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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에이즈를 너무 모른다

한국인은 에이즈를 너무 모른다

지난해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에 감염된 여성과 평범한 농촌 총각 간의 순애보를 다룬 영화 ‘너는 내 운명’(전도연·황정민 주연)이 상영됐다. 에이즈를 다룬 한국 최초의 상업 영화였다. 관객도 300만 명이 넘어 비교적 알찬 흥행 성적을 거뒀다. 미국을 비롯해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에이즈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에이즈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거나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내 운명’은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 에이즈로 고통받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뜨게 해주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너는 내 운명’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에이즈 감염인 모임인 ‘한국감염인연대(KANOS)’의 강석주 사무국장은 평가했다. 그러나 강 사무국장은 “영화가 감염인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여주인공 몸에 난 붉은 반점이나 교도소에서 일반 재소자와 감염자를 분리해 목욕시키는 장면은 편견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현실에서는 붉은 반점도 없고, 감염인과 목욕하더라도 전염되는 일 따위도 없다고 한다. 국내 에이즈 문제는 아직도 상당 부분 금기시되거나 무시된다. 외국처럼 유명 인사가 자발적으로 감염 사실을 공개했거나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장면이 만들어진 적도 없다. 비정규직·동성애 등 국내 여러 소수자 문제가 공론화될 때도 에이즈만큼은 예외였다. 국내에서 에이즈 감염이 처음 확인된 1985년 이래 에이즈 문제는 소수의 고통받는 사람들만의 몫이었다. 지난해 질병관리본부의 용역 의뢰를 받아 국민의 에이즈 관련 지식과 태도를 실태 조사한 서울대 보건대학원은 “국민은 에이즈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자신과 무관한 문제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게다가 감염자에게 심한 편견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에이즈 감염자는 감염 경위와 무관하게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에이즈는 더러워서 생기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나쁜 짓을 해 걸리는 병으로만 알기 때문이라고 강 사무국장은 강조했다. 때문에 문제 의식 공유도 어렵거니와 정확한 지식도 전달되지 않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지난해 말 작성한 보고서는 성인 남녀 20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에이즈 감염자와 키스를 해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응답자의 48.4%에 지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은 감염자와의 입맞춤만으로 에이즈가 감염된다고 여긴다. 영국·독일·스페인의 경우 입맞춤만으로 감염되지 않는다고 답하는 비율이 80% 이상이다. 모기에 물린다고 에이즈에 감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는 41%만이 이 사실을 안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모기가 에이즈를 옮기거나(37%) 잘 모른다(22%)고 답했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에서 응답자의 70% 정도가 그런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심지어 에이즈 감염자와 변기를 같이 사용하면 에이즈에 감염된다고 오해하는 응답자도 21.2%에 이르렀다. 에이즈 관련 지식이 이 정도면 감염인의 재활이나 정상적 사회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에이즈 감염인에게서 느끼는 피해 의식도 상당하다. 내가 조심하더라도 감염인과의 접촉만으로 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근거 없는 불안과 근심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설령 제대로 된 에이즈 정보를 가졌다 해도 그런 경우가 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회장인 최강원 서울대 의대 교수는 “머릿속으론 안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는 일반인도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이런 근거 없는 두려움을 극복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탓이라고 최 교수는 진단했다. 보통 사람들이 에이즈라는 병에 무지한 이유는 미디어를 통한 대중교육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선호도가 떨어지는 주제를 다루지 않는 미디어의 속성 때문이다. 지난해 에이즈에 걸린 일가족의 애환을 담은 단편영화 ‘아주 특별한 외출’을 제작한 김신혜 감독의 사례를 보자.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그는 92년 에이즈를 소재로 한 방송물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방송사 측은 내용이 어려운데다 대중의 호응을 예상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퇴짜를 놨다. 그때는 에이즈가 동성애자나 윤락업 종사자들에게서 주로 발생하며, 동정이나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 질병이라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1년 후 한 여대생이 사귀던 유학생 남자 친구에게서 에이즈를 옮았다. 그 여대생은 분노와 보복 심리로 수많은 남자와 동침했다는 사건이 공개됐다. 그러자 에이즈 감염인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무차별적 보복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퍼졌다. 방송사가 시사프로그램으로 에이즈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배경이다. 김 감독은 그러나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출 뿐 정확한 통계나 깊이 연구된 자료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오히려 에이즈 인식을 그릇되게 유도했다는 미디어의 역기능이 지적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간한‘HIV 감염인 및 AIDS 환자 인권실태 조사’보고서는 국내 3대 일간지의 에이즈 관련 보도 1600건 중 5.3%인 85건만이 감염인의 인권을 주제로 다뤘다고 주장했다. 인권 옹호 의도를 갖고 작성된 기사 중에서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에이즈에 부정적 인상을 갖게 되는 사례도 많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김훈수 사업국장은 “에이즈에 관한 기사는 감염자의 파행적인 행각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많아 보도 자체가 감염인들을 옥죄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에이즈 문제가 한국 사회의 통합과 다양성 관점에서 사고되기까지는 앞으로 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김 국장은 말했다. 올 3월 말까지 발견된 내국인 에이즈 누적 감염인 수는 4021명이다(748명은 사망했고, 3273명은 생존해 있다). 한국은 에이즈 감염률이 낮은 편이지만 최근 빠르게 높아지는 추세다. 올 들어 처음으로 일일 신규 감염자 수가 2명을 넘어섰다. 올 3월까지 하루 평균 2.1명꼴인 192명이 새로 감염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일 감염자 수는 1.86명에 불과했고, 2001년엔 한 명이 채 안됐다(왼쪽 도표 참조). 질병관리본부는 “에이즈 감염인 수 증가는 콘돔 사용률이 낮은 데 원인이 있다”고 밝혔다. 성행위시 콘돔을 항상 사용하는 비율이 2003년 11.9%에서 지난해 9.1%로 뚝 떨어진 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들어서는 남성 감염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95년엔 여성이 19명, 남성이 88명 감염됐다. 남자가 여자의 4.6배였다. 그러나 2000년엔 7.8배, 2002년엔 10.4배, 2003년엔 15.7배, 2005년엔 16배로 그 격차가 커져만 갔다. 감염 경로가 밝혀진 3403명 중 성 접촉에 의한 감염이 98.4%(3350명)에 이르고 보면 대부분의 감염자가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성행위를 했다고 추정된다. 올 들어 새로이 감염된 192명 중 감염 경로가 확인된 58명도 모두 성 접촉에 의해 감염됐다. 이성 간 성 접촉은 35명, 동성 간 성 접촉은 23명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보고서는 “유흥업소 종사자와 관계할 때 2.5명 중 1명만이 콘돔을 사용해 에이즈 발생 증가가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일반적으로 에이즈 감염자 수는 관계 당국이 파악하는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무지 때문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감염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세계보건기구 등은 이런 유형의 미확인 감염인이 줄잡아 공식 통계의 2배에서 3배라고 본다. 한국의 경우에 대입하면 감염자가 1만에서 1만6000명 정도라는 얘기다. 감염인들의 삶은 비극적이다. 감염이 확인되는 순간 직장이나 친구와의 단절은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기도 한다. 서울에 사는 어느 30대 남성은 2001년 에이즈 감염을 확인했다. 가족들은 그 즉시 인연을 끊겠다고 통보했다. 직장을 그만둔 이 남성은 가족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끊겨 궁핍한 생활을 하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운영하는 쉼터에 몸을 의탁했다. 얼마 전 세상을 등졌지만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쉼터에서 장례 절차를 밟으라고 유가족에게 통보했지만 유가족은 ‘인체 포기 각서’를 보내 시신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자신의 처지를 의욕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이들도 많다. 인권운동가인 윤호제(39)씨는 에이즈 감염인 인권 신장과 처우 개선을 목표로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방송·신문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토론장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동성애자인권연대·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에이즈 인권모임인 ‘나누리+’의 대표직도 맡았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감염 사실을 알려 경제적 도움도 받고, 정신적으로도 의지한다. 하지만 그도 집에서는 여느 평범한 자식과 다를 바 없다. 아들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모르는 노모가 받을 충격을 우려해 아직은 가명을 쓰고, TV 카메라 앞에서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 윤씨가 2000년 감염 사실을 알았을 때 머릿속은 온통 ‘죽는구나’라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치료제가 많이 나와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건강한 삶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국가가 보조해주는 월 35만원 안팎의 생계비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0월부터 한 달간 감염인 255명을 대상으로 인권 실태를 조사했다. 감염 때문에 배우자 또는 동거인과 이혼하거나 이별한 적이 있느냐는 설문에 102명 중 52명(51%)가 그렇다고 답했다. 21명은 그럴 위기에 놓여 있다. 경제적 궁핍도 괴롭다. 응답자의 65%가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1인 가구 최저생계비 월 41만8309원에 못 미치는 저소득층이다. 조사 대상의 46.6%가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로 선정돼 있다. 면역 체계를 파괴하려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감염인들은 힘든 일에 장시간 종사하지 못한다. 감염인의 진료비와 의약품 구입 비용은 현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전액 부담한다. 소득이 최저생계비를 밑도는 감염인에겐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로 선정해 생계급여·주거급여 등도 지급된다. 이 정도면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문 지원 수준이라고 정부는 평가한다. 그러나 감염인들은 본인이 직접 병원 치료비 또는 약값을 지급한 후에 영수증을 보건소에 청구해 환불을 받는다. 개인이 지급해야 하는 약값은 한 달에 수십만원에서 100만원대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면 약을 사는 데도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감염인에게 약을 제공하는 병원이 국가(보건소)에 직접 약값을 청구하는 쪽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에이즈 정책도 비감염인을 감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정책 기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감염인의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 달라는 주문이다. 얼마 전 ‘2006년 세상을 변화시킨 영향력 있는 100인’에 한국인으로 가수 비, 프로골퍼 미셸 위와 함께 김용(미국명 짐 용 김·46)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선정됐다. 에이즈와 내성 결핵 퇴치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공로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한국 정부가 에이즈퇴치 글로벌 펀드에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은 태국보다도 적은 돈을 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감염인연대 강석주 사무국장은 그 스스로가 감염인이다. 그는 “에이즈 감염인은 동정의 대상도,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를 불쌍하게 보지 말라. 단지 다른 사람보다 더 아플 뿐이다. 감염인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평범하게 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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