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면 잘 풀린다
잘 쓰면 잘 풀린다
르노삼성자동차 마포지점의 허성민 영업팀장은 컴퓨터와 씨름하는 시간이 많다. 자동차를 팔러 다니는 일이 주업무인데도 하루 2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하루종일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한다. 고객에게 e-메일을 보내거나 영업결과를 사내 인트라넷에 입력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입사했던 10년 전엔 상상도 못했던 변화다. 예전엔 내근이 거의 없었다. 고객명단을 손으로 작성해 발로 뛰었지, 책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하는 영업은 거의 없었다. 고객관리의 왕도는 전화통화나 직접 방문, 아니면 퇴근 후 술자리였다. 그러나 요즘은 “안부편지에서 제품소개까지 일주일에 40∼50통씩 e-메일을 쓴다”고 허 팀장은 말했다. 영업활동의 상당 부분이 발이 아니라 글쓰기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e-메일은 전화보다 정확하고 우편보다 신속해서 여러모로 편리하다. 게다가 편지 글이라는 형식은 친근감을 높여 주는 장점도 있다. 고객들도 원하는 시간에 읽을 수 있는 e-메일을 선호한다. 그러나 고객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통의 e-메일을 받기 때문에 웬만한 내용이 아니고서는 기억조차 못한다. 사실 스팸메일로 오인만 안 받아도 다행이다. 그러니 e-메일을 보낼 때마다 여간 고민이 아니다. “매번 식상한 내용을 보내기도 참 무안하다. 그럴 때마다 글을 잘 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허 팀장은 말했다. 그래서 책을 가까이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글귀를 보면 메모도 마다하지 않는다.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홍보자료가 많기는 해도 나만의 고객관리 수단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SK주식회사 울산공장의 김현수 부장은 정유화학 생산공장(플랜트) 엔지니어다. 설비의 유지보수가 주업무다. 그런데도 요즘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기술설명서·기술검토서·성과보고서 등을 쓰는 일이다. 예전에도 뭔가를 쓰긴 썼지만 “유지보수 몇 건 했다”는 정도의 단순 실적보고에 그쳤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극심한 구조조정을 겪으며 조직과 하는 일이 완전히 바뀌었다. 엔지니어링 부분이 통폐합되면서 사실상 한 개의 회사를 꾸리고도 남을 만한 커다란 조직이 하나의 팀으로 재편됐다. 그러다 보니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과 업무를 함께해야 했고 타 업무부서 사람들이나 해외 SK계열 기업들이 사실상 김 부장의 주요 고객이 돼 버렸다. 김 부장은 현재 신규 사업 진출을 모색하는 SK중국 법인의 경제 경영 전문가들을 돕고 있다. 그들에게 기술분야를 설명하고 검토서를 제출하는 일이 잦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얼굴을 마주대하기보다는 e-메일이나 전자문서에 많이 의존해야 한다. 이럴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전공이 제각각이라 서로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다. 기술용어와 경영언어가 서로 뒤엉키기 일쑤고, 심지어 기술분야 안에서도 전공이 다르면 서로 무슨 암호문을 주고받는 느낌이 드는 때도 있다. 따라서 “원활한 업무협조가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알기 쉽게 말하고 문서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김 부장은 말했다. 그는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타분야 동료들도 일종의 고객”이라며 “내가 쓴 기술문서를 고객이 이해하지 못하면 전적으로 엔지니어인 나의책임”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직원들의 글쓰기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삼성·두산·LG·포스코·코오롱·하이닉스·우리홈쇼핑·인하대·교보문고·네오위즈 등 많은 기업이 외부강사를 초청해 글쓰기 특강을 열고 있다. 사원들도 업무 분야를 막론하고 퇴근 후에 이루어지는 글쓰기 교육을 받겠다고 몰려든다. 그 바람에 각 회사는 글쓰기 교육 수강대상의 폭을 넓히고 교육기간을 연장하는 추세다. 대한주택보증은 지난해 6회에 걸쳐 문서작성법 강의를 실시했고 두산중공업도 연구개발(R&D) 분야 임원과 팀장급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을 벌였다. 사원들의 글쓰기가 회사나 개인의 생산성을 크게 좌우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업에서 글쓰기의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강조돼 왔다.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의견을 주고 받고 책임소재를 가리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문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강조되는 글쓰기는 과거의 규격화된 문서형식이 아니다.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는 김익수 비즈라이팅 대표는 “파워포인트 문서작성법이나 기획서 양식을 가르쳐 달라는 예전과 달리 요즘은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게 해 달라는 요청이 많다. 말하자면 본원적 차원의 글쓰기 교육 요구가 많아진 셈”이라고 말했다. 기업과 회사원이 기획서가 아니라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글쓰기에 새삼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 환경의 변화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역설적으로 글쓰기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글쓰기의 힘, 디지털 시대의 생존전략’을 출간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미화 연구원은 말했다. “블로그나 개인 홈피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고객을 찾는 영업맨들이 많다”는 허성민 팀장의 말마따나 인터넷은 비즈니스맨과 고객이 만나는 접점을 전에 없이 확장했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시대인데도 텍스트의 비중은 오히려 늘어났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e-메일, 게시판, 그리고 인스턴트 메시징 프로그램 등은 전화나 대면으로 이뤄지던 일상대화 중 상당 부분을 문자 텍스트로 바꾸어 버렸다. 온갖 주제의 다양한 글쓰기가 넘쳐나는 블로그는 텍스트가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또 다른 증거다. 블로그 이용자 수는 이미 국내에서만 1000만 명을 넘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블로그 마케팅’이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컨설턴트 제러미 라이트는 이를 책으로 내기도 했다 (용오름 출판사가 최근 번역출간). 상징가치가 실질가치를 지배하게 됐다는 새로운 추세도 글쓰기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시켰다. 이제 문화가 없는 상품은 적정가격을 받기 어려워졌다. 품질만으로 상품의 가치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문화 자체가 상품이고 감성이 없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비즈니스적 글쓰기는 딱딱한 논리뿐 아니라 부드러운 감성도 필요하게 됐다. 인문적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코펜하겐미래학연구소 롤프 옌센은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에서 정보화사회 다음에는 상품에 얹어진 이야기의 가치가 팔리는 사회가 온다고 주장했다. 물건에 이야기까지 합해져야 경쟁력 있는 상품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지식사회의 등장 또한 글쓰기의 중요성을 배가했다. 1998년 GM은 MS보다 매출이 열 배나 높았지만 기업의 시장가치를 나타내는 척도인 주식시가 총액은 MS에 비해 7분의 1에 불과했다. 시장이 MS의 지식자산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한 때문이었다.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구본형 소장은 “생각을 창조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시키는 것이 바로 지식사회의 핵심이며 그 지식의 유통을 담당하는 매개물이 바로 글쓰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글쓰기는 훌륭한 직업인의 필수적 요건이 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사실 요즘 들어 직장인들은 혁신이다 업무개선이다 해서 예전에는 하지 않던 일들이 많아졌다. 서울시설관리공단 이성림 대리는 “분기별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하는가 하면 서비스 개선 기획안을 제출하라는 지시도 빈번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사기업이나 공기업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아이디어와 창의를 부르짖는다. 이젠 누구나 기획자가 돼야 성공한다. e-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기획안 제출하세요’의 저자인 이영곤 오픈타이드 이사는 “요즘은 전략기획·마케팅·홍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업·관리 등 모든 분야에서 기획서를 쓰고 또 기획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환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획서란 기승전결을 잘 갖춘 한편의 이야기”라며 그 이야기를 만드는 “글쓰기 과정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마지막 기회가 된다”고 강조했다. 기획분야에서 꽤 인정을 받는 그지만 “지금도 예전에 썼던 기획서를 다시 꺼내 글쓰기 관련 책을 보면서 고쳐 쓰는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경제경영서를 30여 권 이상 저술한 마케팅MBA의 김영한 대표는 “좋은 것을 흉내내 빨리 많이 만들어내야 했던 시대는 지났다. 모방경제에서 창조경제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새롭고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누구보다 먼저 개발해야 성공하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다. 따라서 “창조와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말하게 하고 쓰게 하는 일이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연세대의 정희모 교수도 글쓰기는 창조적 사고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글쓰기는 머릿속에 흩어진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논리) 타인에게 전달하고(소통) 이를 통해 새로운 생각을 계속 만들어가는(창의) 학습과정”이란다. 사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창조란 도달하는 순간 다음 과정이 시작되는 연속의 과정이며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창조의 실재”라고 말했다. 글을 쓰는 행위 속에서 사유는 끊임없이 지속되며 그 사유는 다시 글로 표현된다. 한마디로 글쓰기는 부단한 창조의 과정이며 창의의 습관을 길러주는 중요한 학습도구인데 21세 기업환경은 바로 그런 능력을 요구한다고 봐야 한다. 지난 15년간 글쓰기를 가르쳐온 정희모 교수는 지난해 말 ‘글쓰기의 전략’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교보 문고 인문과학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출판사 측은 “논술시험을 앞둔 고교생이 주 독자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30~40대 직장인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성인들이 글쓰기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올해 들어서만 비즈니스 글쓰기 관련 책자가 20여 종이나 출판됐다. 아울러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사교육도 최근 대단히 활발해졌다. 김익수 비즈라이팅 대표는“2년 전까지만 해도 강의요청은 1년에 2~3번에 그쳤다. 그러나 올해 들어선 2~3일에 한 번 꼴로 요청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글쓰기 사교육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방증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직장인들에게 글쓰기를 교육하는 사람으로는 ‘필통(筆通) 90일 작전’(http://www.biz-writing.com/Academy/ 90days.asp)의 김익수 비즈라이팅 대표와 ‘힘글쓰기’(http://www.tec-writing.com)의 임재춘씨가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서울디지털대학교 겸임교수로 그의 강의엔 학기마다 500명 이상 몰린다고 주장했다. ‘필통’은 ‘글로써 소통한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그동안 회사 출장 강의에 전념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중적 수요가 높아지면서 지난 3월 온라인 강좌를 개설했다. 회원들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 김 대표가 직접 답글로 평을 올려 주는 방식이다. 김 대표는 “개설 닷새 만에 250명이 몰려들어 깜짝 놀랐다. 답글 다는 일이 굉장한 부담”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무료였던 사이트를 최근 유료로 전환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그런데도 하루 10인 이상은 꾸준히 접속해 과제를 올린다. ‘필통’의 방법은 3단계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정독하고 베껴 쓰는 1단계를 통해 문장구조와 논리적 글쓰기의 틀을 배우고, 자신의 관점에 따라 기존 기사를 새롭게 변형해 보는 2단계를 거치고 나면 비로소 특정 주제로 자기 글쓰기에 돌입하는 3단계에 진입한다. ‘필통’에 가입한 이성림 대리는 “신문기사가 이렇게 훌륭한 학습교재인지 몰랐다. 베껴 쓰기 연습만으로도 단어선택이나 문맥이 좋아지는 등 벌써 효과를 보는 듯하다”며 흡족해했다. 이 대리는 야근에도 불구하고 한 달째 꼬박 거르지 않고 과제를 올렸다. 임재춘 영남대 공대 객원교수는 기술고시 출신으로 과학기술부 원자력국장과 대통령과학기술비서관을 역임했다. 방사성폐기물 관련 신문광고 문안에서 주어를 빼먹는 등 비문(非文) 투성이의 글을 쓴 일을 계기로 91년 좌천됐다. 이 일이 있은 후 글쓰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해외 MBA에서 우연히 ‘Writing’ 강좌를 들으며 ‘Power-Writing’이라는 글쓰기 방법론과 마주쳤다. 사실 ‘Power-Writing’은 미국 초·중·고에서 오랜 세월 사용해 온 글쓰기 훈련도구다. 임 교수는 이를 ‘힘글쓰기’라는 우리 말로 바꿨는데 핵심은 손가락 다섯 개에 각각 의미를 붙여 글쓰기의 기본을 확인하게 해 주는 방법이다. 엄지(0)는 글을 읽는 대상을 0순위로 고려하면서 글의 목적을 밝히고, 검지(1)는 주제와 주장이 우선 분명해야 하며, 중지(2)는 근거와 방법을 마련하고, 무명지(3)는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해야 하며, 새끼손가락(4)은 주제와 주장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상징한다는 말이다. 임 교수는 여러 기업에서 강의하느라 바쁘다. 전국여성과학기술인 지원센터(NIS-WIST)와 네오위즈 등 주로 이공계 직장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 네오위즈의 김영민 기술기획팀장은 “벤처기업들은 문서체계가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업무 인수인계에서 어려움이 많다. 또 기술직 사원들의 글쓰기 훈련이 미비한 점도 고려했다”고 임 교수의 특강을 마련한 이유를 설명했다. 직원들이 만들어낸 지식을 축적하고 직원들 간 효과적인 의사소통에 글쓰기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말이다. 게임QA팀 현정윤씨는 “외부 개발사와 연락할 일도 많고 같은 회사라 해도 층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으니 e-메일과 메신저를 많이 이용한다”면서 임 교수의 강의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개발2팀 박은영씨도 “하루에 업무 관련 e-메일이 200통이 넘는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메일은 업무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번 강의를 통해 두괄식으로 요점만 간단히 제시하는 메일을 쓸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워했다. 각종 취업포털이나 교육 사이트에서도 글쓰기 강좌는 인기가 있다. 채용포털 커리어다음은 취업하면 발길을 뚝 끊는 고객들의 재방문을 유도하려고 직무교육의 일환으로 글쓰기 강좌를 개설했다. 애초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50명 정원에 40명이 넘는 높은 출석률을 보이면서 우수강좌로 자리 잡았다. 교육담당 이무영 과장은 “온라인으로 신청 받은 뒤 수강생을 모아 현장 교육을 실시하는데 인기도 높고 평가가 좋다. 이제는 필수강좌”라고 말했다. 삼성SDS 멀티캠퍼스도 지난해 3월부터 사내 임직원만을 대상으로 ‘핵심만 뽑아낸 보고서 작성법’이라는 비즈니스 글쓰기 강좌를 열었다. “사내 대상이고 선택과정이었는데도 수강신청이 몰렸다. 소문을 들은 외부 고객사의 문의까지 줄을 잇는다”고 강좌 담당자는 말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내 몸값 올리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비즈니스 라이팅 교육과정을 정식 개설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SERI) 포럼에는 ‘비즈니스 글쓰기’, ‘직장인 글쓰기 연구회’, ‘돈이 되는 책 쓰기’, ‘라이팅 아카데미’, ‘감성 라이팅’ 등 글쓰기 관련 모임이 여럿 운영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부터 신입사원, 중간관리자, 임원, CEO 등 각계 각층이 두루 참가한다. 사실 직장인들이 새삼 글쓰기에 몰두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기술직이든 영업직이든 양쪽을 아우르는 분야이건 업무의 대부분은 글쓰기가 차지하며, 몸으로 때우던 과거와 달리 글쓰기가 점점 더 중요 업무로 자리 잡아 가기 때문이다. KT·한진·한국전력공사·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은 이미 입사와 승진시험에서 논술을 치른다. 한국전력공사 인사팀 신기정 과장은 “종합적 사고능력 평가에 논술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고 말했다. 신한기계는 포항에서 선박 부품이나 플랜트를 수출한다. 이 회사에서 기술 영업을 담당하는 이병룡 차장은 “하루 일과 중 3분의 1 가량이 글을 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차장은 영업보고서나 기술도입 제안서를 써야 할 일이 전보다 자꾸 늘어간다고 했다. 최근엔 앞으로 직장에서의 성패는 글쓰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온라인으로 개설된 글쓰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현대카드 마케팅팀 추상협 과장은 아예 “전체 업무의 80∼90%가 글쓰기”라고 말했다. 추 과장은 마케팅 업무 특성상 “기획서 하나로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면서 “업무의 상당 부분은 부하 직원들이 써 놓은 글을 고치는 일이다. 수정할 부분이 많은 기획서냐 적은 기획서냐에 따라 사람 자체가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따라서 “상사들은 글쓰기 잘하는 사람을 자기 부서로 데려가려고 막후에서 손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라고 한다. 글을 잘 쓰면 상사의 눈에 띄어 그만큼 승진 기회가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는 “팀장이 되면 프레젠테이션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지만 실무자급에서는 무엇보다 기획서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실무자에서 중간관리자로 승진하려면 기본적으로 글쓰기가 제대로 돼야 한다는 말이다. 두산중공업 윤종준 부사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글쓰기를 못하면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에도 장애가 된다”고 말했다. 사실 글 잘 쓰는 CEO는 기업가치를 높이는 일등공신이다. 바디샵의 아니타 로딕,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GE의 잭 웰치 등은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또한 말 잘하고 글 잘 쓰기로 유명한데 지난해에 프린스턴대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 동영상은 전세계 기업인들이 컴퓨터에 내려받았다. 인력자원 관리 전문가인 하영목 박사는 “외국에서는 임원이나 CEO를 뽑을 때 반드시 후보자의 필력을 본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고, 또 글을 잘 쓰면 책 한 권이나 연설 한 번으로 수백억원어치의 광고홍보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기업의 상당수가 감성경영을 하며 그 방법론의 하나로 CEO가 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지식경영센터장 강신장 상무는 SERI 포럼 중에 와인과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을 이끈다. 얼마 전 신라호텔 영빈관에 모여 호주 와인을 시음했다. 호주 대사관이 후원한 터라 외국인들도 섞여 있던 자리였다. 강 상무는 인사말에 앞서 영화 “프렌치 키스”와 “사이드 웨이” 에 나오는 한 장면씩을 보여주었다. 와인은 역사고 문화이며, 인생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대목이었다. 그런 다음 강 상무는 “이제부터 호주의 역사와 문화, 호주인의 삶을 느껴 보자”는 짧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멀티미디어가 동원된 그의 강의는 말은 적었어도 효과는 대단했다. 어느 때보다 참석자들의 박수가 크게 들렸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앞으론 글쓰기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유비쿼터스의 세계는 동영상까지 활용하는 의사소통을 요구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회사원들은 머지않아 소설가나 기자가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변신해야 할 날도 맞이하지 않을까? ikk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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