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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인구 폭탄’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인구 폭탄’

지난해 10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이른바 ‘임산부의 날’이 선포됐다. 국회 저출산고령화사회 대책특위가 주최하고 의사협회가 주관한 행사로 ‘임산부 권리 선언문’이 낭독됐다. “임산부는 직장의 채용, 승진, 해고에 있어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 임산부와 그의 소속 직장은 국가 모성보호 정책의 배려 대상이다. 국가는 임산부의 권리를 수호해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선언문은 지당한 말씀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기혼여성의 35%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한다. 보건복지부와 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가 지난해 4∼6월 기혼여성 및 미혼남녀 6472명을 면접조사한 결과 기혼여성의 64.4%만 자녀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나이가 적을수록 자녀의 필요성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또 자녀를 둔 가구 중 생활비에서 교육비 지출이 가장 많다는 응답(51.7%)이 절반을 넘었다. 사교육비는 자녀가 초등학생일 때 월평균 26만4000원, 중학생은 35만5000원, 고등학생 44만3000원으로 조사됐다. 결국 자녀 양육 부담과 사교육비 때문에 아이 낳는 것을 꺼린다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안 낳는 게 성공 재테크란 말이 나돌까. 한국의 사교육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다. OECD 통계연보를 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교육비 비중은 7.1%(2002년 기준)로 3위다. 그런데 공교육비 비중이 4.2%로 OECD 평균(5.1%)에 못 미치는 반면 사교육비 비중은 2.9%로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인구 구조의 특징은 ‘세계 최저 출산율 속 세계 최고로 빠른 고령화’로 요약된다. 2004년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자녀 수)은 1.16명. 2.1명은 돼야 현재 인구 수준을 유지하는데 그 절반인 출산율 1.1대를 겪은 나라는 지구상에 체코와 한국뿐이다. 1970년 100만7000명이었던 신생아는 2004년 47만6000명으로 급감했다. 뒤늦은 출산장려정책에 힘입어 출산율이 조금 높아져도 신생아 수는 늘기 어려운 구조다. 아이 낳을 여성이 적기 때문이다. 신생아의 80%는 25∼34세 여성이 낳는데 2003년 40만 명이었던 이 연령대 여성은 2020년 30만 명, 2040년 20만 명으로 줄게 된다. 아이 낳을 여성이 적은 데다 결혼도 덜하니 신생아는 더 감소할 수밖에 없다. 2015년까지 40만 명을 지키다가 2016년 30만 명대에 진입하며, 2034년에는 30만 명 아래로 내려갈 판이다. 대학은 정원 미달을, 정부는 군입대 병력 감소를 걱정해야 한다.

10년 뒤 대한민국은 ‘아찔’ 어디 저출산만 문제인가? 아이를 덜 낳는데 수명은 길어지니 사회 전체가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2000년 고령화사회(65세 이상 노령인구 비율 7%)를 넘어선 데 이어 2018년 고령사회(노령인구 비율 14%)→2026년 초고령사회(노령인구 비율 20%)를 앞둠으로써 대한민국 인구시계는 고령화 세계 신기록을 예약해둔 상태다. 지난해 평균 노령인구 비율은 9.1%지만 전국 234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이미 35개 군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55곳은 고령사회 단계다. 특히 경남 남해·의령군, 전남 곡성군, 전북 임실군은 인구 넷 중 한명꼴로 노인이다. 이처럼 군 전체가 거대한 실버타운처럼 돼버린 판에 농업 기계화사업 예산이나 시설자금을 배정한들 누가 움직이랴. 오래 살아도 ‘병은 없이, 돈은 있으면’ 괜찮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고령인구는 불어나는데 그동안 이들을 흡수해온 농업과 영세 자영업은 위축되고 있다. 더구나 불과 ‘10년여 뒤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2018년이 문제다. 바로 이땅의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65세)에 진입하는 시기다. 2030년에는 베이비붐 세대가 초고령층을 형성함으로써 거대한 노인집단이 형성된다. 6·25전쟁 직후인 1953∼65년에 태어난 1000만∼12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는 1970, 80년대 젊고 값싼 노동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궜지만 이제 서서히 ‘인구 부채’로 전환되는 길을 걷고 있다. 지구상 모든 나라가 저출산·고령화 추세라면 함께 인정하고 돌파구를 찾으면 된다. 문제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며, 한국은 아직 제대로 준비도 못한 상태라는 점이다. 인구 14억 명의 시장에다 인건비가 싼 중국에선 평판TV·에어컨·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만드는 TCL, 거란스(格蘭仕), 하이얼 등이 연간 1000만 대 생산 체제를 갖췄다. 내수뿐만 아니라 다분히 수출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한국을 위협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선 휴양지의 집값이 오르고 젊음을 지켜준다는 보톡스 주사와 의료 스파 등 노화방지(Anti-aging)산업이 인기다. 1946∼64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를 앞두고 뜨는 신산업 현장이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7820만 명으로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세대(1947∼50년생)도 축복받은 세대다. 일본 경제가 세계를 호령하던 80년대의 과실을 따먹은 데다 연금도 두툼한데 정부가 나서 정년 연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외롭고 답답하다. 아날로그도, 디지털도 아닌 낀 세대로 직장과 가정 안팎에 흔들린다. 직장에서 근근이 ‘38선’을 넘겼는데 ‘사오정’이 기다리고, 실력으로 버텼는데 ‘오륙도’ 멍에를 씌운다. 더구나 자녀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니 노후 준비도 못한 상태다.

정부선 아직도 로드맵만 준비 경제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 주체인 사람들이 장사 형태와 벌이를 결정한다. 그런데 그 구조가 급격하게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 인구가 줄어드는 데다 늙어간다. 물건을 만들고 사서 쓸 사람이 줄어드는데 부양받는 노인은 많아지니 경제가 쇠약해진다. 지금은 그래도 잠재성장률이 4.5∼5%지만 2030년 무렵에는 1% 수준에 그치리란 전망이다. 연금을 받는 노인이 급격히 많아지니 국민연금 사정은 더욱 나빠지고 재원이 바닥날 수도 있다. 그래서 오피니언 리더 100명 중 74명이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경쟁력 낮은 교육과 함께 우리 사회의 10대 과제 중 공동 2위로 꼽았다. 저출산·고령화 시한폭탄이 시시각각 위협하는데도 우리 대응은 너무 안이하다. 지난해 9월에 시행된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에 따라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보건복지부 안에 저출산고령사회정책본부를 신설했다. 그러나 아직 로드맵만 그리고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2020년까지 실행할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상반기 중 확정할 계획이다. 또 여성가족부는 ‘아버지 출산휴가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밖에도 직장에 다니는 부모가 일 때문에 자녀의 학교행사 참여나 담임교사와의 상담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야간 학부모 회의’를 열고, 부모가 아프거나 야근 때문에 자녀를 돌볼 수 없을 경우 교육을 받은 ‘아이 돌보미’를 집에 보내는 제도를 올해 시범 실시하기로 했다. “두 자녀 이상 가구에 지원금을 주는 식의 단편적 대책으론 곤란하다. 공교육을 정상화해 사교육비를 줄이고 사회 기풍을 바로잡는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저출산 문제를 여성의 역할 변화와 비용 측면에서 들여다보자.” (조순 전 경제부총리) “새로 짓는 아파트 1층에 단지 내 보육시설을 만들면 용적률 등 인센티브를 주자. 맞벌이 부부가 출근하면서 단지 안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하며 데리고 오면 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이 아이들을 돌보도록 하면 여성인력과 고령인력의 활용도를 동시에 높일 수 있다.”(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 고령화가 시한폭탄만은 아니다. 새로운 수요와 시장을 창출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선진국에서도 고령자 비중이 10%를 넘어서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이르면서 실버산업 수요가 급증했다. 우리나라가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시점은 2008년으로 불과 2년 뒤다. 고령친화휴양단지, 요양서비스업, 한방보건 관광 등 실버산업을 신산업으로 일구려면 그만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미처 외투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저출산·고령화의 칼바람이 그냥 비켜갈 리 없다. 엄마인 게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정부와 기업, 가정이 함께 나서고 ‘오래 살 위험(Risk)’에도 제대로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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