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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대까지 경영권 승계 거의 불가능

손자대까지 경영권 승계 거의 불가능

"내 재산과 기업, 경영권을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상속과 관련된 재벌가나 중견기업들의 공통된 고민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는 게 재벌가 상속에 대해 밝은 한 전문가의 지적이다. 그는 “재벌가나 중견기업 총수들은 정상적으로 상속·증여세를 다 내고서 자식에게 상속하다 보면 결국 총수 지분율이 낮아져 기업 경영권을 상속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경영권을 제3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소개한다. 경영권 상속이 안 되는 경우를 가리켜 ‘빼앗긴다’는 말을 쓴다는 얘기다. 재벌가나 중견기업가들의 고민은 상속과 경영권 승계에 집중되어 있다. 주식 지분에 대한 상속이 제대로 되어야만 경영권 승계가 순조롭게 되기 때문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삼성 등 모든 재벌들이 상속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상식”이며 “경영권 승계 문제 때문에 최근 현대차 사태 같은 불법행위도 빚어진 것”이라고 진단한다. 물론 이 같은 상속과 관련된 경영권 승계 문제점들이 국내 재벌급 기업들의 구조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란 시각도 있다. 정규재 한경에듀 대표는 “창업자가 처음 창업할 때에는 지분이 100%지만 기업을 키우고 기업공개를 하면서 지분율이 30%대로 뚝 떨어지고, 자식에게 넘어가면 10%대로 더 내려간다”면서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손자 대까지 가고, 또 상속·증여세까지 재산의 50%를 다 내고 나면, 손자 대에 경영권을 온전하게 물려받을 수 있는 국내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재벌가의 상속 고민이 시작된다. 지분 상속을 통해 경영권을 물려 주고 싶고, 경영권 승계를 통해 기업도 계속 키우고 싶지만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 높다. 이번 현대차 사태의 본질도 바로 창업자의 손자(정의선 기아차 사장) 대에 경영권을 승계시키려고 했던 일과 무관치 않다. 그리고 이 같은 경영권 승계에서 불거진 문제점은 기업의 발전이나 글로벌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기업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기아차의 미국 조지아 공장 기공식이 애초 4월 27일에서 무기 연기된 것이나, 현대차가 5월 17일 개최할 예정이던 체코 공장 착공식이 연기된 것이 모두 이번 현대차 사태와 얽혀 있어서다. 고전적인 상속 방법은 금이나 은을 사서 실물자산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규모가 작아 말 그대로 고전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현대적인 방법은 자식에게 지분과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분 상속을 통한 경영권 승계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이제 쉽지 않다. 때문에 총수 자식들이 비상장 계열사의 대주주가 되고, 그룹 주력사들이 이 비상장 계열사를 밀어주는 새 방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상장사와 비상장사 간의 M&A를 통해 자식들을 밀어주는 새 기법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방법들도 너무 흔해 빠졌다”며 “재벌들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 전문가는 말한다. 그래서 재벌가나 중견기업가들은 통상적으로 자식들이 어렸을 적부터 상속에 대한 전략을 짠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상속 대책을 세운다”는 게, 이 분야 전문가의 얘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LG그룹이다. LG그룹 지주회사인 ㈜LG의 대주주는 구본무 회장(10.33%). 창업자 구인회씨의 증손자이며, 구 회장의 첫째 딸인 연경씨와 둘째 딸 연수양은 현재 각각 0.84%와 0.03%의 지분이 있다. 연수양은 이제 열 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분의 실제 거래가격은 17억원에 달한다. 꼬마부자인 셈이다. 2004년 구 회장 양자로 들어온 구광모(28)씨도 이미 2.80%의 지분이 있다. 현대차가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사건들로 곤욕을 치를 때 은근히 미소를 짓는 그룹이 있다. 동부그룹이다. 김준기 회장은 94년께부터 아들 남호(31)씨에게 지분을 서서히 물려 주기 시작해 ‘깔끔하게’대주주 지분 상속을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김준기 회장은 2004년 6월 남호씨에게 김 회장 자신의 동부정밀화학 지분을 넘겼다. 이에 따라 남호씨는 동부화재(14.06%)와 동부제강(7.12%)에 이어 동부정밀화학의 대주주(21.14%)가 됐다. 또 동부한농화학(1.37%), 동부건설(4.01%), 동부증권(6.78%)의 지분도 확보했다. 그룹 경영권 확보에 필요한 지분을 남호씨는 이미 갖췄다. 10년간 주요 계열사 지분을 치밀하게 상속해온 것을 두고, “역산을 하면 남호씨가 20세가 되면서부터 김 회장이 상속에 대한 고민을 그만큼 많이 해왔다는 증거”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화그룹도 비슷한 경우다. 김승연 회장의 아들 3형제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한화 계열사 한화S&C는 매출의 48% 정도를 한화 계열사에 의존하고 있다. 장남 동관(23)씨는 미국 하버드대에, 차남 동원(21)씨는 예일대에 각각 재학 중이고, 막내 동선(17)씨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2001년 4월 ㈜한화 정보사업 부문이 ㈜한화S&C로 분리됐는데, 이때 3형제의 회사로 출발했다. 현재 이 회사는 자본금 60억원, 매출 1500억원(2005년)을 기록하고 있다. 회사 분리 당시 3형제는 모두 10대 소년에 불과했었다. 김승연 회장은 2004년 9월 ㈜한화의 자사주 3.4%를 3형제에게 매각하기도 했었다.
이 같은 상속의 고민은 기실 재벌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양용희 호서대 교수는“우리나라 사람들의 95%는 재산이 많든 적든 상속을 통해 내 자식들과 내 핏줄에게 물려주려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고 말한다. 국내 입양이 안 되는 국내 문화가 단적인 증거라는 얘기다. 또 기업을 마치 자식처럼 생각해 내 핏줄에게 영속적으로 물려주려는 우리 문화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그 유명한 유한양행도 이 ‘상속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창업자인 유일한씨는 전 재산을 1971년 사회에 기부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자식과 같은 기업(유한양행)이 영속적으로 이 사회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유한재단(현 유한양행 지분 15.87%를 지닌 최대주주)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유한재단은 내가 기부한 유한양행 주식을 한 주도 매각하지 말라’고 유언을 통해 밝혔다. 그는 경영권을 핏줄이 아닌 이 사회에 ‘상속’시킨 셈이다. 재벌가나 중견기업가들은 상속 재산의 대부분이 주식이라는 점에서 고민이 많다. 이와 관련, 김봉기 세무사는 “재벌가에서 상속을 하든, 증여를 하든 그 재산이 30억원을 넘으면 재산의 절반은 국가에 세금으로 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재벌가의 재산이 대부분 주식이라는 점이다. 이 주식 지분은 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경영권 방어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지분율이 낮아지면 경영권 방어는 힘들어진다.
현대차 주식은 단 6445주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주식보유 현황(1월 20일 기준, 자료 미디어에퀴터블)을 한번 보자. INI스틸(현 현대제철)이 1068만 주(12.6%, 평가액 2478억원), 현대차 1139만 주(5.2%, 1조336억원), 현대하이스코 802만 주(10.0%, 926억원), 현대모비스 677만 주(7.9%, 5559억원), 글로비스 1054만 주(28.1%, 6285억원)다. 또 비상장 주식은 현대캐피탈 600만 주(8.45%, 846억원), 오토에버시스템즈(10.0%, 52억원) 등이다. 추정 주식재산은 2조6483억원이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상속시키면 아들 의선씨가 물려받는 재산은 1조3000억원으로 크게 줄어든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제철과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차로 이어지는 4각 지주회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상속된다고 하면 이 4개 회사에 대한 의선씨 지분은 정 회장의 반으로 확 줄어든다. 경영권 승계는 물 건너 가게 된다. 현재 의선씨는 기아차 지분 2%(690만 주, 1519억원)만이 있다. 현대차 주식은 단 6445주(6억원어치)만 갖고 있을 뿐이다.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지분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국순당 배중호 사장은 “남들은 최대주주인 나를 보고 1000억원대 큰 주식 부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국순당 주식들을 돈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식을 돈으로 환산하면 큰 돈이지만,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에서다. 실제 기업 대주주 지분은 함부로 팔 수 없다. 경영권 방어 때문이다. 또 만일 회사가 안 되어서 주가가 하락하기라도 하면 대주주 지분은 헐값이 된다. 대주주에게 지분은 경영권 방어 외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 시가총액 5000억원대의 모 상장사 사장은 “내 주식 지분의 시가총액은 700억원이 넘는다. 하지만 쓸 수도 없는 이 주식을 빼면 나는 빈털터리”라고 자조할 정도다. 재벌가의 재산구조와 몇십억원대의 강남 부자들의 재산구조는 다르다. 강남 부자들이 상속·증여에 대한 세무상담을 할 때에 통상 부동산과 예금이 전 재산의 90%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주식이나 골프장 회원권은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재벌들은 주식이 전부다. 이게 경영권 승계라는 작업과 고민을 함께해야 하는 재벌 부자와 강남 부자들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코노미스트 유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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