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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소리없는 전쟁 치열

기업들 소리없는 전쟁 치열

▶1. 러시아계 루크오일 주유소 2. 독일계 유통회사 메트로 3. 러시아계 이동통신 서비스 비라인 4. 러이사계 오일회사 TNK

1941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총구는 폴란드를 겨눴지만 독일군이 더 눈독을 들인 땅은 우크라이나였다. 병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가 됐지만 이것도 다 옛날 얘기다. 독일 기업이 밀물처럼 들어오면서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독일어는 최고 인기 외국어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인 회사가 유통회사인 메트로다. 월마트 독일 법인을 인수해 유명해진 메트로는 현지에 이미 84개의 매장을 확보해 메이저급으로 부상했다. 독일계 HFB·프로크레디트은행 등도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독일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54억6600만 달러를 투자한 ‘큰손’이다. 키예프 같은 대도시는 물론 인구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리보프·자포로지 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영국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와 러시아 알파그룹이 경영하는 TNK 주유소다. 일본의 닛산과 마쓰시타·도요타 자동차 전시관도 간간이 눈에 띈다. 나라 전체가 외국 자본의 각축장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끼게 해준다.

소비재는 외국 브랜드가 장악 외국인, 특히 서방 자본의 투자가 적극적인 분야는 식품 쪽이다. 전체 외국인 투자의 15% 가량이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자금 회수가 빠르기 때문이다. 다만 투자 트렌드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값싼 원료를 조달해가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공장설비를 갖추거나 개조해 2·3차 가공 후 판매를 하는 것이 대세다. 3~4년 전부터 바뀐 트렌드다. 단순한 원료 공급기지에서 내수시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을 확장하는 회사도 많다. 스위스의 네슬레가 ‘토르친(Torchin)’이라는 브랜드로 들어와 영업하다가 99년 중소식품회사인 스비토치를 사들였다. 미국의 코로나를 비롯해 폴란드·덴마크계 식품회사들이 들어와 종업원 100명 규모의 작은 공장을 돌리고 있다. 영국 최대 유통회사인 딕슨그룹은 더 노골적이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리테일 영업을 본격화한 딕슨은 2010년까지 200여 곳에 점포를 세워 유통 왕좌가 되겠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 진출을 “엘도라도 개척”이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어디에서든 비행기 타고 두 시간이면 엘도라도에 닿는다.
서방 자본들이 우크라이나 진출을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4700만 명에 이르는 충분히 큰 시장이 매력적이다. 게다가 시장이 극심한 경쟁체제가 아니다. 수요가 늘고 있다. 이럴 땐 깃발을 꽂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럽이나 미국의 투자가들과 대조적으로 러시아 회사들은 우크라이나 경제의 기초 분야들, 즉 에너지·철강·기계제작 같은 중후 장대형 산업에서 터줏대감이 됐다. 소련 시절 존재했던 경제사슬을 이어줄 수 있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러시아 최대 민간재벌 알파그룹을 이끄는 미하일 프리드만이 앞장서고 있다. 알파그룹은 원유 수송은 물론 은행·부동산 사업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 영국 BP와 합작한 석유회사 TNK, 이동통신회사 비라인, 알파은행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러시아 3대 석유회사인 루크오일도 들어와 있다. ‘루크(LUK)’라는 빨간색 로고로 손님을 끌고 있는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 주유소 시장의 28%를 장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에너지 목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본격화된 외국인 투자는 2003년 이후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다. 서방과 러시아 자본 모두 이동통신 서비스와 금융 부문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동유럽은 물론 터키 자본의 러브콜도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 특히 은행 부문은 외국인 투자가 활발하다 못해 치열하다. 지난 1년간 굵직한 인수합병(M&A)이 4~5건이나 됐다. 지난해 8월 오스트리아 라이페이슨은행이 우크라이나 2위 아발은행 지분 93%를 10억 달러에 사들였다. 역대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외국 기업과의 M&A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딜이었다. 아발은행은 올해 6월 헝가리계 OTP은행에 6억5000만 유로(약 7억800만 달러)에 재인수됐다. 올해 5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외국계 은행은 모두 28개. 전체 188개 은행 가운데 14%나 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체 은행자산의 24.1%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우크라이나은행은 연말께 그 비중이 31%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라이페이슨은행을 비롯해 시티은행(미국), 캘리온은행(프랑스), 페카오은행(폴란드), ING은행(네덜란드), HFB은행(독일), 프로크레디트은행(독일·미국·영국 합작), 르네상스캐피털(네덜란드), BM은행(러시아·스위스 합작) 등이 우크라이나 경제의 ‘핏줄’이 되고 있다. ING나 AIG 같은 굴지의 보험회사도 들어왔다.

이동통신 사업 ‘황금알’ M&A 시장이 달아오르다 보니 현지 은행의 몸값이 덩달아 올라간다. 지난해 오스트리아 에르스테(Erste)은행은 우크라이나 프레스티츠은행 지분 50.5%를 사들였는데 자그마치 2770만 유로(약 3300만 달러)를 내야 했다. 자본금 300만 그리브나(약 60만 달러), 종업원 100여 명의 중소은행치고는 꽤 센 가격이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지난 4월엔 프랑스 BNP파리바가 우크라이나 4위 은행인 우크르시브은행의 지분 51%를 사들였는데 구체적인 계약조건은 밝히지 않았다.


브리셋이란
‘BRIC+Central&East Europe Turkey’의 준말. 2000년대를 전후해 빠른 경제성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흥 경제 4국, 즉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에 중앙아시아·동유럽 및 터키를 포함한다.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 그룹이 처음 이 조어를 제시했다.
이동통신 시장에서는 ‘노다지 캐기’가 한창이다. 우크라이나 휴대전화 가입자는 연말까지 18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연평균 20~30%씩 성장해 올해 말에는 가입률이 88%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크라이나는 중국·인도·러시아·미국·파키스탄 등에 이어 이동통신 순증가율이 세계 6위다. 당연히 외국 기업 진출이 적극적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KT 같은 우크르텔레콤을 빼고는 외국 기업이 싹쓸이했다고 보면 된다. 이동통신 시장에서 1~2위를 다투는 UMC는 러시아 최대 모바일 사업자인 MTS(Mobile TeleSystems)의 100% 자회사다. 최근엔 터키가 가세해 ‘라이프’라는 이동통신 브랜드를 내놓았다. 시장이 커지면서 외국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다. UMC와 1위 경쟁을 하고 있는 키예프스타는 원래 ‘텔레노르’라는 핀란드 회사와 알파그룹이 각각 40대60으로 합작한 회사다. 두 회사가 경영권 다툼을 벌이다 결국 알파그룹이 물러났다. 그렇다고 시장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알파는 최근 ‘비라인’이라는 신규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절치부심하고 있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크라이나에서 이동통신 사업은 황금알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UMC는 59억1462만 그리브나(약 11억8300만 달러), 키예프스타는 58억1911만 그리브나(약 11억64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냈다. M&A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미탈스틸의 크리보리즈스탈 인수였다. 지난해 10월 세계 최대 철강회사인 미탈에 전격 인수된 크리보리즈스탈은 우크라이나 최대 제철소로 꼽힌다. 이로써 전 세계 철강 생산량의 10분의 1을 접수한 ‘21C 철강왕’ 락시미 미탈 미탈스틸 회장의 일성은 이랬다. “(M&A를 강화하는 목적은) 브리셋(BRICET·용어설명 참조) 시장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이제 북미는 물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가 미탈의 새로운 성장시장이 될 것이다.”

‘은행 천국’인 나라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국립우크라이나은행 총재 출신이다. 1993년부터 99년까지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그는 금융 시스템을 개혁하고 인플레이션을 잡으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국립은행장 출신 대통령을 배출해서일까? 우크라이나는 ‘은행 천국’이다. 500만 유로의 자본금만 있으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은행 문을 열 수 있다. 덕분에 2006년 6월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모두 188개의 은행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웃인 카자흐스탄에 34개의 은행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WTO 가입을 국정목표로 삼고 있는 유셴코 정부가 각종 규제를 풀고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은행 소유주는 다양하다. 올렉산드르 오멜찬코 키예프시장은 자기 소유의 은행을 아들에게 맡기고 시장선거에 출마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마다 ‘띄엄띄엄’ 세계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장대높이뛰기 챔피언 세르게이 붑카도 은행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대형은행들은 ‘자회사 은행’을 무더기로 만들어냈다. 10개 상위 은행은 50개가 넘는 자(子)은행을 가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선 시장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선도 은행들의 전략으로 해석한다. 우크라이나 은행은 상위 5~6개를 빼면 규모가 아주 작다. 주로 기업을 상대로 영업하고 개인 대출을 해주는 은행은 50여 곳에 불과하다. 대출금리는 12~16%로 매우 높다. 예금 이자는 거의 없다. 2~3년 전만 해도 은행에 돈을 맡기면 ‘보관료’를 내야 했다. 규제가 허술하다 보니 은행 부실이 심각하다. 경영 컨설팅 회사인 PwC는 “상위 10개 은행 정도만 경쟁력이 있으며 하위 10%는 부도 위기”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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