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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야망 50년사“이젠 우리도 핵 강국”

북한의 핵 야망 50년사“이젠 우리도 핵 강국”


경제가 파탄나고 폐쇄된 나라가 어떻게 대량살상무기를 갖게 됐나… 미국과 국제사회는 왜 김정일의 핵무장 막지 못했나 큰 역사적 사건들이 시시한 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다. 빌헬름 2세는 파리에서 열병식을 열어주지 않은 프랑스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유럽의 군주들은 내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고 1914년 유럽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앞서 이 독일제국 황제는 불평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북한의 김정일 역시 자존심이 예민하다. 우선 작은 키(160㎝)로 인한 신장 열등감이 있다(그래서 머리를 부풀리고 키높이 구두를 신는다는 의심을 산다). 영화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1978년 한국 여배우 최은희 납치를 지시한 뒤 환영 만찬석에서 영화광인 그가 농담조로 던진 질문은 “최 선생이 보시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니까?”였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실은 동포와 동맹국들의 눈에 비친 자신은 결코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신장이 180㎝에 가까웠으며, 1930년대에 항일 유격전을 벌였다)의 업적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두려움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정일은 종종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는 고위 보좌관들과 함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미사일 발사 실험의 취소를 종용하자 “듣자 하니 형이 동생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시킨다”고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푸념했다. “그러나 우리는 꼬마가 아니다. 핵 강국이다.” 따라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의 한 공화당 상원의원 모임에서 김정일 비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 북한 정권의 고위층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쉽게 이해된다. 부시는 듣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심한 표현을 썼다. 김정일을 보기 싫은 “난쟁이”라 부르면서 “저녁 식탁에서 버릇없는 꼬마”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발언은 물론 기타 부시가 비꼬는 말들은 뉴스위크를 비롯한 다른 서구 간행물에 보도됐기에 북한 관리들은 평양을 자주 방문하는 워싱턴의 한국통 셀리그 해리슨에게 수시로 항의했다. “귀국의 지도자가 우리에게 일말의 존경심도 보여주지 않는 마당에 어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고 김계관은 2004년 해리슨에게 따졌다. 역사란 경제니 이념이니 지리니 하는 추상적 개념들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심한 결함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와 야심에 의해 더욱 결정적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김정일과 김일성, 핵 클럽에 가입하려고 오랜 세월 노력한 여러 세대의 북한 군인·과학자·간첩이 그들이다. 과연 김정일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도자가 자신을 능멸하고 직접 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난주 핵무기 실험을 결심했을까? 물론 그보다는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이 빌헬름의 나폴레옹 콤플렉스만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위험한 순간으로 이어진 과정(북한을 8년 만에 처음 등장한 새로운 핵 보유 선언국으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8개 핵 보유국 가운데 가장 불안한 나라로 만든)은 북한과 미국 정부 사이의 오랜 잘못된 자존심과 편견, 깊은 오해, 안타까운 기회상실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난 10월 10일 서울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에 주재하는 한 북한 외교관은 이번 핵실험이 북한 정부가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우리가 핵 보유를 선언했을 때 미국은 우리 능력을 얕보고 정말인지 의심했다. 핵실험은 우리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북한이 숨겨온 비밀 미국 정부에는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해법을 가진 사람이 없다. 지구상의 유일한 스탈린주의 정권인 북한은 동아시아의 눈부신 성장 속에서 50년 동안 곪은 정치적 독성 쓰레기 하치장이다. 정말로 조지 오웰의 소설을 닮은 희한한 곳이기도 하다. 평양의 텅 빈 대로에서 교통경찰들은 오가는 차 한 대 없어도 방향지시 동작을 되풀이한다. 수많은 사람이 소리없이 굶어 죽는다. 부시의 말을 빌리면 김정일은 “휴스턴 크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운영한다. 빌 클린턴도 역시 김정일을 경멸했다. 대통령 시절 지금의 부시보다 더 공격 일보 직전 상황까지 갔다. 다만 현직 대통령은 여러 면으로 보아 좀 더 도덕적·개인적 차원에서 김정일에게 불쾌감을 느낀다. 부시가 2002년 초 “악의 축” 발언 직후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보좌관 케런 휴즈는 부시가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남쪽은 불빛이 밝고 전력사정이 열악한 북쪽은 컴컴한 사진이었다. 부시의 눈에 그 사진은 “자유를 따라오는 빛과 기회, 독재정권을 따라오는 어둠”을 보여줬다고 휴즈는 말했다. 북한 핵실험이 실시되기 며칠 전인 2주 전의 로즈가든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지난 4월 한 일본 여인을 만난 일을 돌이켰다. 그 여인은 29년 전 10대 딸을 북한에 납치당했는데 어쩌면 창녀가 됐을지도 모른다. 부시는 “대통령 재임기간에 가장 의미있는 순간 가운데 하나”라고 부른 그 만남으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번 북한 핵실험의 규모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지만(0.5kt 이하로 고작 핵 장난감 총에 불과했다) 북한은 여전히 세계 제일의 미사일 확산 국가다. 게다가 이 정권은 오랜 세월 비밀납치, 특수부대 상륙작전, 기타 비밀활동을 펼친 역사가 있어 미국의 정보 관계자들은 김정일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어찌 사용할 생각인지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직은 북한이 핵물질을 해외로 반출하는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이 홧김에, 또는 돈이 궁해 언젠가는 야구공만 한 플루토늄 덩어리를 미국으로 향하는 테러리스트 폭탄에 장착하도록 허용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 못지않게 무서운 점은 북한이 핵개발에 몰두하는 다른 정권, 특히 같은 “악의 축” 동료 이란에 넘겨줄 기술이다. 핵시대의 여명기인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과학자들은 핵기술의 완전 관리가 불가능해지는 사태를 우려했다. 독재와 싸우려고 만든 무기가 실은 얇은 가면을 쓴 악마였다. 뉴스위크는 북한 핵 악마의 역사를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취재했다. 안타깝게도 20세기 중반에 우려의 대상이었던 것이 21세기 초에는 보편화될 수도 있다. 지난주의 0.5kt짜리 폭발은 50년 이상의 노력이 거둔 산물이다. 김일성이 정확히 언제 핵무기와 그것을 쏘아올릴 미사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마음먹었는지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 야심은 정권의 의심스러운 태동 과정부터 떠안았던 깊은 불안감에 어울리는 태도였다. 북한은 냉전시대 갈등의 유물로서 억지로 만든 나라다.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한 뒤 한반도 이북에서는 1948년 스탈린이 세운 정권이 탄생했다. 소련 정부는 김일성을 독재자로 밀었다. 한편 미국은 남쪽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양측은 제각기 한반도의 정통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늘 전쟁을 벌이는 상태였다. 김일성은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체계를 만들었다. 외국인들을 혐오해온 조선의 전통 민족주의와 권위를 존중하는 유교사상, 유토피아적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를 섞어 굳힌 사상이다. 일부 전문가는 김일성이 무승부로 끝낸 한국전쟁 직후 핵무기를 보유해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에는 남한 동포들과의 경제개발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됐고, 그 뒤 소련이 무너졌다. 그로써 북한 정부는 갑자기 공산권의 후원국이나 지켜줄 핵우산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됐다. 갈수록 초조해진 김일성은 남쪽을 상대로 많은 테러를 저질렀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 KAL기 폭파로 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숨진 사건도 그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그는 아들 김정일의 교육도 확실히 시켰다. 절대에 가까운 권력을 쥔 두 부자가 주도한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에는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일본제국에서 교육받고 2차대전 후 귀국한 이상에 불타는 과학자들이 포함됐다. 그들의 제자들은 소련에서 교육받았고, 토종 기술자도 수천 명이 있다. 북한의 강적인 일본이 북한 핵개발의 “원조(元祖)”로 간주되는 사람을 대줬다. 작고한 과학자이자 발명가 이성기는 1931년 교토제국대에서 화학공학 학위를 받았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은자의 왕국인 북한은 14개국에서 핵개발 지원을 받았다고 알려지거나 의심된다. 러시아·중국·오스트리아·프랑스·캐나다·루마니아·독일·파키스탄·인도·일본·이란·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콩고 민주공화국이다. 개인 차원의 참여자도 있었다. 망명자, 중국 기술기업, 일본 무역상, 태국에서 스칸디나비아로 도처에 흩어진 위장기업들이 모두 주요 기술·부품·노하우를 공급했다. 핵비확산 정책은 바로 그런 거래를 막자는 취지였으나 그것을 교묘히 피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일익을 담당했다. 분석가들은 1974~78년 IAEA 본부(빈)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 최학근이 이 기구의 도서관을 뒤져 핵 노하우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핵개발 야망 때문에 북한의 고급인력들은 큰 인적 대가를 치렀다. 몇 해 전 북한을 탈출해 뉴스위크에 사연을 털어놓은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생의 말에 따르면, 김책대 62년 졸업생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40년도 더 된 그 옛날, 이 엘리트 대학의 졸업식이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김일성이 원자력 에너지를 연구하는 고급 연구소 건설을 지시했으며, 머지않아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 과학도들이 동원돼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는 소문이 교정에 퍼졌다. “교수들은 핵개발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학생들 사이에선 그 연구소에 가는 학생은 오래 살기 어렵다는 소문이 돌았다.” 핵연구소 발령 신세를 면한 그 탈북자는 불우한 동기생들이 병들고 약해지면서 낙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휴가 나온 한 친구는 방사능 때문에 생식능력을 잃기 전에 결혼해 후손을 남겨야겠다는 유교관념적인 다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걱정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이 탈북자는 그들의 희생을 여전히 애석해하며 말했다. “그 친구들은 머리가 벗어졌다. 눈썹이 빠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은 늘 코피를 흘렸다. 너무 아파 보여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힘들었다. ‘한 과학자가 쓰러져도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논리였다.” 그 논리는 독성 핵연구소에 일벌처럼 파견된 한 세대의 과학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굶주린 사람을 먹일 수도 있었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쓰이고, “선군(先軍)정치” 등의 구호 아래 늘 내핍을 강요함으로써 국가경제가 어려워졌다. 북한은 냉전 종식 이후 핵 야망을 추구하다가 미국의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파키스탄을 필두로 하는 국제 불량국 클럽에 가입하면서 도움을 얻었다. 미국 정부가 1985년 군사장비의 대(對)파키스탄 수출을 봉쇄한 뒤로 다름 아닌 하버드대 출신의 베나지르 부토가 북한과 미사일 계약을 맺었다. 파키스탄 암시장의 대표적 과학자인 A Q 칸은 다음 7년에 걸쳐 북한을 13차례 방문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아는 바 없다고 부인했지만, 파키스탄의 전직 고위관리들에 따르면 그 방문은 군부의 양해와 동의 아래 이뤄졌다. 파키스탄은 미사일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북한에 2류급 P1 원심분리기 기술을 주기로 했다. 덕분에 파키스탄은 핵무기 사정거리를 인도 내륙 깊숙이 연장하게 됐다. 북한 과학자들은 파키스탄의 주요 핵시설인 KRL(칸연구소)에서 핵 브리핑을 받았다. 그러나 수입된 우라늄 농축기술은 거의 쓸모없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여전히 날림 수준을 면치 못했다. 결국 핵무기 제조가 쉽지는 않음이 입증됐다. 1990년대 초 미국과 북한이 핵개발 문제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간 뒤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과 지미 카터가 평화사절로 북한을 다녀왔다. 그 뒤 빌 클린턴은 북한 정부와 기본 합의문을 작성했다. 1994년의 그 합의에 따라 클린턴은 경제지원과 경수로 발전소 건설의 대가로 플루토늄 재처리를 동결한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해 북한 핵 프로그램의 중심지 영변을 사찰하러 간 미국 전문가들은 눈을 의심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냉각지(冷却池)는 마치 버려진 수영장꼴이었다. 그 위의 한 유리창은 깨진 상태였다. 수면에는 죽은 새 한 마리가 떠 있었다. 수면에 뜬 조류(藻類) 밑으로 수중카메라를 들이대니 바닥에 금속 용기(마치 우유병 바구니 같았다)가 있었다. 재처리하면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폐연료봉들이 들어 있었다. 일부 부러진 연료봉도 있고, 상당수가 침전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여기저기 나뭇잎과 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파편을 응시하던 사찰단은 문득 물속에 개구리들이 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2년 기본합의문이 백지화(클린턴 시대의 잘못된 정책이라며 부시 정부가 폐기했다)된 뒤로 영변 핵시설은 깨끗이 치워지고 수리됐다고 시그 헤커는 말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을 지낸 헤커는 2004년 1월 북한의 초대를 받고 시찰을 나갔다. 그는 훗날 북한의 화학과 플루토늄 재처리 야금술이 “확실히 유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지구상에 인구가 2000만~2500만 명인 나라는 경제를 충분히 짜내기만하면 얼마든지 핵무장을 추진할 수 있는 중심집단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증거”라고 미국 몬터레이 국제문제 연구소의 핵확산방지 전문가 대니얼 핑크스턴은 말했다. 특히 북한은 권력 장악을 위해, 좋게 말해, 노골적으로 사람들을 못살게군 역사가 깊다. 거기에는 멀리 미국 정계의 많은 인사까지 포함된다.

부시가 들어서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2000년 10월 17일 워싱턴의 밤하늘은 아름다운 달빛에 휩싸여 있었다. 북한 권력서열 2위인 조명록 인민군 차수는 국무부의 화려한 벤저민 프랭클린 룸의 테라스에 서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음료수를 마셨다. 그날 낮에 클린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조명록은 북한이 테러리즘을 포기했다고 선언하면서 클린턴의 방북을 초청하는 김정일의 개인적 서한을 전달했다. 양측은 협상 타결이 거의 임박한 시점에 와 있었다. 북한이 모든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고, 단거리 스커드 미사일을 제외한 모든 미사일의 개발·실험·배치를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협상이었다. 클린턴 팀은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 대가로 북한은 완벽한 외교적 국가 승인,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지원 약속, 북한 정권의 정당성 인정, 클린턴 방북 시의 북한 안보 보장 약속 등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고 올브라이트의 수석보좌관이었던 웬디 셔먼은 말했다. 그날 밤 국무부 만찬장에 참석했던 한국의 양성철 주미대사에 따르면, 올브라이트와 조명록은 한쪽 구석에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편안한 듯이 보였고 조명록은 마치 차려자세로 서 있는 듯했다. 양 대사는 “조명록이 문화적 충격에 압도당했음이 분명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수도 평양에 미국의 전쟁범죄 박물관을 세워둔 나라의 군부 지도자가 적진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주일 뒤 올브라이트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다. 올브라이트는 나중에 김정일을 ‘유식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김정일은 북한의 안보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뒤, 친절하게도 건배할 때 그녀에게 너무 많은 술을 따르지 말라고 웨이터들에게 지시했다. 셔먼의 기억에 따르면 김정일은 심지어 주한미군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 달라고까지 요청했다. 올브라이트는 운동경기장에서 곡예사와 무용수 수만 명이 벌이는 매스게임에도 초대됐다. 북한 혁명이 달성한 위대한 업적으로 그녀를 감동시키려는 쇼였다. 매스게임 도중 대규모 공연자는 총천연색 플래카드들을 짜맞춰 김정일의 대포동 1호 미사일이 1998년 첫 시험 발사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순간 김정일은 올브라이트를 향해 “저것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의 첫 발사였고, 마지막 발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그날 저녁은 미·북 관계의 절정이었다. 그 후 공화당 강경파들은 툭하면 올브라이트의 방북을 비판하고 북한인들이 협박꾼에 불과하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아시아와 미국의 많은 외교관은 만일 당시 항구적인 화해가 이뤄졌다면 북한이 핵장치를 실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또 사정거리가 알래스카나 하와이까지 미치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개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물론 대포동 2호의 첫 번째 시험 발사는 실패했다). 하지만 막바지에 클린턴은 중동 평화회담에 몰두했다. 백악관 측은 많은 보좌관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위험한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중동 평화회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측의 국무장관 내정자 콜린 파월은 북·미 간 협상조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올브라이트와 측근들이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에게 그 협상 내용을 설명해주자, 파월은 기자회견에서 그 협상을 찬양했다. 2001년 3월 6일 파월은 이렇게 선언했다. “새 행정부는 북한을 포용하고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할 계획이다. 협상 테이블에는 몇 가지 유망한 요소들이 남아 있다.” 대북 화해정책인 자신의 ‘햇볕정책’에 관해 구세주 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역시 워싱턴으로 달려가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바로 그때 사건이 터졌다. 파월은 북한에 관해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내기 전에 자신의 상관인 부시의 의중부터 파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1년 3월 부시와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합동 기자회견장에 나온 김대중은 깜짝 놀랐다. 그는 지난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미국은 클린턴 정권의 정책을 계승하고 내가 앞장을 서면 북한과 합의한 내용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부시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그것을 제치고 북한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이 국민도 못 먹이는 주제에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공격했다. 거기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만일 클린턴의 정책이 계승됐다면 오늘날 북핵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점을 아쉽고 섭섭하게 생각한다.” 부시 팀은 파월과 김대중이 너무 앞서나갔다고 말한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시에게 햇볕정책을 너무 강요했다는 뜻이다. 당시 백악관에는 클린턴에게 적대적인 ‘ABC(Anything But Clinton: 빌 클린턴 전임 행정부가 추진한 정책은 모두 배제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리고 김정일은 부시 외교정책의 핵심인 광범한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만한 편리한 악당이었다. 9·11테러 사건은 김정일을 향한 부시의 태도를 굳히게 만들었다. 부시는 북한 정권교체 노선으로 선회했다. 특히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테러리스트들이 핵무기를 입수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어떤 나라들이 핵무기를 개발할 역량을 갖췄는지, 그리고 어떤 나라가 테러단체들과 연계됐는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검토 보고서에는 10여 개국이 언급됐다. 명단에 포함된 시리아와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 야심을 포기하도록 강제할 만한 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핵심 3인방, 즉 이란·이라크·북한은 미국의 어떠한 평화적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나라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부시 행정부의 다른 어떤 보고서보다도 바로 그 보고서가 2002년 1월 부시가 국정연설에서 ‘악의 축’ 발언을 하게 된 결정적 근거로 작용했다. 클린턴의 북한 방문은 거의 성사될 뻔했다. 그러나 부시는 김정일의 불성실한 행위를 응징할 훨씬 더 현실주의적인 접근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시 밑에서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마이클 그린이 지난주 뉴스위크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 부시는 1년 전 김정일과 북한 수뇌부의 불법 자금을 차단하는 계획을 직접 승인했다. 그것도 미국과 중국 등 여러 나라가 북한과의 새로운 대화계획을 발표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린은 부시가 “우리는 ‘법대로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 뒤 북한과의 대화가 무산됐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 관련 첩보를 조작하려 했다는 증거가 있다. 2002년 10월 미국의 제임스 켈리 대북 특사는 평양 방문 도중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증거’(미국 관리들의 표현)를 제시했다. 이는 김정일이 핵 프로그램을 진전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고수하고 있다는 클린턴 측의 주장을 무색케 했다. 나중에 부시 측 관리들은 북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고백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외교관들은 그것이 번역상의 실수였다고 말한다(켈리와는 연락이 안 돼 그의 입장을 듣지 못했다). 한편 김정일은 비밀리에 원심분리기를 수입함으로써 94년의 제네바합의 정신을 명백히 위반했다. 그러나 미 정보 소식통들이 뉴스위크에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 주변의 미국 측 감지장치들은 우라늄 농축 시 원심분리기에서 방출되는 물질을 탐지한 적이 없다. 2002년 초 스티븐 캠본 국방부 정보담당 차관이 주관한 회의에서 당시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데니스 블레어 제독은 자신의 정찰·감시 팀들이 여전히 방사능 물질을 탐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어느 관계자가 익명을 전제로 말한 바에 따르면, 캠본은 회의가 끝난 뒤 블레어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더니 그런 식의 보고보다는 더 나은 내용을 기대했었다고 핀잔을 줬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너무 냉각되다 보니 외교사상 보기 드문 해괴한 일화도 나왔다. 북한은 몇 안 되는 미국인 친구 중 한 명인 미 뉴저지주 해컨색시(市) 소재 식당 주인 로버트 이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건은 북한과의 교역을 촉진하는 한 무역단체를 이끈다. 이건이 오래전부터 즐겨 말하는 농담이 하나 있다. 유엔 주재 북한 외교관들이 해컨색에 있는 자신의 식당 커비스를 즐겨 찾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몰래 못된 짓을 하는 개구쟁이’가 된 듯한 기분을 즐기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커비스 식당은 북한 외교관들이 미국 정부의 허락 없이는 벗어나지 못하는 반경(半徑)을 넘어선 곳에 있다. 이건에 따르면 북한인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미국 정부에 ‘판매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대금을 여러 해에 걸쳐 나눠 받는 방안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고 이건은 말했다. 그러나 그 제안에 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 외교관들은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른 뒤에도 소련과 협상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게 아니다. 악마와도 할 수 있다.”

북한 “어떻게 해야 미국과 대화하나” 대를 이은 독재자 2명과 수세대에 걸친 과학자, 암거래상, 그리고 군부의 합작품으로 이제 북한이 핵 보유국 지위를 갖게 됐기 때문에 미국 관리 다수는 김정일과 협상할 때 바로 그런 악마를 상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미 행정부는 실제로 한국을 위한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작전계획 5027’은 오랫동안 미 태평양사령부 전략의 일부였다. 처음엔 남한의 방위만을 목표로 했지만 1990년대 초 이후론 한 발 더 나아가 침공 격퇴 후 북한을 침공해 정권 자체를 전복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또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의 모든 핵시설을 정밀 타격하는 비상계획도 수립했다. 이 역시 1992~93년 북핵 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세워진 계획이다. 그러나 미군 관리들은 최상의 경우에도 양측이 막대한 피해를 본다고 지적한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미 협상에 나서기로 한 이유 중 하나도 실은 1994년 5월 19일 윌리엄 페리 당시 국방장관이 클린턴에게 북한 침공에 따르는 잠재적 대가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시 90일 만에 미군 5만2000명, 한국군 49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고, 수 미상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페리가 협상을 하러 평양을 방문했다. 따라서 부시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손쉬운 외교적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10월 14일 유엔안보리는 대북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지나치게 강경한 제재에 난색을 표한다. 대테러 작전을 책임진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차관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의 자금을 세탁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을 제재하기로 한 부시의 결정은 기타 은행과 기업들에 북한이나 북한과 관련된 기업·금융기관들과 거래하지 말도록 경고함으로써 연쇄적인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북한은 세계 금융체계에 접근할 “다른 통로를 물색 중”이지만 “새로운 통로를 찾는 데 애로를 겪는다”고 그는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많은 아시아 외교관은 부시의 문제해결 방식을 비판한다. 그들은 부시가 북한 정권의 붕괴를 기다리는 동안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합법적인 은행자금을 빼앗기면 대신 불법 자금(예컨대 대량살상무기 판매로 번 돈)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은 훨씬 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지난 6년간 부시는 김정일에게 클린턴보다 더 많은 미국의 ‘레드 라인(red lines: 한계선)’을 넘어서도록 허용했다. 북한은 사용후 핵연료를 플루토늄으로 재처리하고, 유엔 사찰단을 쫓아냈으며, 이제 핵무기 보유 선언까지 했다. 향후 가장 심각한 위험은 특히 이란 등 김정일과 같은 의도를 가진 정권들로의 핵확산이다. 북한과 이란 간에 공통된 목표는 없다. 이란은 이슬람의 세계적 확산을 바라고, 북한은 주체사상의 확산을 원한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2002년 1월 부시가 “악의 축”이란 표현을 처음 쓸 때보다 실제 “악의 축”에 더 근접했다. 그리고 일부 이란 관리는 만일 북한이 핵실험 후에도 책임을 모면한다면 자신들도 핵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 수준을 높일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했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이번 주 아시아와 러시아를 방문하며 새로운 외교공세를 펴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라이스는 북한과 이란을 또다시 한 묶음으로 간주하며 두 나라를 핵범죄를 저지른 21세기의 신노예국으로 국제무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듯하다. 미국 입장에서 김정일을 저지할 최대의 희망은 중국에 있다. 중국은 북한으로 유입되는 연료의 약 70%를 제공한다. 미 관리들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통제불능 상태가 된 김정일에 지칠 대로 지쳤다고 판단해주길 바란다. 딕 체니 부통령과 가까운 관리들은 중국 측에 일본에서 고조되는 핵 클럽 가입 압박감을 경고한다. 그들은 또 북한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위협할 가능성도 경고한다. 김정일이 경고의 뜻으로 테러를 저지를 위험성 때문이다. 그 전례로 그들은 1987년 미얀마 해역 상공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858기 추락 사건을 든다. 지난주 북한이 또 한 차례 핵실험을 실시하겠다고 위협하는 순간에도 북한 외교관들은 사적으론 미국 측에 협상 재개를 간청하는 듯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곧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차석대사가 미국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건넨 말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는 한 미국 지인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미국이 다시 우리와 대화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제는 물 건너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번 주 러시아와 아시아의 외교책임자들에게 부시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도 북한을 협상에 복귀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고 전할 계획이다. 부시의 집무실엔 윈스턴 처칠의 청동 흉상이 놓여 있다. 처칠은 영국 총리였을 뿐 아니라 1914년 부분적으론 자존심 때문에 빌헬름 독일 황제가 일으킨 1차대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처칠의 생애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참호전을 치른 노장인 그는 1955년 영국 하원에서 수소폭탄과 군비통제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만일 하느님이 인류에게 싫증을 느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결코 위축되지 말고, 결코 지치지 말며, 결코 절망하지 말라”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핵시대는 삭막하다. 그러나 처칠의 말은 악마들을 길들이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미래를 전향적으로 바라보도록 용기를 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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