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러리스트의 죽음과 이라크의 미래
미군 폭격으로 알카에다 2인자 자르카위가 결국 살해됐지만 폭력사태를 막기엔 역부족 미국은 이번엔 기필코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를 죽이려 했다. 훌륭한 무기와 첨단 장비로 무장된 미군의 추적을 따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군 지휘관들은 이 끔찍한 테러리스트가 바그다드 북쪽 10km 지점의 한 안가에 은신 중임을 확신했다. 자르카위는 자신의 정신적 조언자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 상공을 비행하던 F-16C 전폭기 한 대가 지상의 조그만 건물에 225kg짜리 폭탄 한 개를 투하했다. 그러곤 확인 사살용으로 똑같은 무게의 폭탄 한 개를 더 투하했다. 각각 레이저와 인공위성의 유도를 받은 폭탄이 터지면서 움푹 파인 야자숲 주위에는 건물 잔해와 휘어진 쇳조각만 수북이 쌓였다. 집 안에 있던 남성 두 명, 여성 두 명, 그리고 조그만 소녀 한 명도 사망했다. 그러나 자르카위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이라크군과 미군에 발견될 당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도의 말을 지껄였다. 들것에 실려가면서도 자신을 잡은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자신을 기다릴 천국에서의 생활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미군은 그가 자르카위임을 증명하는 녹색 문신과 옛 전투에서 생긴 상처를 찾는 등 시신을 치밀하게 살폈다. 자르카위를 추적하던 은밀한 특수부대 지휘관 스탠리 매크리스털 중장은 현장으로 달려가 검은색 옷을 입은 자르카위의 피 묻은 시신을 내려다봤다. 그토록 찾던 표적임이 분명했다. 주위에 남은 물건은 별로 없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현장에 남은 물건이라곤 무기 몇 정과 표범 가죽 무늬가 새겨진 작은 잠옷(자르카위의 부인 3명 중 한 명이 입던 옷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탈출구가 없다’라는 제목의 이라크 커버 스토리를 실은 뉴스위크 아랍어판 5월 2일자가 전부였다. 부근에는 어느 잡지에 실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사진도 널브러져 있었다. 자르카위의 사망은 좌절감을 안기는 테러와의 긴 전쟁에 일대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은 자르카위가 사망한 날 기습공격을 17차례 실시했다. 이튿날에도 30차례의 공격을 가해 모두 최소 25명의 알카에다 용의자를 검거했다. 한 미군 대변인은 자르카위의 은밀한 테러 인맥을 알려주는 정보의 ‘보고(寶庫)’를 찾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미군 내 강경파는 쾌재를 불렀다. 뉴욕 포스트는 타박상으로 부어오른 자르카위의 얼굴을 확대한 사진을 보여주며 ‘드디어 잡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타블로이드지로선 자르카위가 ‘이제 처녀들을 대기시켜’라고 명령하는 대목을 만화로 처리하는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었으리라. 이슬람에선 순교하면 처녀들이 천국에서 순교자를 맞는다). 그러나 앞으로 이라크 저항세력이 기적적으로 사라지거나 눈에 띄게 줄어든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보다는 자르카위의 ‘순교’가 새로운 살육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에 종파적 폭력을 이끌어내 내전을 선동하는 일이 그의 목표였다. 시체 공시소가 연일 시신들로 가득 차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 같은 유혈사태를 막거나 진정시키기엔 너무 늦었을지 모른다. 지난주 자르카위의 목숨을 노린 매복 공격은 군 효율성의 본보기이자 끈기 있는 정보 수집과 최첨단 정찰이 가져다준 승리였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자르카위가 위협세력으로 부상한 이래 미군은 델타 포스, 해군 특수부대 ‘실 팀 식스’, 육군 특수부대, 기타 고도로 훈련된 특수요원 등 정예 부대를 동원해 그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첩보위성과 최첨단 컴퓨터의 도움을 얻었다. 그들의 공격 목표물은 사악하긴 해도 왠지 허풍스럽고 익살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지난 5월 미 국방부가 공개한 비디오 화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거기엔 턱수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앳된 얼굴의 자르카위가 미국의 중견 스포츠화 제조업체인 뉴밸런스가 새로 내놓은 운동화를 신고 으스대듯 걷는 모습이 나온다. 검은색 전투복 아래로 비어져 나온 운동화를 보면서 말이다. 미제 자동소총을 발사하는 데 애를 먹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실제 세계에서 테러리스트를 추적하기란 TV에서 방영하는 범죄추적 프로와는 크게 다르다. 사로잡히길 바라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은신하는 일도 가능하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테러를 포함해 미국에서 온갖 범행을 저지르고도 5년 넘게 노스캐롤라이나주 산악지대에서 숨어지낸 에릭 루돌프가 좋은 예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행위가 먹혀든다는 점도 당국의 힘을 빠지게 한다. 비디오 카메라에 담겠다고 몸소 참수를 자행한 자르카위는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함으로써 그들을 침묵하게 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자르카위는 1950년 헝가리 출신 남작 부인 옥시가 쓴 유명한 스파이 모험소설 ‘별봄맞이꽃’(The Scarlet Pimpernel)에 등장하는 영웅적 주인공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속 주인공 스칼릿 핌퍼널은 프랑스인 구출 활동을 벌이지만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춘다). 사실 자르카위의 명성은 미국 정부가 키워준 측면도 있다. 미 정부 대변인들은 자르카위를 이라크 내 알카에다 요원을 대표하는 얼굴이자 이라크전이 더 큰 ‘테러와의 지구촌적 전쟁’(미국 정부는 줄여서 ‘GWOT’라고 부름)의 주요 전장임을 보여주는 산 증거로 내세웠다. 고교 중퇴생임에도 자르카위는 죽음을 숭상하는 자신의 성전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전파할 만큼 영리했다. 악한(惡漢) 자르카위의 탄생은 악하다고 하니 정말 악해지더라는 서글픈 측면도 있다. 그를 잡아 살해한 일은 독초는 일단 뿌리를 내리면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준다. 자르카위는 오랫동안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여성복 차림으로 돌아다닌다거나, 늘 대규모 수행원을 거느리고 움직인다고 알려졌다(둘 다 유언비어다). 그가 팔레스타인 출신이라거나, 요르단 출신이란 말도 있었다. 또 오사마 빈라덴과 사담 후세인의 중간 고리 역할을 한다거나,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다는 말도 나돌았다. 사실 어린 시절 자르카위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보다는 낙오자가 될 공산이 컸다. 요르단의 불결한 도시 자르카(자르카위란 가명도 여기서 따왔다)에서 자란 그는 갱단에 가입해 온갖 사소한 범행을 저질렀다. 요르단 당국에 따르면 한 소녀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적도 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던 그는 1980년대 말 소련 점령에 맞서 성전에 가담하려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소련군과 맞서 싸우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카불에 들어선 괴뢰정권에 맞서 열렬한 전사가 됐다고 알려졌다. 한때는 소련군에 맞서 싸우다 지금은 파키스탄 국경에서 탈레반 세력을 돕는 지휘관 헤마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자르카위는 길게는 24시간 동안 자취를 감춰 동료들이 전사했구나라고 생각할 때 다시 나타나 용감무쌍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자르카위는 산 꼭대기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산 아래의 공산 병력이나 상공을 비행하는 어떤 항공기에도 발포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헤마트는 회상했다. 그럼에도 “결코 그가 중요한 인물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헤마트는 전했다. 90년대 초 요르단으로 돌아간 자르카위는 요르단 정부를 음해하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투옥됐다. 교도소는 그에게 지도력을 가르쳐준 곳인 듯하다. 투옥 당시 그는 수줍고 글도 완전히 깨우치지 못했다. 코란 구절을 암기하던 그는 이교도를 혐오하는 강경파 무슬림으로 변했다. 교도소 내에서도 곁에 ‘경호원’들을 두는 등 ‘두목’으로 명성을 날렸다. 사나운 기질과 시아파를 맹렬히 혐오하는 자로 명성이 드높았다. 자르카위는 시아파를 이슬람의 진정한 길을 가는 척하는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90년대 말 일반사면으로 석방된 자르카위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다. 비록 훈련은 알카에다 캠프에서 받은 듯하지만 알카에다의 일원은 아니었다(그는 오사마 빈라덴에게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조그만 테러리스트 집단을 만들려고 독자적으로 훈련소를 세웠다. 요르단 국왕을 살해하고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일이 그가 이끄는 테러 집단의 목표였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2001년 자르카위와 잔존 추종세력들은 이란을 거쳐 이라크 북부로 갔다. 그러곤 사담 후세인의 힘이 못 미치는 산악 오지에서 안사르 알-이슬람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미 정보당국은 더러 자르카위와 그의 패거리가 그곳에서 조악한 화학무기를 생산한다고 판단했다. 2002년 미 국방부는 안사르 훈련소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백악관은 승인을 거부했다. 자르카위 색출 계획에 몸담았지만 군사 기밀임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미 정보관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자르카위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체포 임무를 하달하기가 불가능했다. 상부로부터 이라크 침공 계획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를 체포할 절호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다.” 부시 행정부는 자르카위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려 했다. 콜린 파월 전 국방장관은 2003년 2월 유엔에서 이라크 침공 근거를 설명하며 후세인은 자르카위가 이끄는 “치명적인 테러조직을 거느렸다”고 주장했다. 당시 파월 장관은 자르카위를 “오사마 빈라덴과 그가 이끄는 알카에다 중간 간부들에게 협력하는 자”로 표현했다. 미 정보당국은 당시 자르카위가 치료차 바그다드로 갔다고 주장했다. 네오콘들이 널리 신뢰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미군 폭격에서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이 필요했다. 자르카위가 2002년 어느 시점에 상처를 치료하려 바그다드로 간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자르카위는 지난주 폭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두 발로 걸어다녔다. 자르카위는 사담 후세인의 우군이 아닌 듯 보였다. 오히려 2003년 봄 후세인 정권이 축출되자 재빨리 그 권력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같은 해 여름 자르카위 조직원들은 요르단 대사관 담장 밖에서 자동차 폭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유엔 특별대표의 목숨을 앗아간 자살폭탄 테러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라크 재건을 시작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유엔을 이라크에서 몰아낸 테러 공격이었다. 자르카위는 이라크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미군 병사들까지 자살공격 목표물로 삼으면서 피에 굶주린 잔악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렇게 사망한 어린이만 35명을 헤아린다. 심지어 장인까지 자살폭탄 테러에 동원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자르카위를 괴물로 인식시킨 결정적 계기는 참수사건이었다.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채 비디오 테이프에 모습을 드러낸 한 남성은 커다란 칼로 민간인 신분의 미국인 닉 버그의 목을 베었다. 자르카위가 분명해 보였다. 납치된 버그는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테러용의자들처럼 오렌지색 낙하복을 입고 있었다. 이 테이프는 소름 끼치는 다른 테이프들과 함께 퍼져나갔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임을 보여주려는 듯 이라크 내 집집마다 알렸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에 유포됐다. 자르카위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2005년 7월 7일 런던지하철 폭파범들은 빈 라덴과 자르카위를 찬양했다. 따라서 자르카위는 이라크로 숨어들어와 성전에 참여할 신실한 이슬람 교도를 이슬람권 전역에서 모집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들 외국인이 실제로 미군과 이라크군에 공격을 감행한 건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충격적인 공격이었으며 군경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테러를 가했다. 자르카위는 성장해 갔다. 간신히 글만 깨우쳤다 싶던 자르카위의 어설픈 아랍어는 더 세련되고 고상해졌다고 언어학자 리타 카츠는 말했다. 그가 운영하는 SITE연구소는 테러리스트 웹사이트들을 감시한다. 자르카위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마치 런던 뒷골목의 소매치기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듯했다. 알카에다는 기꺼이 자르카위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를 ‘에미르’(토호)로 부르기도 했다. 자르카위도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직명을 ‘유일신과 성전’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알카에다’로 바꿨다. 그 사이 미군은 자르카위를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체포 부대의 이름도 계속 바꿨다. 가장 최근의 부대명은 ‘태스크 포스 145’였으나 이 또한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또 다시 바꿨다고 한 고위 외교관은 전했다(그도 기밀정보란 이유로 익명을 요구했다). 용맹한 미 특공대는 단서를 찾으려 이라크 거리를 샅샅이 뒤졌다. 수색 임무가 늘 신사적이진 않았다. 지난 3월 뉴욕 타임스는 최정예 특수부대 ‘태스크포스 6-26’이 사담 후세인의 여러 고문실 중 하나를 접수해 ‘블랙 룸’이란 이름의 취조실로 바꾼 과정을 상세히 전했다. ‘피만 흘리게 하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용납된다’는 플래카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취조관들은 수감자들에게 침을 뱉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격했다. 모두 자르카위의 소재 파악이 목적이라고 타임스는 전했다. 이라크군과 미군은 자르카위를 여러 차례 체포할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이라크군이 팔루자 외곽에서 자르카위를 생포해 구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체포 30분 만에 풀어줬다. 또 한번은 미군이 자르카위의 운전사를 체포하고 노트북 컴퓨터까지 확보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르카위는 빠져나갔다. 영화나 소설에서 불가능한 임무를 멋지게 해내 존경받는 델타포스 같은 최정예 부대가, 더구나 사방에 이라크군과 미군이 깔린 곳에서 현상금 2500만 달러가 붙은 한 남자를 붙잡지 못한 사실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미군이 애독하는 군사주간지 ‘아미 타임스’는 지난달 기사에서 최정예 요원들이 직면한 절차와 수송 상의 문제를 세밀히 다뤘다. 비밀작전이란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대테러 장교 한 명은 기사의 세부내용이 옳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태스크포스 145’ 부대의 자르카위 체포작전 실패를 상세히 기술했다. 그때 자르카위는 수니 삼각지대 안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2005년 2월 미군은 자르카위가 티그리스강변 도로를 따라 이동할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치밀한 매복작전을 벌였음에도 자르카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군이 작전을 포기하려는 순간 차량 한 대가 델타부대의 도로 장애물을 통과해 검은 베레모로 유명한 레인저 특공부대 병사들이 지키던 검문소로 바짝 접근해 왔다. 기관총 사수는 이 SUV차량을 정조준한 채 사격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다. 지휘관은 망설였다. 차량에 탄 사람들의 ‘신원확인’이 안 됐기 때문이다. 차량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그 안에 미군의 고성능 자동소총을 손에 들고 차창 밖을 매섭게 노려보는 얼굴이 보였다. 자르카위였다. 특수부대원들은 신속히 추격전을 벌였다. 델타부대원들이 고속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 ‘섀도(그림자)’로 알려진 무인 공중정찰기가 추격장면을 추적했다. 자르카위는 그때 “바지에 ×을 쌀 정도로 놀랐을 것”이라고 한 특수부대 병사는 아미 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운전자에게 마구 고함을 질러댔으며 그때 자신이 잡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첨단장비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무인정찰기에 장착된 카메라가 자동으로 재세팅되면서 자르카위가 탄 차량에 정확하게 맞춘 초점이 도시 전체를 잡는 앵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섀도 카메라를 조작하는 요원들이 서둘러 다시 자르카위에게 초점을 맞췄지만 자르카위는 이미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사라진 뒤였다. 올 봄 미군은 다시 한번 자르카위를 바짝 추적했다. 4월 해군의 ‘실 팀 식스’ 대원들이 테러범들의 안가 한 채를 급습, 테러범 5명을 사살했다. 그중 3명이 자살폭탄 벨트를 착용했다. 당시 자르카위는 “10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특수부대원 한 명이 아미 타임스에 밝혔다. 그 안가에서 특수부대원들은 자르카위가 헐렁한 검은 옷에 흰색 뉴 밸런스 운동화 차림으로 미제 자동소총을 다루는 장면을 담은 테이프 한 개를 찾아냈다. 자르카위는 결국 자만심과 적개심 탓에 몰락했는지 모른다. 종파 간 폭력을 조장하고, 시아파가 수니파에 대항해 내전을 벌이도록 부추기려고 자르카위는 지난 2월 사마라에 있는 시아파 성지 한 곳을 포함해 시아파 성지들에 수차례 폭탄공격을 감행했다. 그 유혈사태는 그가 노리던 결과를 가져왔다. 이라크가 전면적인 내전상태로 치닫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유혈사태로 그는 빈라덴의 오른팔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로부터 질책받는다. 이슬람 동족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알카에다에 관한 대중의 여론을 악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자르카위는 4월 자신의 비디오를 제작할 무렵 지위도 점차 약화되고 배신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요르단의 한 고위 정보 관리는 “그는 압박을 받았고, 자리에서 밀려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자르카위는 최근 저항운동에 이라크 색채를 보다 강화하려고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테이프는 자신의 장악력을 과시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이 관리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그 테이프가 공개되는 순간 그의 종말도 시작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요르단 사람들은 자르카위의 부하들이 지난해 11월 암만의 호텔 3곳에 폭발물을 터뜨려 60명의 사망자를 내고 결혼식장 한 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부터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추적해 왔다. 12월엔 압둘라 국왕이 요르단 특수부대원 복장을 한 채 최고위 정보장교들을 직접 불러놓고 “나는 자르카위가 요르단으로 넘어와 공격하길 기다리지만은 않겠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에 ‘신의 기사 그룹’이란 이름의 정예부대가 창설돼 반역자 자르카위 추적에 나섰다. 요르단 관리들도 자르카위를 겨냥한 최후의 공격은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했다고 인정하지만 자르카위 조직에 처음으로 침투한 자들은 요르단 사람들인 듯하다. 구체적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군·정보 관리들은 마지막 추격전의 밑그림을 보여줬다. 공격작전이 감행되기 2주 전 어느 시점에서 미군은 가장 최근에 임명된 자르카위의 정신적 조언자 셰이크 압델 라흐만의 신원을 파악했다. 미 정보당국은 원격조종 첩보기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셰이크 라흐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를 추적하면 자르카위의 소재 파악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몇몇 언론기관은 미국 공작원들이 자르카위의 측근 중에 정보원을 심어뒀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다(미 정보당국은 테러조직 내부에 상호 불신감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첩자와 배신자에 관한 역정보를 흘린다고 알려졌다).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미 정보관리들은 미군이 사람이 수집한 정보와 공중정찰정보, 전자 감청정보를 함께 짜맞추는 능력이 있었다고만 말했다. 과거엔 관료적 절차 때문에 자르카위 추적이 지연됐다. 이번엔 특부부대원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자르카위가 히브히브 마을 외곽 야자숲 속의 안가에 도착했다는 확신이 서는 순간 사령관들은 공습개시를 명령했다. 안가를 덮치되 자르카위를 생포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은 듯하다. “스스로 자문해 보면 안다. 그를 생포하려고 남녀 미군들이 목숨을 무릅쓰고 경비가 철통 같은 곳을 쳐들어갈 값어치가 있을까”라고 바그다드의 한 고위 미군 대변인(윌리엄 콜드웰 소장)은 말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대(對)테러 관리 한 명은 이번 공격이 부수적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고 미군이 자르카위의 소재를 폭격한 최초의 사례라고 밝혔다. 부수적 피해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민간인들 다수를 사망케 하는 일을 의미한다. 6월 7일 오후 6시15분쯤 일상적 정찰비행 중이던 F-16 전투기 두 대 앞으로 안가의 좌표와 함께 ‘매우 가치 있는 표적’이 그 안에 있다는 지시가 하달됐다. 두 대 중 한 대는 공중급유 중이었기 때문에 전투기 한 대가 폭탄 두 발을 모두 투하했다. 파괴 작전은 완벽하게 이뤄졌다. 통신사 보도에 따르면 잔해더미 곳곳에 얇은 스펀지 매트리스가 흩어져 있었고, 빨대가 꽂힌 파인애플 주스 봉지 하나가 현장에 있었다. 그 밖엔 별로 눈에 띄는 물건이 없었다(주민 한 명은 자르카위가 숨을 거두기 전 미군들이 그를 구타했다고 주장했다). 거의 동시에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바그다드 시내와 인근 지역의 테러범 은신처를 공격해 자르카위의 동료와 부하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자르카위 추적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감시를 받았다. 이젠 다시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이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해야 했다. 미군 대변인들은 이번 소탕작전이 대성공이었다고 말했다. 재정 면에선 늘 든든했던 자르카위는 작전을 분산시켜 지방 수령들이 자신의 지시 없이도 공격을 감행하도록 권한을 분산할 정도로 교묘했다. 미군 특수부대가 그의 부하 몇 명을 소탕하더라도 이미 다른 곳에선 작전이 진행 중인 탓에 일망타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자르카위 전문가 한 명은 낙관적이다. 이스라엘 하이파대학의 역사학자 아마트지아 바람은 “미 정보당국은 큰 개가를 올렸다. 무인 비행기로 모은 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휴먼 인텔리전스’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할 당시 “미군의 인적 정보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며 사실 “테러 조직은 한 방에 일망타진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메우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수니파 지도자들과 자르카위 잔여세력 간에 틈새를 벌릴 기회도 생겼다고 본다. 자르카위가 죽기 전에도 수니파 삼각지대와 시리아 국경 지역에선 이 두 세력 사이에 전투까지 벌어졌다. 만일 미군이 결국 자르카위를 체포하고 사살까지 가능했다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최고 심복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그렇게 처리가 가능하다는 희망이 생길 만도 하다. 미 특수부대는 아직도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산악지대에서 알카에다 지도부를 추적 중이다. 하지만 그곳의 문화와 지리는 모두 빈 라덴에게 극히 유리하다. “자르카위의 활동 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이 빈 라덴에게 제공하는 광대한 지역을 비교해 보라”고 퇴역 미 해병 대령으로 독일의 조지 C 마샬 유럽안보연구센터에서 대(對)테러 프로그램을 이끄는 닉 프래트는 말했다. “그곳은 산악지대여서 거의 3차원적 문제와 같다.” 빈 라덴은 자신의 오디오와 비디오 테이프 공개를 극히 조심스러워하는 반면 자르카위는 “스스로 드러내기를 매우 좋아한 사람이었다”고 프래트는 말했다. 빈 라덴과 함께 생활하는 충직한 마을 사람 중에는 알카에다 2세대 전사도 있다. “한마디로 매우 편안한 작전 환경”이라고 프래트는 말했다. “그는 어딜 가든 자기 마음대로 다스린다.” 그러나 미군은 시간이 지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천천히나마 배워가는 듯하다. 미 특수부대와 정보기관들은 얼마전까지 표적 암살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외교적 이유를 들어 익명을 요구한 한 이스라엘 전직 관리는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워싱턴에 주재하던 2000년 10월 전화를 받고 미 국방부로 불려간 때를 돌이켰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당시 미 합참 전략정책·기획 책임자인 존 아비자이드 장군이었다. 장군은 그 이스라엘 관리에게 예멘에 정박 중인 미 구축함 USS 콜호가 방금 공격을 당했는데 빈 라덴이 배후라고 말했다. 아비자이드는 이스라엘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이스라엘 관리는 “장군, 그자를 죽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비자이드 장군은 암살을 금지하는 명령이 떠오른 듯 곧 머리를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안 돼, 그건 안 돼. 우리에겐 준수해야 할 정책이 있어. 우린 그런 짓을 안 해.” 그럴 때도 있었다. With CHRISTOPHER DICKEY in Amman, SAMI YOUSAFZAI and RON MOREAU in Kabul, MARK HOSENBALL in Toronto, JOHN BARRY, DAN EPHRON, RICHARD WOLFFE and MICHAEL ISIKOFF in Washington, KEVIN PERAINO in Jerusalem and BARAK DEHGHANPISHEH in Beirut 강태욱·이정명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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