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협상력’ 공부 더 해야”
“한국은 ‘협상력’ 공부 더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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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츠 사장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다섯째 바토크의 주인공 론 반 오이엔 ING 생명 사장 덕에 ‘네덜란드 사람 = 축구광’ 이란 공식이 머릿속에 굳어버린 터라 눈앞이 깜깜했다(나중에 알았지만 스미츠 사장과 오이엔 사장은 매우 친한 사이다). 다행히(?) 스미츠 사장은 다른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서울 도심을 바라볼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이 뭔지 아세요? 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도심 한복판이 볼품없다는 겁니다. 경제력이 한국에 못 미치는 나라들도 도시계획만큼은 잘 세워 건물들을 멋지게 짓는데 한국의 빌딩들은 너무 ‘막’ 지은 티가 나요.”
다른 외국인들도 자주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빌딩들은 무지개 같다”. 이 색 저 색들이 ‘환상적으로’ 뒤엉켜 있어 햇빛 아래 모습이 영 볼품없다는 뜻이었다. 밤이면 몰라도 말이다.
“건물 색깔도 색깔이지만 높낮이가 들쭉날쭉한 게 세계적인 도시답지 않아요. 그것이 제가 느낀 한국의 첫 인상이었죠. 그나마 강남의 빌딩들은 낫더군요. 강남 지역 대부분의 빌딩이 88올림픽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서 그렇겠죠?”
서울 도심의 모습을 비꼬는 스미츠 사장의 의도가 뭔지 궁금했다.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듯 스미츠 사장은 “뭐, 한국이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경제 강국이 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던진다.
‘한국’이 사라지고 있다
스미츠 사장이 말을 잇는다. “한국이 70, 80년대 이룩한 ‘한강의 기적’은 현대 세계사에 있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초고속 성장에만 치중하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생겼던 거죠.”
스미츠 사장은 도심의 빌딩들이 ‘조잡’하게 어우러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확실한 도시계획 없이 무작정 허가를 주는 가운데, 너 나 할 것 없이 빌딩 세우는 데만 치중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결과가 생긴 것이라고.
미국 뉴욕이나 시카고 등의 도심을 이루는 빌딩들이 아무리 많아도 멋지게만 보이는 이유가 철저한 도시계획 때문이다. 시카고의 경우 빌딩의 크기는 물론 주변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디자인까지도 고려한 뒤 건축허가를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최고의 건축 도시로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정도 부작용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것’이겠죠. 정말 큰 문제는 ‘한국적’인 ‘한국만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확실히 ‘서양화’라는 건 경제성장이 늦었던 국가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죠. 서양 국가들의 경제발전이 대체적으로 빨라 경제성장의 모델이 돼 왔으니까요.
때문에 개발도상국으로선 경제성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국의 문화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고속성장’에 따른 ‘고속 서양화’로 한국 고유의 것이 많이 잊혀져 버린 것입니다.
많은 미래학자가 앞으로 ‘경제강국’이란 단어가 쇠퇴하고 ‘문화강국’이라는 말을 쓰게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닐까요?”
스미츠 사장이 생각하는 한국의 ‘잃어버린 문화’는 무엇일까?
“한국은 예부터 ‘천천히 천천히’ 라는 여유와 미덕이 있는 나라였다고 들었어요. 비를 절대로 맞지 않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길을 가는 ‘양반의 나라’였다고요. 하지만 지금 서울의 모습을 보세요. 이게 진정 양반의 여유로움이 깃든 도시입니까?
도로 위에선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고, 조금만 늦게 가도 ‘빵빵’ 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매사에 ‘빨리빨리’ 풍조가 강합니다.
‘무조건 빨리’라는 생각에 빠지면 ‘질’보다 ‘양’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선진국 정신이 아니죠. 여전히 존재하는 부실공사와 많은 산업재해도 다 빨리빨리 풍조 때문 아닐까요?”
‘빨리빨리’ 풍조는 두 번째 바토크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쿠퍼 푸르덴셜 투자증권 사장도 지적했던 문제점이었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이란 ‘빨리빨리’를 외치며 허덕이는 모습인 걸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했다.
“한국 사람 특유의 인정도 느끼기 힘들어졌다고 동료 외국인들이 제게 말하곤 합니다. 저야 한국살이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5년 넘게 한국에서 근무해 온 외국인들에겐 5년 전과 지금의 대우가 많이 다른가봐요. 예전엔 외국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했던 서울 시민들이었다는데, 전 불행히도 그 친절함을 아직 느껴 본 적이 없네요.
오히려 지방에 가면 매우 친절하게 대해줘요. 웃기죠? 서울에 영어 잘하는 한국 사람이 훨씬 많은데, 영어 한마디 못하는 시골 아주머니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영어를 잘하는 서울의 ‘대학생’과 영어를 못하는 시골의 ‘아주머니’를 빗대어 묘사하는 스미츠 사장의 설명에 웃음이 났다. 그러나 분명 웃기는 얘기는 아니다. 자신 앞에 놓인 음식 접시를 가리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볼 때 한식이야말로 최고·최상의 웰빙음식입니다. 김치에서 된장국까지, 어느 것 하나 건강에 나쁜 게 없지 않습니까? 이 같은 음식이 바로 몇 천 년 역사를 이어온 한국인 특유의 강한 정신력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햄버거에 피자를 즐기게 됐습니다.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을 최고의 외식이라고 생각하죠. 참고로 전 햄버거를 마지막으로 먹어본 게 1년 전입니다. 햄버거가 주식이었던 제가 오히려 한국 음식을 사랑하게 되어 한국인에게 반대로 한국 음식을 권하는 이 나라의 음식 문화가 정상일까요?”
한국 문화를 날카롭게 꼬집던 스미츠 사장. 이번엔 한국이 아시아의 경제강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뜻밖의’ 말로 그의 답이 시작됐다.
영어 보급에 힘써야
“제 생각엔 그다지 크게 개선해야 될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아시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야 할 점으론 영어의 보급이겠죠. 왜 영어냐고요? 원래 언어라는 게 서비스업에 있어선 최고의 도구 아닙니까?
그리고 그 언어 중 세계 공용어로 쓰이는 것이 영어고요. 아시다시피 21세기는 서비스업의 시대입니다. 세계를 상대로 서비스업을 하는데 영어 잘하는 나라의 경쟁력이 앞설 수밖에 없겠죠. 다행히 한국인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아시아 국가 평균보다 월등한 수준입니다.
중국·베트남 등의 나라가 빠른 속도로 한국을 추격하고 있지만 아직 영어의 보급력은 한국에 20년 이상 뒤져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보다 앞선 나라도 몇몇 있죠. 싱가포르의 경우 한국보다 많이 앞서 있는 상태죠. 그렇기에 아시아 서비스업 시장에서 이미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스미츠 사장은 이어 또 하나를 지적했다.
“많은 한국 기업이 세계시장으로 영역을 넓힌 상태입니다. 그런데 세계시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협상능력입니다. 저도 이제껏 많은 한국인과 일하며 협상을 해 봤지만 한국인들은 협상의 의미를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도통 양보할 줄을 모르니까요.
그저 어떤 목표를 세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려고만 하니까 문제예요. 숫자 4와 8의 중간은 6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8을, 최소한 7을 요구합니다. 또 한국인들의 ‘접대 능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결국 이것 또한 모두 협상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능구렁이 같은 속셈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타협할 줄 모르면 국제무대에서 신용을 잃게 됩니다. 한국 기업들이 당장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협상을 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기술력과 디자인이 최고 자산
두 번째 와인 병도 어느새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한국 경제를 보는 스미츠 사장의 ‘제언’을 물어봤다.
“솔직히 한국 기업들만큼 처지가 좋으면서 걱정·근심이 많은 기업들도 없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삼성·LG 등의 회사는 유럽에선 이미 최고의 기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젠 길에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현대·기아 자동차들은 어떻고요?
그리고 아직 아시아엔 중국을 비롯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걱정해야 된다고 하고, 그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과는 아직 10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두 가지만큼은 중국이 한국을 절대로 쉽게 추월할 수 없기 때문이죠. 바로 기술력과 디자인입니다. 이것은 모방만 해서는 절대로 이룩할 수 없는 것이죠. 오랜 시간 동안의 노하우가 축적되고 거기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결합된 최고의 21세기형 기업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중견·중소 기업들도 결국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승부를 건다며 대기업 이상의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하이얼 같은 회사가 삼성보다 규모가 더 클 수 있고, 생산력·매출에서 앞선다고 해도 생산품들의 질 자체는 삼성에 훨씬 못 미치는 이유가 바로 기술력과 디자인의 부재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두 단어야말로 한국 기업들이 앞으로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앞서갈 수 있는 비결이자 돌파구라고 생각합니다.”
‘제언’ 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반적인 얘기 아니냐는 물음에 스미츠 사장은 왜 자꾸 ‘문제점’만을 지적해 주길 바라느냐며 일침을 놓았다. 한국의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만큼은 너무나도 훌륭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제껏 한국 경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던 몇몇 CEO와는 약간 다른 생각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단순히 ‘말조심’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스미츠 사장이 마지막 와인잔을 비우며 던진 다음 말은 적어도 ‘한국 경제는 훌륭하다’는 말이 진심임을 알게 했다.
“한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한국에 온 지 1년 반밖에 안 됐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느끼고 있어요. 정부와 기업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생각을 해보세요. 당신네들이 얼마나 대단한 국가를 건설했는지를. 6·25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던 국토에 이토록 훌륭한 경제국가를 세웠습니다.
30년 전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라니까요. 지난해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5명의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이 가족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었던 강원도 원주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자신들이 목숨을 바쳤던 나라가 이처럼 발전을 하다니 감격스럽다면서요.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이처럼 감동을 줍니다. 부디 그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취재 뒷얘기들 | ||
그는 진정한 밤무대 거물? ▶ 여유시간만 있으면 산을 오른다는 스미츠 사장. 한국의 산들이 제법 운치가 있긴 있나 보다. 이제껏 만난 외국인 CEO 중 다수가 한국의 산을 칭찬했으니 말이다. 스미츠 사장은 한술 더 떠 한국에서 경험한 최고의 순간을 올해 1월 설악산을 등반할 때로 꼽았다. 하얗게 눈이 덮인 설악산의 설경은 최고였다고. ▶ 스미츠 사장 보고 ‘꾼’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듯. 프랑스 레스토랑 ‘비숀’에서 와인 두 병을 마신 뒤 2차를 가자고 졸랐다. 할 수 없이 따라간 곳은 남산 하얏트 호텔의 클럽, ‘제이제이 마허니’였다. 라이브 밴드의 음악이 좋아 가끔 들른다고 하더니 이게 웬일? 알고 보니 화류계의 거물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연신 악수하고 인사하던 스미츠 사장. 결국 기자 먼저 클럽에서 나와야 했다. 그는 언제 나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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