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트 수출은 공염불
플랜트 수출은 공염불
지난해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원자바오 중국 총리를 50여 분간 만났다. 이때 노 대통령은 “최근 한국 기업들이 원자력 능력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 중국 원전 발주에서 참가 자격과 같은 기회를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은) 한국 기업과 외국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며, 이웃나라 한국의 중국 원전 참여를 검토해 나가겠다”고 화답했다. 중국 총리는 나아가 한국의 원전 분야 수출을 보면 한국의 혁신이나, 창조적인 능력이 잘 나타나는 듯하다고 치켜세웠다. 두 사람은 11개월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2004년 11월 라오스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다. 노 대통령은 “우리 업계가 원자로 제조 관련 기술 이전이 가능한 점을 고려해 중국의 원전 건설사업에 우리 업체가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협조를 구했다. 이에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은 원자력발전소 설비 제조와 운영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하기 바란다”고 답했다. 정상회담장 분위기로 치면 한국 원전의 중국 진출은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은 중국이 실시한 원전 입찰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중국은 2004년 들어 산먼(三門)·양장(陽江)지구 제3세대 신형 원자력발전소 4기 건설공사를 국제입찰 방식으로 발주했다. 한국은 입찰 의향서를 중국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해 9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 아레바, 러시아의 원자로수출공사 3곳에만 초대장을 보냈다. 한국은 쏙 빠졌다. 노 대통령이 원 총리에게 거듭 ‘원전 건설 사업 참여’를 요청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 총리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한국의 원전 기술이 국제 입찰에 거부당하는 이유는 뭘까? 신규 원전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던 중국 수뇌부의 발언에 중국 실무진은 왜 공감하지 않았을까? 앞으로 많은 원전을 지어야 하는 중국은 기술을 이전받아 독자적으로 원전을 건설할 생각이다. 따라서 중국은 2004년 원전 공급자 선정의 주요 요건이 원천기술 이전이라고 누차 밝혔다. 중국 원전 입찰에 초대받은 3개 회사는 모두 자체 원천기술을 보유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수출한 경험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한국의 입찰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한국이 원자력발전소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이 가동 중인 한국 표준형 원전(OPR 1000)이나 한국형 신형경수로(APR1400) 원천기술의 소유권은 미국 웨스팅하우스(당초 원천기술은 미국 컨버스천 엔지니어링이 공급했지만 웨스팅하우스에 흡수됐다)에 있다. 웨스팅하우스가 동의해 줘야 한국은 한국형 표준 원전 기술의 해외 이전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중국은 입찰안내서 발급을 앞두고 원천기술 이전이 가능한지 한국 측에 확인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2004년 3월 웨스팅하우스사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는 중국이 주요 업체들에 입찰 초대장을 보낸 그해 9월까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자신에게 입찰 초대장이 발급된 뒤인 10월 13일이 돼서야 한국의 원전사업 해외진출에 협조하겠다는 서신을 한국에 보냈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한국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웨스팅하우스의 원천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국이 그 기술을 수출하려면 97년 5월 15일 체결된 기술사용협정서(License Agreement for PWR Technology)에 따라야 한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중국의 3세대 원전 입찰에 APR1400으로 응찰한다면 이를 막을 의향은 없다. 또 중국이 한수원의 APR1400 노형을 수입하기로 결정하면 가능한 한 완벽하게 기술 이전에 협력하겠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는 차세대 원전 기술을 원하는 중국의 요구에 부응해 AP1000 노형(자체 개발한 가압형 경수로)으로 입찰에 응할 계획이다. 다시 말해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자사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기술 수출을 하겠다면 지원하겠다는 얘기다. 편지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웨스팅하우스는 기술사용협정서에 적힌 대로 한수원의 원전기술 해외 이전을 지원하겠다는 원칙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기술사용협정서의 내용을 보아야 웨스팅하우스의 속내가 드러난다. 협정서에는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로부터 도입한 기술을 외국 업체에 이전할 경우 충족해야 할 조건이 나열돼 있다. 첫째로 미국 수출통제법을 충족해 미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아울러 기술의 공개와 이전을 웨스팅하우스가 사전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로 한수원은 외국 업체와 기술이전 계약 체결 전에 웨스팅하우스와 계약 조건과 기술이전에 따른 보상금을 합의해야 한다. 결국 기술 이전이 가능하려면 웨스팅하우스가 이에 사전 동의한 뒤 미국 정부의 허락까지 대신 얻어줘야 한다. 또 기술 이전에 따른 보상비용까지 추가로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해야 한다는 의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술이전을 차단해도 할 말이 없는 조건들이다. 더구나 웨스팅하우스도 중국 원전 입찰에 응모까지 했다. 미국원자력위원회는 웨스팅하우스의 중국 진출 지원을 위해 기기와 엔지니어링 기술의 중국 수출을 이미 승인한 터다. 그런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의 원전 수출을 도와 제 발등을 찍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 중국은 원전산업에서도 기회의 땅이다. 중국은 현재 원전 9기(700만kW)를 운영 중이고 6기(520만kW)를 건설 중이다. 원전 시설용량을 2020년까지 4000만kW로 늘릴 예정이다. 100만kW급 원전을 30기 정도 새로 짓는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는 100여기 이상의 신규 원전 건설이 예상된다고 업계는 말한다. 2004년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이 미국 103기, 프랑스 58기, 일본 52기 등을 감안하면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중국도 원전에 많이 기댈 공산이 크다. 따라서 미국 웨스팅하우스나 프랑스 아레바 등 원전 선발 업체들은 한국의 중국 시장 참여가 달가울 리 없다. 더구나 웨스팅하우스에 중국 진출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업이다. 중국시장에서 성과를 내야 원전 건설을 재개키로한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스팅하우스가 중국시장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이희용 한수원 사업전략팀장은 설명했다. 웨스팅하우스가 중국 원전 입찰에 컨소시엄을 형성해 공동 전선을 펴자는 한수원 측의 제안을 뿌리친 까닭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중국에다 EPR(유럽형 가압경수로) 원전을 판매하려는 프랑스 원자력에너지 그룹 아레바 코리아의 이진우 부사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은 3세대 원전을 자국의 표준으로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중국시장은 미국 웨스팅하우스 위주로 짜일 공산이 크다. 미국 관계개선 차원에서 중국 정부가 접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결국 중국 시장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나 한수원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중국은 웨스팅하우스의 서신을 첨부해 입찰안내서를 발급해 달라는 한국 측 요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만약 한국에 입찰을 허용한다면 웨스팅하우스와 직거래를 해도 시원찮은 상황에서 한국을 중간에 끼워넣는 꼴이라 여겼을 듯하다. 결국 중간 거마비만 한국에 더 뜯기는 셈이다. 물론 중국이 굳이 한국형 원전을 선택한다면 그런 수고를 들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형 원전은 웨스팅하우스 최신기술보다 월등하지도 않고, 앞으로 세계시장을 장악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 상황에 중국이 한국형 원전에 눈길을 줄 이유는 없었다. 웨스팅하우스의 서신을 근거로 수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산자부나 한수원도 내심은 그리 편하지 않은 듯하다. 한수원은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수원이 원전 건설 수출에 성공하려면 이런저런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점을 밝혀두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이 입증된 최신 기술의 원전을 요구할 경우 웨스팅하우스는 해당 노형이 없고, (한국의 원전 수출이 성사될 경우) 웨스팅하우스도 일정 규모의 사업 참여가 가능하므로 한국형 원전 수출에 협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여기서 ‘입증된 최신 기술’이라는 말은 한국형 원자로를 꼭 집어 의미한다. 왜냐하면 웨스팅 하우스나 아레바가 중국에 수출하는 원전의 경우 아직 완공되어서 가동 중인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수원이 보는 한국의 원전 수출 가능성은 이렇게 풀이된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이 한국형을 꼭 집어 원할 경우 웨스팅하우스가 굳이 마다할 리 없지 않으냐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한수원의 희망사항이 모두 충족될 가능성은 아주 작다. 2004년 중국이 한국의 입찰을 거부한 예에서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한수원은 아주 희박한 확률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한수원의 보다 복잡한 속내는 최근 국회에 보낸 자료에 잘 나와 있다. “한국은 대부분의 원전 기술을 확보했으나 일부 기자재 및 전산 코드 등 미확보 기술에 대해 웨스팅하우스의 협력이 필요하므로 한국 단독으로는 해외 진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단독 입찰 참여가 어렵다는 뜻이다. 나아가 웨스팅하우스는 자체 모델인 AP1000의 해외 진출을 선호하므로 한국형 원전이 경쟁하는 프로젝트에서는 협력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수원은 밝혔다. 실제로 웨스팅하우스는 AP1000 원전을 중국 진출의 주력 노형으로 선택했으며, 중국 진출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웨스팅하우스에서 10년간 근무하기도 했던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웨스팅하우스가 중국 진출에 낙관적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서 교수는 나아가 “한국이 중국 입찰에 참여했다손 쳐도 기술적 제약 때문에 아주 낮은 평점을 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뉴스위크 한국판은 웨스팅하우스 본사와 한국 지사에 전자우편을 보내 한국의 원전 수출에 어떤 입장인지를 물었다. 요컨대 제3국으로의 기술 이전에 어느 정도 협조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한국 지사는 지사장이 바쁘다는 이유로 답변을 미뤘고, 웨스팅하우스 본사는 두 번에 걸친 전자우편 질의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뿐이 아니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들과 관료들도 중국 원전 진출에 많은 공을 들였다. 97년 김영삼 대통령은 APEC 정상회담에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산둥성 원전 건설사업이 한·중 양국의 정책사업으로 추진되기를 희망했다. 이듬해 4월 김대중 대통령은 ASEM 회의에서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에게 중국 신규 원전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 대통령은 같은해 11월 중국 방문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주 총리는 원전 건설 사업 계획을 수립할 때 한국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원전 발주 문제는 주요 의제에 항상 포함됐다. 그래서 98년 4월 김종필 국무총리 서리는 방한 중이던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에게 양국 간 원전사업 협력을 또다시 제의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의 원전 사업 입찰에 한국이 참여해 달라고 화답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팔 물건(원전 플랜트)이 없는데도 중국에 사달라고 조른 셈이다. 그것도 대통령들이 나서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청와대 측은 산자부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주무부서인 산자부가 원전 플랜트 수출을 희망하는 업계의 여론을 수렴해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시켰다는 설명이다. 정상회담 의제 선정에 관여한 주 중국 한국대사관의 김동선 산자관은 “산자부가 한국 원전 기술을 제 3국으로 이전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웨스팅하우스의 서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이를 기초로 한국의 기술력을 중국의 원전 기술자에게도 납득할 만큼 설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웨스팅하우스의 서한은 사실상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내용을 따져보면 한국이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턴키 방식의 원전 수출을 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긴 원전 문제는 정상회담의 수많은 의제 중 하나일 뿐이다. 할애된 시간도 1분이 채 안 된다. 또 “대통령 입장에서 한국 기업의 중국 원전 진출을 도와주기 위해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고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실의 장원삼 행정관은 말했다. 원전과 같은 국책사업에 대통령은 당연히 관심을 표명해야 하며 국익 확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장 행정관은 “국가 원수 간 대화는 대개 일반적이고 브로드(broad·포괄적인)하며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은 독자적으로는 종합적인 기술 이전이 불가능한 처지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교착상태에 빠진 의제에 힘을 실어줬다기보다는 정상회담에서 무리한 청을 한 셈이다. 지난해까지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은철 서울대 교수는 “그 정도면 청탁에 가깝다”고 혀를 찼다. “대통령은 실무선에서 정지작업을 다 끝낸 후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원전을 사달라고 하는 게 외교 관례상 타당한지 모르겠다.” 한국 원자력학계의 중진인사인 이 교수는 한·중 정상회담에서 그런 의제가 논의된 사실도 발표 후에나 알았을 뿐이라고 밝혔다. 학계가 준비는커녕, 충분히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라는 얘기다. 사실 관련 학계와 업계는 정부의 일처리 방식에 고개를 갸웃한다.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의제가 어떻게 정상회담 석상에 올랐느냐는 물음이다. 황주호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노 대통령이 지난해 한·중 정상회담에서 왜 원전 참여 문제를 또다시 언급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4년 입찰 참여조차 거부됐는데도 말이다. 서균렬 서울대 교수도 “기술 기반을 충분히 다진 뒤에나 수출의 문이 열릴 때 원전을 팔 수 있다”며 설익은 의제였음을 시사했다. 예민한 사안이라 익명을 요구한 원자력 업계의 CEO는 보다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노 대통령이 원자바오 총리를 만나 중국 원전 발주 참가를 말한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중국은 한국의 원전 기술을 인정하지 않는데 대통령이 사달라고 요구한 꼴이다. 원전 기술을 100% 확보하지 않는 한 중국은 한국 원전을 인정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산자부는 정상회담에서의 원전 수출 문제 거론 방식을 당연시한다. 산자부가 발행한 2005년 원자력 백서를 보자. “우리나라는 풍부한 건설, 운영 경험을 갖고 있으나 해외 진출 경험 및 원천기술 면에서 선진국에 열세이므로 실제 수주 때 어려움이 예상된다. 향후 정부 간 협력 채널을 활용해 민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위 정책 결정권자에게 우리 원전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입찰 참여를 요청할 예정이다.” 제주대 정범진 교수는 한 학술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와의 협상에서는 늘 긍정적인 답이 기대된다. 이들은 원래 부정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와서 희망을 품는다면 바보다.” 정 교수가 보기에 한국은 수출할 준비가 안 돼 있다. 중국이 원하는 기술 이전 능력이 한국엔 없기 때문이다. 원천기술 중에서도 핵심 기술이라 할 원전 설계 핵심 코드, 원자로 냉각제 펌프, 계측 제어 설비 등은 아직도 웨스팅하우스에 의존한다. 이은철 서울대 교수는 보다 직설적이다. “(중국 원전 입찰에) 한국이 독자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건 누가 봐도 사기를 친 것”이라고 말했다. 원전 수출을 주관하는 한수원이나 원전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는 이런 견해에 정색을 한다. 당장은 안되더라도 거듭 두드리다 보면 좋은 성과를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이다. 한수원 해외사업처 윤용우 부장은 “(실무선에서) 풀리지 않거나,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도 정상회담에서 거론하는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어떤 난제라도 일국의 대통령이 한번 희망을 피력하면 적당한 계기를 맞아 갑자기 성사되기도 한다고 윤 부장은 덧붙였다. 산업자원부 원자력산업팀 주원석 사무관도 “원전 같은 문제는 정상끼리 회담을 통해 타결짓고 난 다음에 실무적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과연 그럴까? 서균렬 서울대 교수는 “원전 플랜트는 국가 원수가 나서서 판매하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학적으로 준비가 덜 돼 있다. 정상회담에서 안 되는 일을 자꾸 반복해 언급하다 보면 (발언의) 의미조차 희석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인사도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정상회담에서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언급해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이 인사는 실무부서에서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보고가 정확하지 않거나 중간에 변형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원전 수출 노력이 그 경우에 해당하는지 시간을 두고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학계는 그동안 정부의 접근 방식에 여러 차례 문제 제기를 했다. 하지만 웬 일인지 반향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은철 서울대 교수는 “여러 번 문제제기를 했지만 정부의 최고위층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정부 내 원자력 담당자들이 수시로 교체되는 것도 한 요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산자부나 한수원이 청와대로 하여금 중국 측에 원전 플랜트 수출을 자꾸 거론토록 하는 이유는 뭘까. 기술 이전 없는 원전 수출이라는 틈새시장을 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원전 기술을 쥐고 있는 웨스팅하우스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시장으로의 진출이다. 중국이 몇몇 원전 건설 발주를 통해 첨단기술을 습득한 다음엔 기술 이전을 요하지 않는 저렴하고 평범한 원전을 택한다는 가정 아래 세워진 전략이다. 이인호 산자부 원자력산업팀장은 이를 “원전 포트폴리오”라고 불렀다. 이 팀장은 “원천기술이 없으면 수출이 쉽지 않다. 하지만 중국이 30기나 짓게 되면 매년 1,2기를 짓는 셈이고, 전부 같은 형으로 짓는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 팀장은 포트폴리오론의 근거가 뭐냐는 질문에 “상식이다. 내가 중국 원전 담당자라면 포트폴리오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부의 그런 기대에 중국이 부응해줄지는 의문이다. 일본전기신문은 지난 4월 27일자에서 최근 중국 3세대 원전 4기 입찰 경과를 추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신 기술을 어디까지 중국에 이전하는가를 분명히 밝히는 게 낙찰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이번 4기에 채용되는 노형이 표준로가 되어 (중국의) 다음 원전 건설의 플랜트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선택되는 노형이 후속 원전 건설에도 표준모델이 되리라는 말이다. 사실 정부와 한수원이 당장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는 원전 플랜트 수출을 소리높여 외치는 보다 더 절박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듯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반문했다. “현재로서는 플랜트 수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다면 100% 기술이 확보될 때까지는 손을 놓아야 하느냐?” 원전 수출은 부품, 용역, 플랜트 등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원전 기자재는 부품 수출에, 원자력 기술 인력 파견 등은 용역 수출에 해당한다. 이 같은 분야는 한국이 앞서 나가며 실적도 올렸다. 한국전력공사 시절이던 1993년 이래 지난해 5월 말까지 원전수출은 3억5600만 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원전 수출의 백미는 플랜트 수출이다. 원전을 통째로 만들어 파는 ‘턴-키(Turn -Key)’ 방식의 경우 원전 1기 플랜트 수출에 보통 20억 달러를 넘기 때문이다. 현실성 여부만 눈감으면 원전 플랜트 수출은 대단히 매력적인 구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전력공사는 원전 복제 기술을 습득한 95년부터는 한국형 표준원전(OPR1000) 기술 설명회를 중국에서 여는 등 플랜트 수출을 겨냥해 활동해 왔다. 그러다 한국전력공사의 발전부분은 2001년 4월 산자부의 주도로 한수원 등 6개회사로 분리됐다. 한수원은 해외사업처를 두어 한국전력공사의 원전 수출 사업을 이어 받았다. 따라서 산자부와 한수원이 원전 플랜트 수출을 계속해 외치는 이유는 한국전력공사 시절부터의 관성때문이다. 지금 부터라도 실현 가능한 수출 계획을 세워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거나, 원자력 산업계의 협업 구조를 바꾸어가는 일은 산자부나 한수원 모두에게 번거롭고 복잡하다. 되든 안되든 플랜트 수출을 외쳐대는 일이 ‘조직의 이익’을 지키기에 훨씬 더 쉽고 간편하다는 말이다. 원자력 산업계는 정부나 민간 분야의 인사들이 대단히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고 진입장벽이 높아 ‘원자력 마피아’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그럼에도 최근 업계와 학계는 관행화된 정부의 플랜트 수출 구호에 이의를 달기 시작했다. 그만큼 원자력 산업계가 문제가 심각성을 인식하게 됐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정부가 실현 불가능한 과제를 정책 목표로 추진하는 사례는 원전 플랜트 수출만이 아닐 것이다. 산자부 산하 ‘에너지·자원 R&D 기획단’ 단장으로 있는 김창섭 한국 산업기술대 교수는 한국 정부의 종합정책은 정밀한 실행계획(액션플랜)이 없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정부는 실현가능성보다는 희망사항을 정부의 정책 목표에 녹여 넣기도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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