재 거래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1949년 극동해운을 설립하고 54년부터 6년간 국영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61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이후 경제심의위원, 금융통화위원 등을 거쳐 68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인수, 88년까지 사장·회장을 역임했다. 유족으로 욱강(오리엔탈코 사장), 호(메트로신문사 사장)씨 등 4남 3녀가 있다. 9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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