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아내?
‘다빈치 코드’로 촉발된 논란을 계기로 수수께끼를 풀어본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와 함께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받으며 숨이 끊어져 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곁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예수의 수난’은 격앙되고 끔찍했으며 십자가 처형은 느리게 진행됐지만 그래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순간이 다가왔다. “다 이루었다”하고 예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신은 세마포로 감싸져 동산으로 옮겨진 뒤 묘지에 묻혔다. 안식일 다음날 동트기 전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일어나 묘지로 향했다. 묘지는 비어 있었다. 주님이 사라졌다. 그녀는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다른 제湄涌“?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그들을 데려와 두 눈으로 직접 보도록 했다. 제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들락날락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몸이 얼어붙은 듯 동산을 떠나지 않았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로 예수가 말했다. “마리아야!” 그녀는 “랍오니(선생님)”라고 외치며 기쁨에 벌떡 일어나 끌어안으려 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느님 곧 너희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그녀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전한 말은 짧고 간단했지만 세상을 바꿨다. “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주를 보았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전해지는 부활의 기록이다. 그와 함께 기독교가 시작되며 그와 함께 신약성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기록이 끝난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스테판은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며 성도 요한은 계시록을 구상한다. 그러나 생전 예수의 중요한 측근이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 후로는 흔적도 없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또 다른 이야기 속에서 살아 남았다. 그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2세기의 문헌 속에서 발견된다. ‘마리아 복음서’라는 제목의 이 문헌에서 마리아는 예수 부활 이후 신도들을 이끄는 지도자로 묘사된다. 예수 사후 약 90년 뒤 기독교도들이 작성한 마리아 복음은 ‘영지주의 복음서’다. 기독교 초창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영지주의파는 단순한 믿음보다는 연구와 자기인식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그 문헌은 수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1896년 카이로의 한 수집가에 의해 발견됐다. 문헌은 뜯겨지고 훼손돼 있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한 뒤 사라졌다. 그 권고로 제자들은 불안해 했다. 그리스도가 그 복음을 전하다 죽었는데 자신들은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마리아는 차분했다. “울지 말고 낙담하지도 마라. 마음이 약해지지도 마라”고 그녀는 예수의 남자 제자들에게 일렀다. “예수의 은총이 너희와 함께하며 보호해 주리니.” 예수가 환영으로 나타나 신비로운 하늘나라의 영혼 여행이 어떤지 알려줬다고 그녀는 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겠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보이지 않는 내용을 내가 보이도록 해주겠다.” 그녀의 말이 다른 사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 노여움을 잘 타는 베드로가 특히 발끈했? “예수가 정말 우리 모르게 여자에게 말했을까”라고 그는 따졌다. “우리 모두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까?” 베드로는 무엇보다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보다 그녀를 더 아꼈단 말인가?” 2000년이 흐른 지금 바로 그 질문이 기독교계를 뒤흔든다. 여권운동가와 진보 신학자들의 시각은 이렇다. 마리아 복음서는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전도하는 사도’였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는 예수 주변의 남성들과 동등한(또는 더 나아가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 그녀가 너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초기 교회의 남성 우월적 체계를 구축하려고 그녀를 비롯한 다른 여성의 역할을 억눌렀다. 그러나 정통파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마리아가 예수의 일생과 전도 생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예수의 남자 제자들에게 종속돼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덕택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약 6000만 명이 그 책을 읽었으며 영화화돼 세계 전역에서 개봉됐다). 그 책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로 자식까지 낳아 예수 사후에 기른다(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탈출했다고 소개된다). ‘다빈치 코드’에 따르면 그 아이가 자라 프랑스의 왕족과 결혼했고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예수와 마리아의 후손들이 발견된다(개봉 초기 주류 언론의 평가는 시큰둥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했다). 특히 감동적이지만 완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장면에서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주장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앉은 인물은 남자 제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다. ‘마리아’가 예수의 왼편에 위치하도록 다시 그린다면 남성과 여성, 완전한 인간으로 서로가 완성된다. 결혼으로 영원히 합쳐진 부부라는 얘기다. 흥미롭지만 브라운의 소설 거의 모든 부분과 이 영화처럼 지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흥미진진한 픽션의 소재가 되기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처음부터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는 문학과 전설, 정치와 신학, 논란과 갈등의 소재였다. 대대로 신자·역사가·예술가의 상상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시대의 감정을 반영하며 계속 변했다. 변화가 너무 심해 수세기 동안의 신화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역사적 기록을 복원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마리아의 역사는 몇 가지 본질적인 의문에 빛을 밝힌다. 1세기 유대교에서 여성의 역할, 예수 전도 활동의 성격, 초기 기독교의 형성 등을 둘러싼 의문이다. 마리아와 예수,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면 기독교의 가변적인 성격, 그리고 성별과 권력을 둘러싼 긴장의 실체를 파악하기 쉽다. 그날 아침 묘지의 시신이 사라진 이후 세 번째 1000년을 맞은 지금도 종교는 성과 권력의 영향을 받는다. 마리아는 항상 거북한 존재였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다(신약성서에서 열세 번이나 언급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거의 묘사하지 않았다. 아마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로마 세계에서 여성은 신뢰하지 못할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 세계에서 신자 확보를 목표로 한 복음서들은 아마 예수 부활의 주요 증인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부활 자체만으로도 이미 설명하기 아주 까다로운 내용이었다. 신약 복음서들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의 추종자였으며 예수가 배반 당하고 부활하던 때를 전후해 활약했다고 설명한다”고 프린스턴대의 초기 기독교사 교수인 엘레인 페이절스는 말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그녀가 정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신약성서가 제공하는 아주 적은 단서를 파헤쳤다.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 주변의 여성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 섬겼다’고 누가는 기록했다. 그것을 예수의 전도 활동에 자금을 댄 증거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혼약? 이혼 위자료? 유산? 급료? 예수의 삶에서 여성들이 필수적 역할을 했다는 암시를 제외하면 복음서는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는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마리아라는 이름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여성은 대부분 남성과의 관계에 따라 호칭이 정해진다(예컨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다르다). 그러나 막달라라는 이름은 고향인 항구도시에서 따왔다. 남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유롭게 예수와 함께 다니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을까. “결혼하지 않는 자유민은 극히 드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브라운대의 종교학 교수 로스 크레이머는 말했다. 마리아는 예수가 갈릴리 전역을 돌며 전도할 때 그 무리에 합류했고, 일곱 악령에 사로잡혔었지만 회복했으며, 예수의 부활을 알렸다. 이상이 신약성서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내용의 전부다. 그녀의 직업, 머리 색깔, 그리고 늙었는지 젊었는지, 못 생겼는지 예쁜지 일언반구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부터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더 충실하게 묘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여러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신약성서의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좋아하는, 어쩌면 가장 아끼는 제자로 그려진다(지난 50년 동안 영지주의 복음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기독교 기원의 연구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도마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또 다른 여성 살로메와 함께 예수의 진정한 여섯 사도(열두 명이 아님)로 꼽힌다. 영지주의파의 ‘구세주 문서’에는 마리아가 ‘모든 사물을 이해한 여성’으로 언급된다. 가장 강력한 내용은 마리아 복음서다. 마리아를 강인하고 강직한 여성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성별에 관해 파격적인 관점을 펼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구세주가… 모든 다른 여성보다 사랑한’ 제자로 불렸지만 그녀와 예수는 성별이 내세로 가는 길에 사라져 버릴 요소로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은 언젠가는 소멸되는 신체의 문제라고 그 문헌은 주장한다”고 하버드대 역사가 케어런 킹은 말했다. “지도력은 (성별이 아니라) 영적 발달에 바탕을 둔다는 의미다.” 신약성서는 마리아를 예수의 변함없는 동반자라고 묘사하며, 영지주의파들은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 중요시됐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런 여자가 왜 예수의 부활 뒤 사라졌을까. 예수에게 마리아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어째서 사도행전 또는 사도서간에 언급되지 않았을까. 외경 복음서들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설명이다.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끊임없는 견제에 시달린다. 특히 베드로에게서 가장 자주 공격을 받는다. 도마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예수에게 “마리아로 우리를 떠나게 하소서. 이는 여자들이 생명을 받기에 합당치 않음이라”고 탄원한다. 마리아는 베드로의 위협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베드로가 두렵습니다”고 영지주의 복음서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마리아는 예수에게 말한다. “그가 나를 협박하고 우리 종족을 혐오합니다.” 두려움에 찬 마리아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미래를 결정 지은 교회의 분열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한쪽 이야기에서는 베드로가 중대한 역할을 하고 마리아가 변두리 역할에 머문다”고 페이절스는 말했다. “그러나 다른 쪽의 이야기에서는 마리아가 중요한 인물이고 베드로는 요주의 인물이다.” 결국 후세에 전승된 것은 베드로가 주도한 이야기다. 마리아가 아니라 베드로가 주류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갈등은 영지주의 복음서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다.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도 수세기 동안 신학자들을 괴롭혔다. 요한의 설명에서는 마리아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인물이 예수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손을 내민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는다. “나를 붙들지 마라.” 그러나 그날 나중에 예수는 남자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제자들은 예수를 곧바로 알아본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심지어 그들을 향해 숨도 내쉰다. 8일 뒤 예수는 도마에게 나타난다.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다. 예수는 도마에게 자기 몸을 만져보라고 청한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첫눈에는 알아볼 수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다고 묘사했다. 영지주의 복음서의 예수 부활 묘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다른 신약성서에서는 남자 제자들이 예수를 실제 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 다시 말해 살아 있고 걷고 숨쉬는 육신으로 묘사한다. 누가 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만져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못 믿을 경우에 대비해 자신의 육신적 부활이 영(靈)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같이 나는 있느니라.” 육신의 부활이냐, 영적인 부활이냐를 둘러싼 논쟁은 기독교 초기 첫 3세기 동안 계속됐다. 영지파는 부활을 영적인 구원이라고 믿었다. 반면 정통파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영지주의의 믿음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손상한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영지파를 이단이며 향락주의자라 불렀고 신성을 더럽히는 사람들로 비치게 하려고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특히 4세기의 주교 에피파니우스는 예수가 자기 정액을 먹으며 마리아에게 그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고 영지파들이 믿는다고 주장했다. 312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자 정통파가 국가권력과 군대를 장악했다. 수도사들은 새로운 정통 교리를 강요하는 주교들이 문서들을 파괴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영지주의 이야기의 증거를 지워버리려 애썼다. 그때 영지파 복음서들이 모래 속에 파묻히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유력한 인물로 묘사한 이야기도 사라졌다. 초기 교회에서 여성들이 행한 역할도 문서에서 삭제됐다. 예수는 여성들과 각별한 공감을 가진 게 분명했다. 누가는 예수의 갈릴리 선교에 마리아 외에도 수산나,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등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이 여럿 참여했다고 말한다. 또 누가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집안일을 제쳐둔 마리아(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다른 여성이다)의 이야기를 신앙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는 예수의 내세 구원 메시지는 현세에서 억압 당하는 여성들에게 분명히 큰 호소력이 있었다. “예수는 사회개혁가가 아니라 현세의 종말에 초점을 맞췄다”고 ‘베드로, 바오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Peter, Paul and Mary Magdalene)’의 저자이자 노스캐롤라이나대 종교학 교수인 바트 어먼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평등주의자가 환영할 만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 뒤 얼마 되지 않아 남성 교회 지도자들이 여성을 경시하는 조치를 취했다. 바오로는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에베소서 5장 24절)라고 썼다. 그러나 바오로의 편지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여성 선교사들을 언급한 대목도 있다. 그중에 유니아도 있었다. 바오로는 유니아를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마서 16장 7절)라고 인정했다. 1∼2세기의 기독교인들이 믿은 삼위일체에는 여성 성인이 우세한 성령이 포함됐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이 변해 가면서 여성의 역할이 좀 더 사악한 쪽으로 그려졌다. 여성은 세속적인 죄악의 소유자로 간주됐다. 예수의 죽음 직후 제자들은 부활을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증거로 설명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하느님의 왕국이 오지 않자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의 새 이론이 필요했다. 2세기가 되자 교부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에덴 동산 이래 진행돼 온 중요한 과정을 완성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성직자들은 예수가 세상 사람들이 짊어진 아담의 죄를 덜어주기 위해 돌아가셨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생식의 ‘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이 세상에 축복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는 존재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여성을 성직에서 배제했고, 죄악을 퍼뜨리는 존재라고 비난했다. 3세기의 교회 저술가 터툴리아누스는 여성들을 지칭하며 ‘[너희들]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도 죽어야 했다’고 썼다. 곧 막달라 마리아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591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 가톨릭의 중심지 로마 성 클레멘트 성당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놀라운 선언을 했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주장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 많은 죄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세속적인 눈으로 탐욕을 부렸고 자기 얼굴이 돋보이도록 머리를 손질했다’. 가장 심한 주장은 ‘마리아가 금지된 행위를 할 때 몸에서 향기가 나도록 연고를 발랐다’는 내용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엄숙한 표정을 한 수사들을 쳐다보며 마리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바로 그것이 1400년 동안 그녀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형제들이여,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선언했다. 그러나 전혀 확실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은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죄인이었던 여인’이 바로 마리아라는 주장에 근거했다. 지금의 많은 학자가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설사 마리아가 죄 지은 여성이었다 해도 어떤 복음서에도 그녀의 죄가 육욕(肉慾)이라는 증거는 없다. 1세기에는 여자가 남편 아닌 남자와 말하거나 혼자 시장에 가면 ‘죄’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무런 근거 없이 창녀를 만들어 냈다. 특히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를 개심한 창녀로 만들었다. 신도들이 호소력 있고 영감을 주는 회개 이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전쟁과 질병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가난한 여성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회는 예수의 측근 중에서 이런 불행의 해법을 제공하는 인물을 찾았다. 그리스도가 죄악에 가득 찬 세계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부활 이야기에 나오는 신비로운 막달라 마리아가 안성맞춤이었다. 다른 인물로 꾸며내도 아무 탈이 없을 정도로 지엽적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교부들은 성가신 여성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찾았다. 기독교계는 이 새로운 ‘거룩한 죄인’ 막달라 마리아를 열렬히 환영했다. 막달라 마리아 숭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영국에서는 마리아가 나병 환자들의 수호신이 됐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마리아 축제일에 창녀들과 청년들이 함께 달리기를 했다. 독일에서는 ‘축복받은 막달라 마리아의 참회하는 수녀들’이 매춘부들의 개심에 앞장섰다. 스페인에서는 죽마 탄 청년들이 거리에서 마리아의 성상을 들고 춤을 췄다. 특히 프랑스인들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반했다. 마리아를 프랑스인으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13세기 도미니크회의 한 수도사가 ‘황금 전설’을 펴냈다. 예수의 죽음 뒤 마리아가 예루살렘을 탈출해 갈리아 지방 북부(프랑스)에 정착했다는 내용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마리아의 영이 프랑스인들을 지켜주었다. 물론 역사적 증거가 없고, 단지 프로방스 지방의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전설은 계속 전해졌다.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은 막달라 마리아가 프로방스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중세 프랑스의 설화를 근거로 한다. 문예부흥기에는 예술가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다재다능함에 매료됐다. 동정녀 마리아는 난해한 소재였다. 어떻게 성모를 겸허하고 우아하며 정숙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이고 논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만들 수 있을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옛 거장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이용해 여성성의 모든 측면을 탐구했다. 티지아노는 마리아를 풍만한 여성으로 그렸고, 도나텔로는 초췌한 고행자로 묘사했다. ‘다빈치 코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편에 있는 “섬세한 포갠 손과 가슴이 볼록해 보이는’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학자들은 그 인물이 요한이라고 결론 내렸다. 댄 브라운은 이해하지 못 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두 남자 간의 애정 어린 친밀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근대에 들어 다른 성인들이 빛을 잃었지만 막달라 마리아의 매력은 여전했다. 산업혁명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뒤집히고, 매춘과 질병이 기승을 떨치자 설교자들은 또다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거론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바그너에서 릴케, 로댕까지 19세기 예술가들은 막달라 마리아(실제가 아니라 그레고리우스가 상상한 그녀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마리아의 관능성을 탐구하면서, 심지어 그녀를 예수와 성관계를 맺은 인물로 상상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막달라 마리아에게 또 다른 정체성이 생겼다. 바로 여권 운동의 상징이었다. 여성 해방운동의 결과 등장한 신세대 역사가들은 마리아를 신실한 증인으로 묘사한 신약성서와 함께,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진면목에 대해 그레고리우스보다 더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바티칸 내부까지 메아리쳤다. 1969년 바티칸은 그레고리우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지은 여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공표했다. 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식 교회문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에게 전도하는 사도”라고 불렀다. 또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충실성의 가장 혹독한 시험대인 십자가 처형에서 여성들이 예수의 제자들보다 더 강인했음이 입증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여전히 성(性)에 의해 규정됐다. 71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하 ‘수퍼스타’)에 나오는 마리아는 강하고 사려 깊은 인물이지만 직업은 여전히 창녀였다. 자유 연애와 성적 자유 시대의 막달라 마리아는 몸에 자신이 있었던 만큼 남성을 휘어잡는 도구로 몸을 이용했다. ‘수퍼스타’에서 마리아는 “그래봤자 남자에 불과해”라며 “내겐 남자가 아주 많았어. 관계야 다양했지. 그 역시 그런 남자 중 하나일 뿐인데”라고 노래한다. 현대인도 마리아를 구미에 맞게 각색하는 능력에서는 조상만큼이나 능수능란했다. 2003년 ‘다빈치 코드’가 출간된 시점에는 페미니즘의 열기가 ‘수퍼스타’ 초연 때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다빈치 코드’에서 마리아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됐다. 낮에는 신앙의 신비를 수호하고 밤에는 예수의 자식을 키우는, 일하는 어머니의 이상적 모습이 강조됐다. 사실 ‘다빈치 코드’는 그 모든 파격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정신세계보다 몸을 더 중시했다는 점에서 볼 때 전혀 신선하지 않다. 영화에서 지친 막달라 마리아는 부푼 배를 안고 몸을 가린 채 남자 수행원들을 따라 예루살렘을 빠져 나간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빈치 코드’는 마리아의 비밀이 바로 육체적 관능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비밀 속에는 지적 능력에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훨씬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초기 기독교 문헌 어디에서도 마리아의 관능을 말한 바 없지만 최근의 막달라 마리아 열풍은 여전히 성적 관능에 초점을 맞춘다. “왜 그렇게 마리아를 다시 관능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냐”고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The Gospel of Mary of Magdala)’의 저자인 케어런 킹은 물었다. “우리는 창녀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이제는 마리아를 아내이자 어머니로 보려는 움직임이 있다. 제자나 사도로 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특히 ‘다빈치 코드’는 예수의 아내였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마리아에 관한 핵심을 놓친다. 소설과 영화는 2세기 영지주의 빌립복음서의 공백 가득한 구절을 증거로 이용한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공백]의 동반자. [공백]보다 그녀를 [공백] 제자들 [공백] 입맞춤을 [공백] 그녀의 [공백]에.” 공백은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대체 누구의 동반자인가?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건가? 그녀의 어느 부위에 입을 맞췄다는 건가? 설사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채워넣더라도(다시 말해 예수가 남자 사도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했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더라도) 위 문장은 생각만큼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영지주의에서 입맞춤은 호색적 행동이 아니라 지적·영적 진실의 전달을 상징하는 순결한 행동이다. 빌립복음서 곳곳에도 예수가 남성 제자들의 입에 입맞춤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다빈치 코드’의 제작자가 이런 행동까지 관능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면 보수파 기독교도는 훨씬 격렬한 반대운동을 펼쳤으리라. 어쨌든 그 구절은 중요하다. 예수가 마리아에게 교회 내의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는 입맞춤의 의미를 곡해함으로써 이런 핵심을 놓치고 만다. 저자 댄 브라운의 실수는 이해할 만도 하다. 그레고리우스 시대, 어쩌면 예수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섹스는 팔리는 상품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릇된 관능의 피조물이라는 개념 속에 아직도 묶여 있다. 어쩌면 역사가 그녀를 해방시켜줄는지 모르겠다. 미지의 사막 혹은 도서관 서가의 구석 어딘가에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복음서들이 잠자고 있다. 이런 복음서 중 일부가 모습을 드러내 마리아와 예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또 한 번 뒤집기란 오로지 시간 문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때까지 마리아는 여전히 수수께끼의 존재다. 지금 우리가 아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전파한 사랑과 희망의 설교에 언제나 충실했고 예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돼 있었으며, 항상 신의 은총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시간과 성별을 초월하는 신앙의 모범이며,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혼미한 현대사회의 밝은 등불 같은 존재다. 차진우·이원기·이정명 jinch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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