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 “신문·정유사만 400년간 안 변했죠”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 “신문·정유사만 400년간 안 변했죠”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사람치고 홍정욱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3년 전 미국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해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그는 『7막 7장』이라는 유학생활기를 책으로 펴내 100만 부를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조기유학 붐이 일었을 정도다. 당시 기자도 서울 방이동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미국에서 막 돌아온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는 미래를 묻는 질문에 “언론 계통이나 선거정치 쪽에 관심이 있다”고 대답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벽에는 그가 존경한다는, 와이셔츠 바람의 존 F. 케네디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정확히 12년8개월이 지난 2월 23일. 기자는 그를 다시 인터뷰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도 변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헤럴드미디어 사장·발행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헤럴드경제신문과 영자지 코리아헤럴드의 사주(社主)이자 CEO가 된 것이다.
경제에 문화 접목한 퓨전신문 그는 3년 전인 2002년 12월 4일 32세라는 나이에 당시 내외경제신문(현 헤럴드경제신문)과 영자지 코리아헤럴드를 인수했다. 그의 전격적인 언론사 인수는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유명 영화배우의 아들에다 100만 부가 팔린 책의 저자라는 대중성, 여기에 조기 유학을 거쳐 명문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지적인 배경, 재벌가와 맞닿는 결혼…. 당시 언론들은 그의 신문사 인수를 놓고 “왜?”라는 의문부호를 붙였고 구구한 억측이 생겨났다. “장차 정치로 가기 위한 포석 아니냐” “1~2년 안에 돈을 불려 되팔 것”이라는 설도 돌았다. 당시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는 만년 적자 상태였고 홍 사장은 M&A(인수합병)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인수 후 그는 헤럴드미디어의 CEO로서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 행동반경을 넓히는 데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를 보는 세상의 시각을 상당히 불편해한 듯 보였다. 하지만 ‘경영자 홍정욱’에 대한 소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만년 적자이던 회사를 인수,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온 말들이었다. 그는 경제뉴스 일색이던 지면에 대중문화를 접목한 이른바 ‘퓨전신문’을 선보이면서 제호도 헤럴드경제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서울 명동 건너편 회현동에 있던 회사도 광화문 옆 정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올 1월 25일 그는 임직원들에게 편지 한 통을 띄웠다.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흑자경영 특별성과급을 지급하는 이유는 실적이 있는 곳에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 흑자 전환에 따른 성과급이었다. 액수는 소소했다. 그러나 편집국의 한 간부는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며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1953년 창사 이래 세 번째 흑자”라고 밝혔다. ‘경영자 홍정욱’으로서 이정표를 세운 셈이다. 홍 사장은 취임 이후 시사 매체로는 처음으로 「이코노미스트」와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는 “(자신과 관련한) 온갖 소문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회사는 팔지 않는다. 오너십을 유지하겠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는 또 “신문시장은 죽지 않았다”며 “올해부터 종합지 출신 젊은 기자들을 적극 영입하겠다”고 밝혀 공세적인 경영에 나설 뜻을 밝혔다. 또 “대중문화를 가미한 경제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종합지로 갈 것인지 조만간 방향설정을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가 성장동력은 아니다”며 “방송과 신매체 등을 포함한 종합미디어기업을 지향할 것”이라는 구상도 털어놨다. 인터뷰는 2월 23일 서울시 중구 정동 헤럴드미디어 사장실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발행인으로서 지면에 관심이 많으실 텐데, 오늘 헤럴드경제는 어떻습니까?
“어려운 질문부터 하시는군요. 저는 헤럴드미디어를 인수하면서 3년 동안 언론의 공익성과 고유의 역할은 기업적 의무 이행 다음에 온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습니다. 콘텐츠 차별화 등을 얘기하기 전에 기업으로서 가져야 할 두 가지 의무, 즉 직원들(월급)을 제대로 챙기고, 기업으로서 세금 한 푼이라도 제대로 내야 된다는 겁니다. 출발이긴 하지만 이제 경영개혁을 이뤄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그는 질문에 대한 답에 앞서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를 먼저 꺼냈다. 그는 “이제 다음 단계는 제대로 된 미디어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 위기 아닌 개별기업 위기

▶CEO 된 수석 졸업생. 1993년 하버드대 졸업식 당시의 홍정욱 사장.

"자부심은 있었지만 경영은 형편없었던 회사를 수익성 제일 높은 경제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면을 바라볼 때 저것이 발행인으로서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냐, 하는 것엔 분명히 큰 물음표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냐 하는 건데요. 첫째는 신문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이제 수익성을 갖췄으니 투자에 들어갈 것이냐 하는 겁니다. 신문은 결국 사람 투자가 아니겠습니까? 셋째는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속에서 신문에 계속 투자하는 게 옳은 답이냐, 아니면 종합미디어 기업으로, 동영상 디지털콘텐츠로 (방향을) 틀어냐 하느냐, 그런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런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즘 코리아헤럴드와 헤럴드경제를 보는 심정이 대단히 복잡합니다. 이게 솔직한 답변입니다. 우리 기자들이 보면 사기 저하가 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3년 동안 지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었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안정되지 못했다는 건데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일단 내외경제와 헤럴드경제는 비교할 대상도, 가치도 없습니다. 내외경제는 죽은 신문이었습니다. 이미 죽어있었지만 (신문을 만드는) 본인들만 죽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매체였고, 어떤 변화든 좋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말씀대로 3년 동안 (지면이) 많이 흔들렸지만 요즘은 최소한 (선두 경제지의) 경쟁자로 인식이 되고, 시장에서 플레이어(player)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고무적이죠. 경제와 문화를 섞는 퓨전신문,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준 종합지로서의 변신을 꾀했습니다. 경제지로서 준 종합지로서의 변신은 어떻게 보면 틈새시장이고 어떻게 보면 어중간한 포지셔닝입니다. 사실 아무도 시도를 안 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사실은 대중문화를 가미한 경제지로서의 틀을 굳히느냐, 아니면 종합지로 가느냐, 그걸 결정할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조만간 방향설정을 할 생각입니다.”
시장경제 원칙 안 통하는 신문시장

상당한 방향전환이 이뤄질 수 있겠군요.
“종합지로 가든, 전문적인 경제지 성격을 가지든, 종합지 (출신의) 인재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올해는 외부에서 메이저 마이너 할 것 없이 종합지 전통을 이어가던 젊은 인재들을 영입할 생각입니다. 그 사람들을 집어넣고 방향을 같이 결정해야죠.”

방향전환이나 포지셔닝은 시장분석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경제지 시장과 종합지 시장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는 건가요?
“그렇죠. 흔히 신문시장의 위기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콘텐츠, 아날로그 정보의 위기라고 하는데, 참 호들갑스럽다,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신문시장의 위기 정도는 전 세계 자동차, 항공, 전자시장도 겪고 있습니다. 새로운 제품,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빨리 움직이고 변화해야 하느냐에 대한 시장경제 고유의 고민입니다. 전자회사는 2~3년 단위로 하고…. 그런데 이런 고민을 400년 동안 안 했던 곳은 신문과 정유산업밖에 없습니다. 설탕회사인 CJ도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은 400년 전과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기자들이 기사 쓰고 그것을 윤전기로 찍어내는. 미디어 시장에서 신문이 차지하고 있는 파이는 작아지고 있는지 몰라도, 신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출 규모는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신문이 성장을 안 하고 있으니 점점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내일모레 망한다고 얘기하는 것도 우스운 겁니다. 신문의 위기는 시장의 위기가 아니라 개별기업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잘하면 살아남고, 더 크게 발전하지만, 못하는 기업들은 망해야 해요. 특히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 시장에 더 심각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경영이 어려운 신문사들이 언론개혁을 가장 강하게 요구하고 있어요. 젊은 경영인으로서 소견을 말씀 드리는 게 외람스럽지만 제가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도 기업이라고 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들, 즉 다른 시장경제나 기업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걸 봤습니다. 언론기업이기 때문에 이행되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중학교 3학년 때 조기유학을 가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스탠퍼드대학원 법과대학원을 나왔으며 다국적 금융기관인 리먼브러더스에서 M&A 전문가로 활동했던 그에게는 시장경제가 낯 익었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각으로 언론기업을 경영해야 했던 고통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사를 생략하면서 강조하는 단어를 먼저 던져놓고, 설명에 들어가는 그의 말은 연설과 같았다. “경제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장을 갖고 있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성장도가 낮습니다. 종합지, 시장경제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굉장히 혼미합니다. 신문 유통원이 생기면서 시장경제에 의한 결단이 아닌, 언론기관으로서의 생존이 질질 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저희는 확실하게 경쟁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이제 신문을 통해 성장을 추구하지는 않고, 이 매체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을 성장동력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외람되지만” “00에게는 송구스럽지만”이라는 말을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사용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양수화 글로리아오페라단 단장이 “바리톤 베이스를 해도 좋을 정도로 좋은 목소리”라고 할 만큼 굵직한 음성을 지닌 그의 답변은 논리적이고 차분했다. 또 질문을 던지면 보충 질문이 필요 없을 만큼 전후좌우 상황을 종합적으로 막힘 없이 설명했다. 덕분에 그의 대답은 평균 5분이 넘었고, 9분까지 걸리기도 했다. 언론사 발행인다운 응답이었다.

경영자는 실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언론사는 일반기업과 상당히 다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들어와서 헤럴드미디어에 가한 조치는 좋은 언론기업을 만들겠다는 것보다는 ‘응급조치’였습니다. 다 죽어가는, 쓰러져가는 매체와 기업을 어떻게 하면 회생시키느냐, 한 달 후면 부도난다는 기업을 흑자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한 가지 비전만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비전이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지도자에게 가장 힘든 것은 균형감각이라고 봅니다. 잘 알겠지만, 회사의 수익이 얼마고, 심지어 수익 때문에 얼마의 보상금, 성과급을 받았다, 이런 거 신경 안 쓰는 기자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시장경제에 익숙한 경영자로서 언론기업을 경영하기 가장 힘든 측면 중의 하나입니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바탕에 깔린 건 결국 자긍심이더군요. 기업의 경우 자긍심은 우리가 1등 기업이다, 돈 잘 번다, 튼튼한 기업이다 등으로 나타나는데 언론사는 영향력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매체의 영향력이 사실상 매체의 재무 건강성에 앞서는 대단히 특이한 곳이죠.”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으셨겠군요.
“리더십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통감하는 사람들은 고민을 아무와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고민) 해소가 아니라 잊게 해주는 방법을 찾아나서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고 질문하면 당혹스럽습니다. 하는 게 없어요. 여기 들어온 후 골프도, 축구도 안 하고 술도 잘 못합니다. 고작 한다고 하는 게 공연 가고 집에 가서 회사 생각 안 하는 겁니다. 참 고루한 답변이지만 이게 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듯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취재과정에서 만난 그의 오랜 친구는 다른 말을 했다. “인수 시절부터 새벽 1~2시에 ‘맥주 한 잔 하자’는 전화는 예사였어요. 밤새 고민하다 와이셔츠 바람으로 달려와 줄담배를 피우며 어떻게 하면 회사를 일으킬 수 있을지 묻고 또 물었죠. 거의 항상 입술이 터져 있었으니까요. 요즘에는 많이 안정된 듯 약속도 미리 하고 만나는 편입니다.”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새로운 매체를 계속 만들고 있는데요.
“제가 온 다음 특수매체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중·고생을 겨냥한 영자지 주니어헤럴드와 3월에 창간할 대학생 대상의 캠퍼스헤럴드(무가지)가 그겁니다. 캠퍼스헤럴드는 오프라인 미디어가 두 손 두 발 다 놓은 대학생 시장을 공략할 겁니다. 이 회사에 들어와 시작한 매체치고 손해 본 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헤럴드경제와 헤럴드코리아 두 매체로 연결이 되느냐, 얼마나 빨리 연결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헤럴드경제를 3년 안에 두 배 정도 부수를 늘릴 수는 있지만 그래도 메이저 종합지 영향력과는 비교가 안 될 겁니다. 그래서 일단 틈새시장의 리더로 자리 잡게 하지만, 부수와 영향력 1위 매체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노력을 디지털 콘텐츠에 쏟아부어 가장 비전이 확실한 종합미디어 기업으로 만들고, 가장 수익률 높은 종합미디어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은 확실합니다.”
임직원 숫자 3분의 1 줄여 예상 외의 답변이었다. 현재 주력품목인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를 ‘확실하게’ 키우지 않고 다른 곳에서 미래를 찾겠다는 말이었다. 실수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매체는 많지만 키워나가야 할 주축은 결국 헤럴드경제가 아닙니까?
“한동안은 그렇겠죠.”

‘한동안’이라면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는 계속 개선해가야 하지만 헤럴드미디어의 성장동력은 아닙니다. 우리가 올해 500억원 매출을 넘어갈 예정인데 두 개만 가지고 600억, 700억원도 갈 수 있겠죠. 그러나 1000억원을 넘기고, 2000억, 3000억원을 가겠느냐? 대답은 노(NO)라고 봅니다. 가능성도 있지만, 나중에 그 결과가 나오면 사고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추진하는 게 아닙니다. 동력은 헤럴드경제와 코리아헤럴드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미래사업에서 찾아야죠. 그것은 방송사업이고, 주니어헤럴드 같은 신매체 사업이고, 그리고 인터넷이고, 서울영어체험마을에 이어 어제 수주한 안산영어체험마을입니다. 이 네 가지를 미래사업으로 잡고, 미래사업에서 성장동력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의사결정 빠르다는 평판 들어

지식정보기업을 만들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신문을 기반으로 하지는 않겠다는 말입니까?

▶명강사 CEO. 홍정욱 사장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명강사로 이름값을 높이고 있다.

“예. 참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데, 다른 신문사 사장님들은 하나같이 ‘우리 기자 많고 정보 지식 다 가지고 있으니 뉴스 채널 만들어 인터넷에서 뉴스 방영하고, (케이블TV에서) 방송채널 하나 잡아가지고 하면 되겠다. 시너지가 있다’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경제지는 일률적으로 경제뉴스 채널을 만듭니다. 벌써 경제채널이 3개입니다.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몇 배인 미국에서도 사실상 경제뉴스 채널은 CNBC밖에 없습니다. 뉴스채널도 CNN과 폭스뉴스 2개밖에 없습니다. 오만의 결과라고, 무지의 결과라고 볼 수도 없고…. 우리가 경제채널을 만든다? 우리가 보도 기능 갖고 있으면 광고주들 닦달해서 먹고는 살겠죠. 그러면 과연 시장이 경제채널 4~5개를 필요로 합니까? 저희는 MPP(케이블TV의 복수방송채널사용사업자: 콘텐츠를 제작, 내보내는 채널(PP)을 여러 개 가진 사업자)가 되고 싶습니다. 수익성 있는 채널 5~10개 정도를 모은 종합미디어 기업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뉴스채널, 영화채널, 교육채널도 있는데 종합뉴스, 경제뉴스 같은 일률적인 것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잡(Job)뉴스라든가, 틈새시장을 잡아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 계획은 이미 실행 중이다. 헤럴드미디어는 1월 2일 직업교육 채널인 ‘잡(Job) TV’의 지분 15%를 인수해 케이블TV 사업에 진출했다.

3년 전으로 얘기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아직도 인수 과정을 두고 구구한 억측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웃으면서) 당시 「이코노미스트」도 기사 하나를 썼죠. ‘무슨 돈이 있어서?’라는 까칠까칠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에서) 벤처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딸과 함께 영구 귀국한 후 영주권 때문에 병역면제됐지만 짧게라도 갔다 오는 게 좋겠다 싶어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나를 통해서 (한국에) 투자하고 싶다는 외국 투자펀드들이 있어서 한동안 M&A 하겠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실제로 기업인수 입찰에 두세 번 참여했고, 기업 실사도 했는데 우연찮게(신문사) 매물이 나왔다는 말을 선배에게서 듣는 순간, 제 아내를 봤을 때처럼, 느낌이 팍 왔어요. ‘신문사 경영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당시 대한민국에서 돈 좀 있다 싶은 사람에게는 다 한 번씩 오퍼(Offer)가 갔던 기업이었습니다. 요즘도 기업 오너들을 만나면 ‘그때 사라고 왔을 때, 안 샀는데 참 고생했네’라고 합니다.” 그가 말한 ‘벤처 사업 실패’는 리먼브러더스 이후 140만 달러를 투자받아 운영했던 벤처기업 경영 경험을 말한다. 그는 창업멤버로 CFO를 맡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홍 사장은 추가 질문이 없었음에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당시 적게는 200억, 많게는 800억원 규모의 투자펀드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이 있었음에도 5년이 되든 10년이 되든 30년이 되든, 내 기업으로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요청하지 못했죠. 상장하지 않을 건데, 어떻게 투자를 끌어냅니까? (인수자금은) 이것 따지면 50억원 정도였습니다. 워낙 회사가 어렵고, 경기가 안 좋아 그렇지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가격이었죠. 모든 M&A는 30%의 지분투자와 70%의 대출로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입니다. 미국에서도 큰 규모도 그래요. 더구나 처갓집 도움받기는 싫었고, 부모님도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실 정도로 여유가 있었지만 제가 부담스러워서 사실 자금 마련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가진 돈이 많지도 않았고. 어쨌든 그런 비율로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도움도 받았죠. 투자가 아닌 개인에 대한 투자로 말입니다. 돈 벌면 돌려준다. 이렇게요. 아버님 친구들에게도 받고. 당시 (인수자금) 내역을 (외부에) 공개하기 싫었던 이유는 큰 M&A라면 굵직한 투자자들도 있어 좋겠지만, 여기서도 조금 받고, 저기서도 조금 받았던 것이어서 그랬습니다. 자료 자체는 내부적으로 다 공개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직원들은) 대주주로서 증자도 하고, 돈도 채워주고 하겠지 하는 잠재적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대에 실망을 준 데다 가차없이 구조조정하고, 수입 내 지출을 강조하다 보니 기대했던 사람들은 야속했을 겁니다. 이런 충돌이 초기부터 있었죠. 그 부분에서 저는 단호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부딪칠 것이라고 생각했죠.”

추가 투자 없이 오너로 회사를 이끌고 가겠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를 발견했다는 뜻입니까?
“이 회사를 들여다보다 숫자에서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50년 동안 거의 계속해서 적자상황이었고, 450억원 자본금이 3억인가 30억원인가 정도밖에 안 남아 있었는데 숫자를 보는 순간, 왜 이 회사가 수익을 못 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장에서도 매년 일정한, 기복이 없는 매출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유는 경영 방만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매출이 끊임없이 하락한다든가, 폭락하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큰 것은 감(感)입니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나일론 회사를 인수할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매년 15% 수익이 고정적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시장이 좋아지면 다시 팔아야 했어요. 언론에 대해 아는 건 없었지만,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수했습니다.”

다른 생각 할 틈이 없었네요.
“그럼요. 신문은 언젠가 한 번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들다. 다시 오면 시장 가격을 내고 사야 한다. 그리고 이 정도의 중앙 매체가 서른두 살의 나에게 돌아올 기회는 평생 없다. 지금 하든지, 아니면 나중에 진짜 큰 돈 내고 취미로 하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올인 해보자 한 겁니다.” 이와 관련해 홍 사장과 절친한 한 친구는 알려지지 않았던 뒷얘기를 전했다. 그는 “정욱이 부모님이 제게 전화해 ‘(인수를) 말려달라’고 했을 정도로 집에서도 반대했다”며 “친구들도 왜 그런 어려운 걸 하려고 하느냐고 극구 만류했지만 ‘철저하게 분석했다’ ‘가능성이 있다’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세 가지 조건 맞아야 정치 참여 “원래 고집이 있는 데다가 모험에 가까운 도전을 좋아해요. 와이프도 그렇게 만났어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는데 먼발치에서 보더니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결혼까지 하더라고요. 신문사도 모두들 ‘6개월 못 간다’고 했는데도 결국 도전하더군요.” 실제로 그의 신문사 인수는 지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양수화 단장은 “초기에 사장실을 방문했는데 너무 걱정스러워 울면서 기도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마음이 급한 미숙한 경영자였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인수하고 12월 20일 간부회의 후 (사장실) 책상에 앉았는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뭘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떤 보고를 받아야 할지, 숫자는 다 알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동시에 50년 된 빈곤한 역사가 사방에서 짓누르고, 구석구석 정겨운 손때가 아니라, 가난의 때가 배어있는 사옥, 이런 사옥에서 어떻게 애정과 애사심을 느낄 수 있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첫날부터 강하게 나갔죠. 그러나 미숙한 경영자임에는 틀림없는 것이 개혁에는 순서가 있고, 비전에는 속도가 있는 것처럼, 경영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면서 해야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빌딩 팔자’고 했으니 참 바보스러운 행동이었죠. 1년 안에 승부를 보자는 열망이 강했죠. 빠른 속도로 반전을 이뤘지만 조금만 더 잘했다면 1년은 더 앞당길 수 있었을 텐데…. 시행착오가 많이 있었죠. 후회 많이 합니다.” 3년 동안의 구조조정으로 헤럴드미디어 임직원은 600명대에서 400명 정도로 줄었다. 이에 대해 홍 사장은 “좋은 인재란 비전을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이라며 “(좋은 인재가 아니어서)잡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취재과정에서 타진해본 그에 대한 회사 내 평가는 대다수 호평과 소수의 묵묵부답이었다. 특히 “젊은 경영자답지 않게 경청을 잘하고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대답이 많았다. 인수팀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회사를 떠난 한 사람은 “의외로 의욕도 대단했고 배우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며 “도전의식은 높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완고하게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그를 평했다.

많은 사람이 ‘홍정욱은 똑똑하기는 한데 너무 목표지향적인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너무 철두철미하고 전략적인 것 같다는….
“맞습니다. 좋은 리더들을 보면 항상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들이 보면 무슨 콤플렉스가 있을까 하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거죠. 목표의식이 철두철미하고 전략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 왜 그럴까요? 아버지는 영화배우로 성공했고 존경받았지만, 저는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문화인, 예술인으로 사셨지만 저는 경제·사회·문화에서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목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 보니 남들보다 빨리빨리 가지 않았겠습니까. 콤플렉스가 없으면 그럴 필요가 없죠.”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빨리 현실에 발을 담근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많습니다.
“저는 『7막 7장』이 입혀준 옷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고 쓴 책인데, 그 이미지는 제가 평생 지켜나가야 할 부분이기보다는 깎아나가야 할 게 훨씬 많은 이미집니다. 그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 저는 검증을 받겠다고 나섰습니다.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만족합니다. 검증이라는 게 사실 적과 아군이라는 것을 만드는 일 아닙니까? 그 검증과정이 두려워 베일에 싸여서 지내는 사람들,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딱 질색입니다. 어떤 영화배우는 한 이미지로 몇십 년을 우려먹고 사는데 배우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신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명이 다한 겁니다. 저라는 사람에 대해 현실보다 과한 이미지가 입혀졌는데 이제 그 이미지에서 깨어나셔야 할 분은 죄송스럽지만 깨어나셔야죠. 어떡하겠습니까. 대중적인, 신화적인 호감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베일 뒤에 숨진 않겠다”

정치와 관련해 많은 억측이 나돌고 있습니다. 93년 인터뷰 때는 “언론관계 일이나 선거정치 쪽”을 얘기하셨는데 99년에는 “정치에 대한 야망을 감추는 관행이 꼭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했고, 2003년 6월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인터뷰에서는 “아직 정치 참여는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8일자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는 “헤럴드미디어를 안정적인 언론사로 만들어놓은 다음, 다른 영역으로 진출할 생각이다. 그것이 정치일 수도…”라고 했습니다.
“제가 혼자서 뛰는 프리랜서 언론이나 예술인이라면, 다 발설하고 당당하게 주장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기업과 기업에 속하는 식구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제 성격적으로 가는 방향을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 다물고 가면서 내가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압박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재미없는 답변을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만 중립적인 답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사회적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언론기업의 정점에서 활동하고 있으면 정치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게 되죠. 그리고 혐오하면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 변화에 내가 적당한 사람이냐 하는 목적과 주체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그 변화를 내가 바꿔야 하는데 그게 지금인가 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맞다, 그러면 정치판 가는 겁니다. 그렇죠? 그 세 가지 다에 대해 확고한 답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많고 항상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올인을 하고 열정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리스크를 걸만큼, 세 가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어요. 혹시나 오버해서 “네, 기회가 닿으면 해보고 싶다”고 했다가 기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을 항상 하게 되죠.” 인터뷰를 시작한 지 세 시간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퀴즈를 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사자성어를 하나만 대보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15여 초 이상 시간을 끌면서 “어렵다”고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건 많은데…. 오늘 인터뷰 방향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떠오르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떠오르고,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도광양회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저를 괴롭힌 사자성어인데요. 아시죠? 왜 그런지…. 저만이 아니라 누구든 모든 것을 떠나 언론에 의해 (회사와 자신이) 인정받는 것은 원하지만, 언론에 나왔을 때는 그에 따른 타격이 항상 있습니다. 현실적인 타격이든, 저만이 느낄 수 있는 타격이든…. 분명히 타격이 있습니다. 고민입니다.” “가속하면 저항도 생기는 게 아니냐”며 인터뷰를 끝내려고 일어서는데 그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언젠가 정말 스펙터클한 실패를 한 번 해야 합니다. 이 기업은 아니고…. 그래야 저도 진정한 경영인이 되고 사람이 되고…. 사람들도 저를 리스크를 안은 도전자로 인정해줄 것이고…. 제 인생에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홍정욱 사장은
1970년 서울생. 서울 구정중 3학년 때 유학을 가 케네디 대통령의 모교인 미 초트 로즈마리 홀 고교를 졸업했다. 이어 93년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를 졸업했고 베이징(北京)대 국제정치학대학원을 수료했다. 98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법과대학원에서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변호사를 거쳐 98년 다국적투자금융기업인 리먼브러더스에서 인수합병 전문가로 근무했다. 이후 스트럭시콘이라는 벤처기업을 설립, CFO를 지냈다. 2001년 12월 17일 군에 입대, 공익근무요원으로 6개월간 병역 의무를 마쳤다. 2002년 12월 당시 내외경제신문(현 ㈜헤럴드미디어)을 인수,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93년 발간한 유학생활 과정을 다룬 『7막 7장』은 100만 부가 팔렸으며, 2003년 복간한 『7막 7장 그리고 그 후』는 현재까지 10만여 부가 판매됐다. 영화배우 남궁원씨의 외아들이다. 홍 사장의 아내인 손정희씨는 손원일 전 국방부 장관의 친손녀이며, 장인인 손명원씨는 현대중공업 부사장·쌍용자동차 사장을 지냈다. 손씨의 외할아버지는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이며 정몽준 의원은 손씨의 이모부다.


헤럴드미디어는…
헤럴드미디어는 영어종합지인 <코리아헤럴드> 와 일간지 <헤럴드경제> , 주니어 영어신문 <주니어헤럴드> 를 발행하고 있다. 자회사로 <디지털헤럴드> <헤럴드아카데미> <코리아헤럴드에이엠> <헤럴드차이나> 등이 있다. 임직원은 400여 명. 홍정욱 사장은 2002년 12월 4일 신동방그룹이 보유했던 지분 49.7%를 377억원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과 48억원의 인수자금으로 경영권을 확보했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505억원이다.


홍정욱 사장의 발언들
●“회사는 팔지 않는다. 오너십을 계속 유지하겠다.” ●“올해 종합지 출신 젊은 기자들을 적극 영입할 것이다.” ●“대중문화 가미한 경제지와 종합지 중 조만간 방향 결정” ●“신문의 위기는 시장의 위기가 아니다. 개별기업의 위기다.” ●“정치는… 아이디어는 많지만 (해야 할) 답을 찾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AI 제조기기, 스마트팩토리와는 다르죠”...그가 꿈꾸는 소각장은 달랐다

2현대차, ‘2025년 미래모빌리티학교’ 참가 모집

3에드워드 리, 두부 이어 두유도…매일유업 앰서버더 꿰찼다

4전세사기 피해자 938명 추가 인정…누적 2만 4668명

5맘스터치 ‘리로케이션’ 지원 뭐길래…“평균 매출 265% 증가”

6“최대 80% 할인”…무신사, ‘무진장 24 겨울 블랙프라이데이’ 시작

7‘2024 친환경건설산업대상’ 국토부 장관상에 GS건설…총 9개 사 수상 영예

8“韓 제조업, AI로 변한다”...AI 국가 경쟁력까지 향상 효과

9나쵸와 만난 뿌링클...bhc, 새로운 사이드 메뉴 출시

실시간 뉴스

1“AI 제조기기, 스마트팩토리와는 다르죠”...그가 꿈꾸는 소각장은 달랐다

2현대차, ‘2025년 미래모빌리티학교’ 참가 모집

3에드워드 리, 두부 이어 두유도…매일유업 앰서버더 꿰찼다

4전세사기 피해자 938명 추가 인정…누적 2만 4668명

5맘스터치 ‘리로케이션’ 지원 뭐길래…“평균 매출 265%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