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부시의‘대통령 아들 구하기’
공화당이 의회 지배권 잃자 이라크 정책 노선 변경 위해 베이커 전 국무장관 필두로 부시 전 대통령 팀이 나섰다. 두 사람은 수퍼마켓 주차장에서 은밀히 만났다. 조지 H W 부시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과 CIA 국장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 텍사스 A&M대 학장은 선거 직전의 일요일 텍사스주 칼리지 스테이션에서 두 시간 동안 차를 달려 소읍 맥그리거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조시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을 만나 그의 차로 바꿔 탔다. 게이츠는 크로퍼드에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별장 집무실로 조용히 안내됐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부시는 마침내 게이츠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후임에 적격이라고 확신했다. 영부인 로라 부시의 60번째 생일이자 대통령 부부의 29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려 대통령 별장을 찾은 손님들은 게이츠가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텍사스주 건너편 휴스턴에서는 제임스 A 베이커 3세가 평소처럼 자택에서 일요일 오후의 낮잠을 즐겼다. 그러나 베이커가 부시와 게이츠의 비밀회동에 관련돼 있으며, 그가 근본적인 권력개편의 일환으로 럼즈펠드의 해고와 게이츠의 지명을 주선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다. 41대 부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베이커가 43대 부시 대통령의 마지막 구출작전에 나섰다는 얘기였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다. 베이커는 이라크 사태의 해법을 모색하는 이라크 연구그룹(ISG)의 공동의장이며 게이츠는 그 단체의 선임위원으로 베이커나 41대 부시 대통령과 모두 가까웠다. 럼즈펠드는 베이커가 무엇을 제안하든 가로막았을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게이츠는 ISG의 제안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제안도 일부 있다) 환영할 가능성이 높다. 베이커는 노소 불문하고 최고의 막후 조종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 국무장관·재무장관·백악관 비서실장을 두루 역임한 팔방미인 현자 베이커에게 뉴스위크가 물었다. 이번 일에 관련됐는가. “여기 풋내기는 없소.” 베이커가 자신의 전형적인 비음 섞인 억양으로 말했다. 사실 그랬다. 기자의 술수에 넘어가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누설할 비밀이 있다는 뜻도 아니었다(베이커는 국방장관의 경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백악관은 말했다). 이라크라는 골칫거리에서 갑자기 해방되리라는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라고 베이커는 경고했다.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오. 게다가 뚜렷한 해결책도 없소.” 베이커는 좋은 소식을 알리기 직전에 사람들의 기대치를 끌어내리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역할과 성공 가능성을 평가절하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ISG는 앞으로 한 달여 사이에 중도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전면적인 철수’도 아니고 ‘현상 고수’도 아닌 실행방안이다. 선거결과와 출구 여론조사로 판단할 때 그것은 악의적인 당파싸움, 이념적인 대립의 종식과 함께 국민이 원하는 바다. 그러나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베이커는 아직도 조지 W 부시를 설득하지 못했다. 선거 후의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협공에 걸려 1루와 2루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주자처럼 보였다. 대통령은 필경 꼼짝없이 이라크 문제에 대해 어떤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다. 농담을 던지고 과장된 표정을 짓고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은 이라크나 선거결과 이상의 걱정거리가 있는 듯했다. 그는 어떤 더 개인적인 내부의 악마와 씨름하는 데 온 정신이 팔린 듯했다. 지난주 부시의 측근들은 부시가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려 한다는 추측을 열심히 부인했다. 대통령 자신이 그런 언론의 입방아에 무관심하다고 전해졌다. 선거 다음날 아침 그가 아버지의 보좌관 중 한 명을 영입하려 한다는 추측에 공식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물었을 때 부시는 보좌관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그는 네오콘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부시의 한 고위 보좌관은 말했다. 대통령 집무실 내의 대화에 관련된 문제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이번 일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가장 우수하고 명석한 사람을 찾는다.” 그 가장 우수하고 명석한 사람이 그동안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되는 거리에 내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부시 가족사의 비극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험이 풍부하고 현명한 외교정책 전문가다. 가령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선출됐다면 아버지 부시는 아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분쟁해결에 힘썼으리라. 대신 아버지 부시는 쓰나미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호작업에 일부 참여했을 뿐 그 밖에는 아들이 애써 외면하는 정치 대담프로들을 시청하며 아들이 조롱당하거나 비판받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전부였다. 그가 대통령의 혈육이라는 사실이 사실상 그의 개입을 가로막았던 셈이다. 그는 아들 부시의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나 애정 어린 지지 이외의 충고가 적절하거나 현명하지 않다고 친구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대통령의 신념에 관한 문제라는 이유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소식통은 41대 부시 대통령이 럼즈펠드-게이츠 인사에 ‘지문’을 남기긴 했으나 그의 정확한 역할은 추측만 가능하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간접적으로 넌지시 암시를 주는 식이었을 듯하다. 41대 부시가 43대 부시에게 ‘내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 사람 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은 밥 게이츠’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역대 행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한 중진 정치인은 말했다(부시 집안의 일이라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한때 CIA 국장을 지내고 예일대 비밀단체 스컬&본스의 열성회원이었던 부시는 “부인(否認)의 대가”라고 짐 베이커의 어느 옛 보좌관은 말했다(부시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익명을 요구했다). 이번 일에서 베이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10월 초 새로운 항공모함 조지 H W 부시호의 진수식에서 밥 게이츠뿐 아니라 부시 부자 모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네 사람의 화제가 단순히 텍사스 A&M의 미식축구팀이었을지도 모른다. 베이커는 부시와 마찬가지로 공개석상에서 비밀공작을 꾸몄을 가능성이 작다. “그런 회의라면 최대 참석인원이 두 명”이라고 베이커의 전 보좌관은 말했다. 베이커와 부시가 럼즈펠드-게이츠 경질인사에 관해 서로 논의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부시 가문과 베이커의 관계는 가까우면서도 경쟁적이었으며 질투와 의심도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70년대 휴스턴 컨트리 클럽에서 테니스 복식 경기를 하면서 친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단식 경기를 좋아하고 계속한다”고 베이커는 최근 발간된 회고록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정치를 멀리하라(Work Hard, Study … and Keep Out of Politics)’에 썼다. 양쪽 집안의 두 아버지와 아들 여덟 명은 해마다 추수감사절에 미식축구 경기를 했다(“손으로 몸을 건드리기만 하는 터치 풋볼이었지만 때로는 태클에 훨씬 더 가까웠다”). 베이커는 가끔 왜 자신이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1992년 베이커가 41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열심히 뛰지 않는다고 바버라 부시가 그에게 발끈한 일은 널리 알려졌다. 조지 W 부시는 대선 출마를 준비하면서 베이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때때로 그는 어머니의 분노를 그대로 따라 표시한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고 베이커는 회고록에 적었다. 하지만 2000년 플로리다주 재검표 사태 당시 유능한 변호사를 찾는 부시의 부름에는 기꺼이 응했다. 베이커가 위기의 순간에 부시 가문을 위해 발휘한 기지와 근면성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베이커는 단순히 부시 일가의 변호사가 아니다. 베이커의 보좌관을 지낸 한 인사는 ISG에서 베이커의 역할과 참된 충성심을 설명하며 루이스 브랜다이스 전 대법관의 어록을 인용했다. 브랜다이스는 “변호사는 때로는 고객이 아니라 어떤 상황을 대표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경우 상황이란 부시 대통령이나 부시 가문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이라크 사태의 해결책을 찾는 국익을 말한다. “우연히도 그게 베이커 자신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그 전 보좌관은 말했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나듯 베이커는 정치꾼이나 돈을 노리고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기억되길 원한다. ISG는 2006년 3월 워싱턴의 은퇴한 외교정책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었다. 처음에는 거기서 낸 결론이 결국 먼지 덮인 책장에 그냥 보관될 신세가 될 듯했다. 베이커는 이라크에 관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측근들이 이라크 침공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심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에게 집중됐다. 스코크로프트는 현 부시 대통령의 보좌관들에게 느낀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딕 체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이상 모르겠다”고 스코크로프트는 뉴요커지에 말했다. 베이커는 ISG를 이끌어달라고 부시 대통령이 직접 언질을 준 다음에야 합류했다. ISG에 정통한 한 소식통(민감한 사안이라 익명을 요구했다)에 따르면 베이커는 ISG 위원들이 장성들과 외교관의 증언을 들을 때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막후의 약속도 받아냈다. 베이커는 처음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그 소식통은 전했다. 하지만 ISG는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과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 같은 일류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베이커의 개인적인 매력과 그가 선발과정에 직접 참여한 결과다. 공동위원장 체제는 초당적 정신을 추구하려 특별히 고안됐다. 공동위원장인 리 해밀턴은 하원 외교위원장을 지냈으며 공정성과 깊은 식견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특히 9·11 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일할 때 그런 자질은 또다시 입증됐다. 베이커는 뉴스위크가 촬영 협조를 요청하자 해밀턴도 함께하지 않으면 찍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당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이커는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기세가 오른 의회의 민주당이 ISG를 부시 행정부의 도구로 생각하고 내년 1월 새 의회가 개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들 나름의 이라크 철군안을 내놓게 되면 중도 타협점을 찾는다는 희망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안다. 베이커는 참을성 있게, 또 조용히, 양자 간의 입장을 조율해 사전 협의안을 구성한 뒤 공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는 현대사를 통틀어, 적어도 클라크 클리퍼드(베트남전 당시 존슨 행정부의 국방장관) 이래 그 어떤 워싱턴 정가의 정치인이나 지도자보다 적대적인 세력들을 더 많이 타협으로 이끌었다. 또 많은 법안 통과의 배후에 베이커가 있었다(1986년 세제개정법의 경우처럼 공로는 의원들이 전부 차지했다). 베이커는 ISG를 이끌면서 이란·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관들과도 접촉했고, 직접 이라크로 가서 현지 민간·군부 지도자들을 만났다. 또 자존심 강하고 때로는 서로 갈등하는 ISG 위원들도 잘 다독거렸다. 대선 출마를 고려해 사퇴한 줄리아니 대신 합류한 에드 미즈 전 법무장관 등의 강경파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었을지 모른다. 베이커가 위원들의 합의를 도출해 12월 중 최종 보고서를 내기까지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고 베이커는 말했다. 위원들은 이제 막 보고서에 담을 권고안 초안을 접수 중이다.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지만 ISG는 이라크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촉구할 게 확실하다. 이란과 시리아 같은 적국들과의 협상을 거부해온 부시 행정부의 노선을 뒤집는 일이다. “부시 행정부가 그리 좋아하지 않을 만한 내용이 이 보고서 안에 있을 전망”이라고 베이커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말했다. 베이커는 미군의 내부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기를 아주 꺼린다고 말하지만 이라크 주둔 병력의 감축이나 재배치를 촉구하는 내용도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베이커는 가끔씩 부시 대통령을 찾아가 “장황한 환담을 나눈다”고 말했다. 그러나 ISG 업무를 논의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시기 조절을 매우 중시한다”고 그의 보좌관을 지낸 한 인사가 말했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드러내는 불만을 부시가 볼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이다. 베이커는 야생 칠면조 사냥을 아주 좋아한다. 끝없는 참을성이 요구되는 스포츠다. “한 발을 쏘려고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한다”고 전 보좌관이 말했다. 그는 조용히 또 방심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추위나 더위 속에서 앉아 있는 베이커의 능력에 탄복한다. “마침내 때가 왔을 때 그 아주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베이커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베이커의 설득력은 대단하다. 역시 정치 고단수인 제임스 카빌조차 베이커를 “절대적인 표준”이라고 칭했다. 베이커는 때로 비판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한번은 부시 대통령의 핵심 원칙은 “하느님과 운동”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베이커는 워싱턴 최고의 아첨꾼인지도 모른다. 아첨꾼들이 우글대는 워싱턴에서 최고라면 대단한 일이다. 또 그는 항상 준비가 돼 있다. 텍사스 명문가의 변호사인 아버지에게서 ‘5P’ 원칙으로 교육받았다. ‘유비무환’(Prior preparation prevents poor performance)의 원칙이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간수’라고 불렀다. 그렇게 애정 어린 표현은 아니었다. 베이커의 아버지는 약점이나 변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베이커가 아침에 늦잠을 자면 아버지는 누워 있는 아이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었다. 베이커는 현실적이면서 품위를 갖춘 사람이다. 언젠가 텍사스의 한 작가는 베이커가 검은색 타이를 맨 채 맥주를 캔으로 마실 만한 텍사스 사람이라고 말했다. 함께 대학 시절을 보낸 한 프린스턴대 졸업생은 베이커가 ‘21클럽’의 대표였다고 회상하며 경외감을 표했다. 베이커가 정회원들만 참가하는 회식 모임에서 위스키 21잔을 잇달아 마시는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뜻이다. 베이커는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베이커가 흥청망청 술만 퍼마시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해야 할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텍사스대 로스쿨에 다닐 때 베이커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으려고 아버지가 몸담았던 동아리에 들어갔다. 가입하려면 죽은 물고기를 일주일 동안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베이커는 해군 대위로 군에 복무했고, 그때 아내와 아이를 얻었다. 이제 베이커는 은발에, 예전보다 쉽게 지치는 76세 노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ISG가 권고하리라고 확실시되는 외교 협상을 추진하는 데 안성맞춤인 듯하다. 사실 부시 대통령은 세상 물정을 잘 알고, 노련하며, 설득력 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환상의 복식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잘 안다. 그들은 휴스턴에서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며 오랜 테니스 단짝인 아버지 부시와 베이커다. 베이커가 그 역할을 맡을까? “너무 가설적인 이야기”라고 베이커는 말했다. 국무장관까지 지낸 베이커는 결코 풋내기가 아니다. With RICHARD WOLFFE, MICHAEL ISIKOFF and JOHN BARRY in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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