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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기자의 사람이야기-전 국회의원 박주선] “누가 참여했소, 전부 배제했지”

[김정욱 기자의 사람이야기-전 국회의원 박주선] “누가 참여했소, 전부 배제했지”

1998년 초 그가 검찰을 떠나 청와대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왠지 그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 검찰은 권력을 재단(裁斷)하는 곳이었고, 청와대는 권력이었다. 그는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에게 수차례 “청와대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옮겼고, 다시는 검찰로 돌아오지 못했다. 검사 박주선, 정치인 박주선의 ‘3번 구속, 3번 무죄’ 인생유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그를 1996년 4년차 기자와 서울지검 특수부장의 신분으로 처음 만났다. 그가 얼마나 사건 처리에 공평무사했고 처신이 발랐는지, 나로선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검사 박주선은 참으로 멋졌다. 사시 수석 출신으로 동기 중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기백이 넘쳤고, 무엇보다 유능했다. 손목 부분이 다 해어진 누런색 ‘쎄무’ 점퍼를 걸치고, 얇은 ‘에쎄’ 담배를 입에 물고, 명쾌한 논리로 사건 처리 결과를 브리핑하는 모습에 반한 기자가 많았다. 한 예로 김영삼 정부 시절 현직 장관 부부가 연루돼 이목이 집중된 금품수수 사건에서 그는 장관을 기소하지 않았다. ‘봐주기 수사’라는 언론의 거센 비판이 예상된 상황에서 그는 다섯 가지 불기소 사유를 조목조목 설명했고, 많은 기자는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박주선 검사에 대한 ‘신뢰’였다. 고위직 공무원들 중엔 기자들의 연조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차야 대면해 주곤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신참이건, 고참이건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살갑게 대했다. 소탈하게 사람을 대하는 품성, 그 덕은 결국 자신이 봤다. “초임 검사 때 구속 피의자를 조사할라치면 젊은 교도관이 사무실 문 밖에서 지키고 서 있어. 구치소에서 가져온 ‘짬밥’이 맛이 없잖아. 그래서 내 책상에서 같이 김치찌개를 시켜먹곤 했지. 그런데 이번에 감옥 갔더니 그 사람이 구치소 간부가 돼 있더라고. 그때 고마웠다면서 그렇게 잘해주더구먼.” 그 전까지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대단한 권력자였다. 지금 정부로 치면 민정수석, 인사수석 업무를 혼자 다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그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일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김 대통령의 공개적 언급을 통해 한 시대의 ‘화두’가 됐다. 언젠가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모 헌법기관장 임명에 관한 일화도 이야기했다. “대통령께서 추천해 보라고 하셔서 법조인 선배 한 분을 말씀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결정해 버리시더라”고 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그의 일원동 아파트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그런 그가 수형자의 몸이 됐으니 허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어쩌다 남에게 위로받는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많은 사람은 16대 국회의원 출마를 권했고, 나도 그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의원 박주선이 나에게도 익숙해질 무렵 그는 또다시 감옥에 갔다. 그것도 두 차례, 그리고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법정구속의 수모까지 당하고 나서야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긴 터널을 빠져나온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눈물을 처음으로 봤다. 가슴의 굵직한 심장수술 자국을 보여주면서 “아빠가 꼭 필요했을 시점에 아무것도 못해준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한 참석자가 현 정부를 ‘참여정부’라고 부르며 말을 이어가려 하자 그는 대뜸 “지금 뭐라고 했소? 왜 참여정부요? 누가 참여했소? 다 배제했지”라고 쏘아붙였다. 그 회한과 분노가, 그에게 민주당 간판으로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다소 무모한 결정을 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제 그는 다시 그의 표현대로 ‘백수’다. 그때 청와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권력의 감시자로 남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에게나 우리 사회에게나 도움이 되는 또 한 번의 장이 열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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